안녕하세요. 저는 열여덟 어른 ‘신선’입니다. 저는 이번에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로 참여하면서 다른 열여덟 어른들을 직접 만나 보았는데요. 열여덟 어른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이 자립하면서 겪었던 사회 편견부터 정책의 문제까지, 당사자의 시선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열여덟 어른을 아시나요? 
만 18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보호종료아동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열여덟 어른’ 이라고 부릅니다. 

진이씨는 대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시설 외부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규모가 큰 시설에서 자라면서 시설 내의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19살까지 시설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다가 준비도 없이 시설 외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대학 수업 중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가 있었다. 시설 친구들 이외 남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터라 뭘 어떻게 꺼내야할지 몰라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었다고 한다. 충분한 준비나 경험 없이 사회에 던져졌을 때, 우리는 당황스럽고, 방황을 하게 된다. 혹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준비 없이 사회에 나오게 된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을 다루고 싶었다.

시설 친구들의 대변인, 그녀와 친구들의 첫 사회생활 

Q. 진이씨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허진이: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아동양육시설(보육원)에서 자란 25살 허진이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에게 양보하고, 궂은일에 나서고, 친구들의 억울함을 대변하려고 했던 기억이 있어요. 친구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다 보니 문득 누군가의 마음을 나누는 일을 하고 싶어졌고, 자연스럽게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현재는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 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저만의 가정을 꾸려 생활하고 있는 신혼 1년차 보호종료아동입니다.

Q.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온 곳인데, 퇴소할 때의 기분은 어땠어요?

허진이: 시설에서는 통제가 많았기 때문에 퇴소하는 날만을 기다렸어요. 저녁 9시만 되면 시설에 들어와야 하는 게 불만이었죠. 그래서 퇴소하는 날이 저에게는 자유를 쟁취하는 날이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론 36인치 정도의 큰 캐리어에 제 20년의 생활이 다 담겨진다는 사실에 씁쓸했어요. 기숙사로 가는 기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실감이 나 혼자 울던 기억도 있어요. 그리고 퇴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설동기들이 2명이나 자살을 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서 퇴소 후의 삶이 더 우울하게 다가왔어요.

Q. 친구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시설 퇴소하고나서 적응을 하지 못했던 건가요? 당시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나요?

허진이: 같이 생활하던 시설 친구가 자립하던 과정에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달려갔어요. 그곳에서는 시설 관계자분들 몇 분이 미리 와 계셨는데 저희 시설이 천주교 재단이다 보니 자살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장례 과정에서도 도움을 받기도 어려웠고요. 그 당시에 두 친구나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저와 친구들은 처음 접해보는 상황에 너무 당황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었어요. 그래도 장례를 치르겠다고 40명이나 되는 친구들이 몰려왔는데, 연고자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의 시신이 2~3일을 안치실에 그냥 방치돼야만 했어요. 중환자실 대기실에 남아 상황을 설명했지만 거절당했고 이틀 동안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만 해서 너무 슬프고 화가 났어요.

한 친구가 “우리가 19년 동안 함께 생활한 가족인데 도대체 어떤 가족이 와야 친구의 시신을 줄 수 있냐”고 항의하던 기억이 있어요. 결국에는 시설 동문 선배들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해주고서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어요. 장례비용도 돈을 아끼자고 저희끼리 치우고, 나르며 고생했는데도 1,000만 원 정도가 나오더라고요. 부조금을 다 합쳐서 다행히 그 비용을 치뤘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장례를 치르고 나니 이제는 화장의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화장도 직계가족만이 결정할 수 있대요. 부모님이 없다고 뭐 이렇게 안되는 게 많은 건지 너무 화가 나면서 비참했어요.

결국 화장도 하지 못한 그 친구의 시신은 무연고자들이 묻히는 어느 땅으로 가게 됐어요. 버려진 땅처럼 황량한 땅이었어요. 주로 노숙자나, 비명횡사한 무연고자들이 묻히는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친구의 장례는 그곳에서 xx년도에 몇 번째 아이라는 표식만 적힌 비석과 함께 묻히는 거로 끝이 났어요. 힘들게 자립해서 살아가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삶의 의지를 놓은 건데…갈 때까지 너무 비참하게 가야는 인생이라는 게 너무 슬펐어요.

생각보다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도 비일비재해요. 한 친구는 자살을 해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보름정도를 아무도 몰랐고 그 이후 일주일 동안 연락하는 사람이 없어 시신이 3주를 방치되었다고도 해요. 친구들의 삶이 불쌍했고 슬펐어요. 그리고 동시에 그게 내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이 없다는 게 이렇게 슬픈 거구나를 그때서야 느꼈던 것 같아요.

“밝게 빛나던 너를 영원히 우리 맘속에 간직할게”

Q. 인터뷰를 하면서 느끼는 거지만 퇴소 후 어려움을 겪어도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딱히 없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먼저 밝히자니, 그들의 태도가 변할까봐 두렵기도 하고요. 진이씨는 친구들에게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낸 경험이 있었나요? 친구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허진이: 대학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제가 부모님 얘기도 안 하고, 명절에도 집에 가지 않는 걸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친구들을 불러 모아 보육원에서 생활했던 얘기를 꺼냈어요. 가장 친한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야만 나답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요. 밝히지 않고 계속 관계를 유지하려면, 매번 거짓말을 지어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거든요. 그때 친구들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어” 라며 담담하게 제 얘기를 들어줬어요. 고마웠죠. 오히려 제 얘기를 듣고 우는 친구들이 있었다면 그게 더 어색했을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괜찮은데 잘 살아왔는데 동정 받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반대로 제가 만약 다른 친구들의 속사정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해봤는데, 저는 위로의 말을 전해줄 거 같기는 해요. 친구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고 하면 걱정해주고, 위로해주고 마음 써주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애써 올라오는 감정을 참아가면서까지 담담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걸 포기하고 싶던 순간, 힘이 되어 준 기부자

Q. 힘들고 지칠 때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들이 있었나요?

허진이: 저 같은 경우는 정말 운이 좋게도 성인이 되고 나서 후원자님을 만나게 됐어요. 자립정착금도 다 사용한데다 기숙사마저 떨어지면서 방황을 할 때 기적같이 후원자님을 지하철에서 만났게 됐었죠. 나중에 후원자님에게 듣기로 마음으로 함께하는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기도 하는 중에 제가 지하철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인사를 했다고 해요. 후원자님은 시설 출신의 선배님으로 개인 사업을 하면서 후배 후원에 힘을 쓰고 계셨기 때문에 기억이 났고, 반갑게 인사를 했었어요. 그렇게 저와 후원자님의 인연이 시작됐어요. 후원자님께서도 신께서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저를 딸처럼 대해주셨죠.

후원자님을 통해 저는 정서적으로 여유를 느낄 수 있었어요. 후원자님께서는 이렇게 말해주셨어요. “세상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고, 진이 너도 그런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지금 주는 마음 충분히 다 받아갔으면 좋겠어.” 진심이 묻어나는 말과 따뜻한 관심에 눈물이 났어요. 항상 사랑이 결핍됐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때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된 거 같아요. 저도 제 안에 사랑을 많이 채워서 따뜻함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다짐하게 되었어요.

가족, 함께하는 울타리가 생기다 

Q. 후원자님을 통해 받은 사랑을 통해 삶의 여유가 생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결혼도 일찍 선택한 것 같은데, 결혼 과정은 어땠어요?

허진이: 지금 남편과는 같은 시설 출신으로 인연이 닿아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결혼 준비과정에서는 식장 예약, 스튜디오 촬영..등 문제없이 잘 진행됐어요. 그런데 어른들을 모시는 과정이 저에게는 정말 어렵더라고요. 저는 부모님이라고 생각하는 후원자님 내외를 혼주석에 모셨고, 남편은 친분이 있는 형님내외를 모셨어요. 혼주석도 채웠겠다 이제 결혼식 준비에 부족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결혼식 일주일 전쯤 남편 쪽 혼주 분이 귀띔을 해주시더라고요. 양가 어른들을 모시는 과정에서 제가 준비해야 할 복장, 메이크업, 숙소, 그리고 멀리서 오시는 어른들을 위한 차량 문제까지.

결혼식은 제 생각보다 많은 이해관계로 둘러 쌓여있는 거였다는 걸 그제서야 알게 됐어요. 그래서 결혼식 며칠 전에야 부랴부랴 업체들을 알아보느라 정말 많은 시간을 썼죠. 부모님이 계신 배우자와 결혼하는 친구들의 경우에는 어른들을 대하는 예우뿐만 아니라 혼주석에 세울 사람에 대한 고민, 혼수, 결혼식 하객 등 많은 고민을 하더라고요. 공통되는 문제인데, 결혼 또한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어요.

Q. 진이씨에게 결혼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허진이: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가 크게 다가와요. 고민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할 때, 문제가 생겨서 해결해야 할 때 이제는 혼자 고민하지 않아요. 내 일처럼 마음을 써주는 든든한 누군가가 함께 있에 걱정이 없어요. 오히려 걱정이 된 다기 보다, 빨리 이 문제를 남편과 얘기를 해봐야겠다는 희망적인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가족이 생기면서는 이제 함께하는 울타리가 생겼다는 기분이 들어요.

Q. 결혼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이 있을까요?

허진이: 2년 전부터 후배 보호아동을 돕는 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운이 좋게 청와대에 초청 받은 적이 있어요. 그 당시에 김정숙 여사님과 만찬을 하면서 보호종료아동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 대화를 나눴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같은 시설 선후배로 시작된 인연으로 곧 결혼까지 앞두고 있다는 얘기를 하게 됐는데 김정숙 여사님이 기억해주셨다가 결혼식에 화환도 보내주셨어요.

운이 좋게도 그 이후로 청와대에 2번이나 더 초청받아 남편과 다녀오게 됐어요. 시설 퇴소 가정으로 결실을 맺은 부부라고 여사님이 기억해주셨고,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왔던 기억이 있어요. 자립과정이 처음에는 낯설고, 외롭고, 힘들었는데 그 시기를 잘 이겨내고 결실을 맺어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 거 같아서 기억에 남는 일인 것 같아요. 

신선한 시선. 열여덟 어른 인터뷰 후 당사자로서 느낀 생각을 공유합니다.

보육원 생활 속 많은 통제와 규율에 신물이 났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 하게 됐고, 성인이 된 나는 원 없이 해방감을 맛봤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나이 20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다.

억눌려 있던 욕망이 꿈틀거릴 나이에 자살을 선택해야만 하는 친구들이 있다. 19년 동안 타인 도움을 받으며 삶을 결정하던 아이들이 하루아침에 모든 선택을 혼자 해야 했기에. 자유 뒤에 오는 책임들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냉정하고 가혹하다.

누군가 그들의 얘기를 들어줄 수 있었다면, 그들은 지금 아마도 평범한 어른으로 자신의 가정을 꾸리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인터뷰를 마친 오늘 유난히 더 가슴 시린 이유는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의 뒷모습을 알아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인터뷰 도중 진이씨가 “이게 우리의 삶이에요. 우리는 이런 삶을 가지고 있어요.”라고 말해주던 것처럼.

 from.신선

글 ㅣ 사진 신선 (열여덟 어른 캠페인 캠페이너) 

댓글 2

  1. 이초롱

    여기 가입할려면 경로가 어떻게 되요??

    • 아름다운재단 공식블로그

      안녕하세요 이초롱님. 아름다운재단입니다:) 혹시 가입을 원하시는 채널이 어떤 곳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실지요?

댓글 정책보기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