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을 통해 전남녹색연합은 지난 40여년간 지속되어온 국가산단과 광양제철소 주변 지역의 환경변하와 지역사회 변화를 살펴보고자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 주민 대상 생애조사 인터뷰를 진행하고 구술조사 보고서를 제작했습니다. |
여수시 묘도동을 아시나요?
여수시 묘도동은 광양만 내에 있는 가장 큰 섬이었으 2012년 5월 12일 이순신대교가 완성 및 개통되면서 연륙도가 되었다. 묘도동으로 불린 것은 1986년 1월 여천군이 여수시로 승격하면서였다. 1949년에는 여천군 삼일면 묘도리로, 1980년에는 여천군 삼일읍 묘도리로로 변경되었고, 1998년 4월 1일 삼여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여수시의 묘도동이 되었다(여수시사편찬위원회, 2010: 72). 묘도동은 서쪽에는 봉화산(246m)이, 중앙부에는 계림산, 그리고 동쪽에는 유두산(130m)이 있으며, 산자락과 해안가에 5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가장 큰 마을은 창촌으로, 묘도동 거주인의 약 절반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이곳에 주민센터가 있다. 다음으로 큰 마을은 읍동(혹은 묘읍)인데, 이곳에는 보건소가 있다. 이어서 온동, 광양포, 도독으로 마을의 규모가 작아진다.
묘도동은 장이 서지 않았다. 장이 서지 않았다는 얘기는 장꾼들이 들어오기 어렵다는 것이며, 이윤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묘도동에는 상가가 드물었다. 그래서 묘도동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배를 타고 여수로 가서 구매했다. 따라서 여객선이 운행하는 포구가 중요했는데, 당연히 중심은 인구가 많고 여수와 인접한 곳인 창촌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상가들도 대부분이 창촌에 있다. 한때는 새마을판매점이 마을마다 들어섰으나, 도독은 폐점했고, 창촌, 읍동, 온동, 광양포는 어렵사리 운영되고 있다. 이순신대교가 개통한 뒤에는 그나마 버티던 상권이 거의 붕괴 된 상태가 되었다.
묘도동에 학교가 설립 인가된 시점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5월 12일이었다. 처음 명칭은 중흥공립국민학교 묘도간이학교였는데, 1944년 5월 16일 묘도국민학교로 승격되었다. 2011년 2월 1일에 중흥초등학교 묘도분교장으로 격하되었고, 2012년 3월 1일 상암초등학교로 편입되어 현재는 상암초등학교 묘도분교이다. 1970년 3월 19일에는 묘도초등학교 온동분교장이 개교했는데, 1995년 3월 1일 통합 폐교했다. 그리고 묘도동 읍동에 중학교가 운영된 시기가 있었다. 1982년 1월 30일 삼일중학교 묘도분교장으로 설립 인가되어 4월 1일 개교했는데, 2010년 2월에 학생 모집이 어려워 폐교했다. 묘도동에 여수시 우체국 묘도분국이 설치된 시점은 1979년 12월 5일이었다(김계유, 1988: 558). 전기가 처음 가설된 시점은 1980년 2월 10일이었다(김계유, 1988: 392). 상수도가 개설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이처럼 여수시 전반과 견주어보면, 이른바 생활편의 시설의 도입이 상당히 늦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바다 건너에서 밤낮으로 불을 밝히며 가동되는 여천공단(여수국가산단)이 새로운 세상으로 보였을 것이고, 희망의 등불로 여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수국가산단과 어촌마을
묘도동의 마을의 위치에 따라 인접한 지역과 전경 그리고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이에 대한 설명은 과거와 현재가 혼재되어 있기는 하지만, 각 마을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건이다. 이순신대교가 개통되기 이전에 묘도동 주민들은 마을의 위치에 따라 바다를 건너 왕래하는 지역이 달랐으나, 주된 곳은 여수시 삼일면이었다. 묘도동의 토지는 해양엑스포 개최 신청을 전후하여 상당 부분이 외지인에게 판매되었으며, 지가가 크게 올랐다. 그 이후에는 매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창촌은 여수국가산단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고, 다른 마을에 비해 여수시와 결합과 연계성이 높았다. 그래서 여수국가산단의 기반을 다질 때 노동자로 일한 사람들이 있었고,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읍동은 섬의 중앙에 위치하여 여수국가산단과 광양제철소 등 산업시설의 전경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읍동은 양식업이나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일부 있기는 했으나, 다른 마을에 비하면 매우 적었다. 읍동의 어업인은 광양항 바닷길을 확보하기 위해 퍼 올린 펄로 매립하기 이전 연안과 광양만에서 생계 활동을 했다. 묘도동에서는 당산제를 지냈던 마을이 읍동과 온동인데(나경수 외 2008), 이제는 읍동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읍동이 어업보다 농업에 종사하거나 의존하는 사람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의 결속력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온동은 바다 건너 광양제철소가 보이는 마을이다. 즉, 온동마을은 묘도에서 광양제철소와 가장 가까이에 있다. 온동마을은 어업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어업이 절대다수를 이루었다. 즉, 묘도동에서 어업의 비중이 가장 높은 마을이며, 광양항이 국제항으로 지정되면서 배를 활용한 어업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영향을 크게 받은 마을이다. 광양제철소에 인접해 있다 보니 이 일대에서 발생하는 각종 환경 문제(석탄 분진, 냄새, 소음, 너울성 파도, 기름 유출, 유독물질 해양 방출, 폭발 사고, 해충 등)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었으며, 이와 관련한 주민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마을이었다.
도독은 가장 작은 마을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조명연합군이 이곳에 주둔했던 것이 마을명의 유래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상당 부분은 어업에 종사했으며, 굴, 바지락, 꼬막, 피조개, 멸치, 장어, 개불 등을 채취하여 생활했다. 그렇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는 어업 활동이 거의 중단된 상태이고, 양식업이 일부 이루어지기는 하나 소득은 형편이 없다. 도독은 광양제철소의 영향도 받지만, 광양 컨테이너부두와 가장 가까이 있다. 이곳의 가장 큰 고충은 대형 선박이 운행하면서 일으킨 너울성 파도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바닷물의 침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두를 밝히는 불빛이었다. 도독은 인구가 시나브로 줄어들고 있으며, 마을 주민의 자치 모임이 대부분 해체된 상태였다.
어촌 마을 주민의 삶을 찾아서
마을 조사는 검토를 걸쳐 대상자를 확정하고 심층 면담을 진행하는 방법을 택했다. 조사 대상자는 개인에 관한 내용보다는 마을에 대한 정보와 역사 그리고 제반 상황을 충실하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들로 물색했다. 조사 대상자를 선정하고 확정 및 면담 허락을 받기까지는 매우 어려웠고, 지난했다. 여기에는 마을 내외의 갈등과 조사에 대한 경계심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심층 면담은 2023년 7월 28일과 29일에 진행되었다. 이때는 날씨가 매우 무더워 면담하기에 적절하지 않았으나, 여러 이유로 인해 불가피했다. 면담은 개인별로 진행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그렇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집단으로 면담이 이루어졌다. 면담 대상자의 일부는 개인 면담에 대해 상당한 부담감을 표시했다. 혹여 자신의 발언이 부정적으로 사용되거나, 지역 사회의 뜨거운 쟁점에서 활용될 수 있다는 의식이 깊이 내재해 있음을 보여주었다. 심층 면담은 대부분 공공장소에서 이루어졌으나, 자택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심층 면담의 장소가 면담 내용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다수가 참여한 집단면담의 경우에는 직간접으로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고, 어쩌면 기초적인 조사의 성격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으나, 조사연구의 방향과 방법은 적절하고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즉, 특정한 주제와 사안에 집중해서 조사하기보다는 지역조사 또는 마을 조사라는 문제의식과 공간 및 장소에 유념해서 접근한다는 계획은 타당하고 효과적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조사연구는 지역조사를 통해 묘도동 주민들의 삶과 이해관계 그리고 인지적 요소와 쟁점에 관해 상당한 차이가 병존하고 있으며 이것이 상충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들은 작금에 묘도동에서 부상한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통찰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가는 방향과 방법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2023년의 조사연구는 매우 힘겹게 이루어졌다. 조사 일정과 비용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조사연구의 방향과 실행 주제 그리고 마을 및 자료 수집 대상자와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난항이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에서 보여지는 외부인에 대한 경계와 터부시도 있지만,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각종 조사연구 결과와 후속 조치에 대한 불신,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조사연구는 성과가 없지는 않으나, 묘도동에 관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연구의 결과를 일반화하기에는 정보와 자료가 부족한 상태이다. 우선 창촌마을에 대해서는 다면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조사가 진행되지 못했다. 창촌마을 거주민이 묘도동 인구의 절반 정도라는 점에서 보면, 지역조사의 윤곽이 아직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미완의 과제는 향후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마을 조사는 단기간에 수행하기 어려우며 장기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그 이유는 외부인으로서 주민과 친밀도를 높여 자연스럽게 마을에 스며들어야만 심층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조사를 시작으로 몇 년에 걸쳐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그 기록이 담긴 출판물을 세상에 내놓기를 바래본다.
글, 사진 | 전남녹색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