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전화가 온다. ‘전진한씨 계세요’ 뭔가 불쾌한 느낌을 가진 기분 나쁜 음성이다.
정보공개청구를 한 공공기관 담당자였다. 담당자는 다짜고짜 왜 이런 것을 청구 하냐며 부하를 치밀게 한다. 수천 번의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마다 짜증이 난다. 알고 싶어서 청구했다는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반복해야 하나?
친절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궁금해서 청구했다고 쏘아붙였다. 그러다가 날카로운 말들이 서로에게 오고갔다. 나는 공개하라고 열을 올리고, 저쪽에서는 비공개해야 한다고 말을 던지고 있다.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집어 던졌다. 내가 부하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누라가 나타나 옆에서 흔들어 깨운다.
그렇다. 꿈이었다.
현실도 모자라 이제 꿈에서도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싸움을 한다. 흥분 된 상태로 잠이 들고, 편히 쉬지 못하고 있다. 활동가 11년의 세월이 낳은 직업병인 것이다.
수많은 활동가들은 스스로 대안적 직업을 찾아 시민활동가가 되었지만 엄청난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다. 그 누구도 그 스트레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상처를 숨기고, 참고 견딜 뿐이다.
어느 날 아름다운재단에서 ‘비움과 채움’ (활동가 재충전)이라는 프로그램 공지를 했다.
수년간 각자 분야에서 활동을 했던 활동가들을 쉬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교육과 연수가 아닌 활동가들을 쉬게 만드는 프로그램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프로그램 장소는 일본에서도 가장 북쪽에 있는 훗카이도, 거기서도 가장 북쪽인 시레토코이다. 그 공지를 보는 순간 눈물이 글썽했다. 우리 같은 활동가들에게 이렇게 신경 써 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게 4박 5일 동안 꿈같은 시간을 선물 받았다. 각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 5명과 공정여행 전문회사인 트래블러스 맵의 직원 한명이 여행안내를 했다. 모두들 각자의 분야에서 적게는 5년, 많게는 10년 이상 열정을 쏟아 부었던 활동가들이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 눈빛을 보는 순간 비슷한 경험과, 스트레스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순수비행시간만 4시간, 차로 3시간, 대기시간 까지 총 9시간이 넘는 여행이었다. 오전 8시에 출발해 저녁 6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일본 전통 료칸이었고 주위는 온통 눈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이곳에서는 눈이 원채 많아 1미터를 넘지 않으면 눈도 아니었다. 시레토코의 일년 중 절반은 눈으로 쌓여있다.
짐을 풀고 현지 안내인의 안내에 따라 칠흙 같은 어둠속에서 스노우 슈쥬를 신고 숲속을 등반했다. 신기하게도 아무런 불빛도 없는데 눈에 비치는 별 빛으로 가는 길들이 보였다. 좀 더 걸어 들어가자 정말 평생에 볼 수 없었던 별들의 천국을 볼 수 있었다. 하늘에는 수천 아닌 수만의 별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고, 우리는 눈밭에 누워 그 장면을 즐겼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으니 유성이 곳곳에 지나갔으며 우리는 소원을 빌었다.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이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현지 안내인은 특수 레이져 빔을 가지고 하늘을 피피티 삼아 별자리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1미터 높이가 넘는 눈길은 폭신했고, 바람도 시원했다. 하지만 이곳도 일 년 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파 여파로 많은 오염된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인간의 탐욕이 만든 쓰레기로 오염시켜 놓았던 것이다. 분노를 넘어 슬픔이 밀려왔다.
첫날 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인의 기백을 보여야 할 때이다. 모두들 피곤 할 만도 한데, 료칸 숙소에서 캔 맥주를 사들고 밤이 깊어 가는지 모르고 얘기했다. 작은 방에 모여 사회적 현실, 가정문제, 꿈, 인생 등을 얘기하며 서로 공감하고 또 공감했다.
둘째 날은 여행의 백미였다. 아모르 강에서 내려오는 유빙을 체험할 수 있는 날이었고, 각종 천연기념물인 참수리 독수리와 사슴 등을 관찰하는 날이었다. 가장 기대가 큰 것은 특수 장비를 착용한 채 유빙 속으로 들어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우선 지역 곳곳을 다니며 각종 동물을 관찰하러 갔다. 망원경으로 본 참수리 독수리 및 사슴등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 속에서 양쪽 날개 길이 2미터 넘는 참수리 독수리의 유유한 자태를 망원경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평생 해보지 못할 경험이었다. 심지어 10마리 넘게 한 곳에서 쉬고 있었고, 사슴 등은 일반 길거리 등에서도 수도 없이 관찰 할 수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이 지역에 수만 마리의 사슴 등이 나무껍질을 갉아 먹어 나무가 죽어가는 일들도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사슴과 나무의 보호 속에서 고민이 깊어가고 있었다.
오후에는 유빙워크 시간이었다. 유빙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빙하다. 아침에는 마을 근처까지 왔다가 시간이 지나면 먼 바다 까지 밀려가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마을 근처까지 밀려들어와 있었다. 특수 장비를 입고 유빙 위를 걷기도 하고, 심지어 유빙사이 벌어져 있는 수심 수십 미터 바다 사이로 몸을 던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공포가 밀려왔지만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몸은 떠올랐고, 슬러쉬와 같은 얼음조각들이 몸을 마사지 해주고 있었다. 큰 유빙에 같이 올라 발을 굴렀고, 유빙은 거대한 몸을 세우며 뒤집어 지고 있었다. 모두 30-40대였지만 아이들 같이 즐거워했다. 얼어 있는 바다 속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지 몰랐다.
셋째 날은 시레토코를 지키기 위한 100평방미터 운동을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원래 사유지였던 땅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주민들의 재산권과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에서 100평방미터운동이 시작되었다. 국립공원이 되면서 각종 이권사업, 골프장등이 건설되어 파괴되는 것을 우려해 주민들에 의해 땅을 구입하는 운동이 벌어진 곳이다. 1977년에 이 운동을 시작해 2010년에 완료되었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약 5만 명이 참가하여 5억 2249만 6천엔을 모금, 447.56?의 땅을 사서 잘 보존하면서 자연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계양산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인천녹색연합 장정구 사무처장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인천에 있는 계양산도 각종 개발사업과 골프장 건설 계획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인천녹색연합은 이에 대응하여 시민들이 계양산 한 평 사기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정구 처장은 본인 딸들의 이름으로 시레토코 한 평을 구입하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이운동의 주체가 샤리쵸라는 지자체라는 것이다. 그렇게 구입한 땅의 소유도 샤리쵸로 되어 있고 이 지자체가 시레토코 국립공원을 잘 보존하기 위한 노력 하고 있다. 우리나라 지자체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
자유 시간에는 시레토코 시민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갈하게 꾸며져 있는 마을 곳곳에는 보는 사람마다 우리를 반겨 주었다. 특히 초등학교를 방문해보았는데, 마침 하교 길에 있는 초등학생들이 우리에게 중국어, 베트남, 한국어 등으로 안녕을 구사하면서 반겨주었다. 작은 우체국에 들어가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고, 작은 상점에 들어가서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싼 사케를 구입해 보기도 했다.
넷째 날은 정든 시레토코를 떠났다. 대신 쇄빙선을 타고 멀리 나가 있는 유빙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바다에 수많은 얼음이 떠 있는 장면을 배에서 관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절경이었고, 마음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었다. 이후에는 무한도전 촬영으로 유명해진 아바시리 호수에서 빙어 낚시를 해보기도 했다. 한국인의 기지로 빙어를 잡자말자 먹으려고 했으나 주체 측에서 놀란 토끼 눈으로 디스토마 등의 위험으로 만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뒤에 튀김으로 먹을 수 있었다. 이 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호텔이었었다. 이분은 유학중에 일본인 학생을 만났고, 결혼 후 이곳에서 정착 한 후 호텔을 경영했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이 도착하자 숙소와 음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주었고 나갈 때는 태극기를 흔들며 마중을 하기도 했다. 훗카이도 여행을 가는 여행자들은 이 호텔을 거치면 이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이렇게 아쉬운 4박 5일 동안의 여행은 마무리 되었다. 참가자 모두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전 몸은 일에 서서히 지쳐갔고, 별다른 쉼을 받지 못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보는 재미, 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밤이 새도록 활동가들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그 시간만큼은 집에 갈 걱정도, 담날에 출근할 걱정도 없었다. 무엇보다 본인의 일에서 해방 될 수 있었고,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뒤돌아 볼 수 있었다. 서서히 서로를 치유하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필자도 정보공개센터를 창립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3년 6개월을 달려왔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반성과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채우기만 하면 넘치기만 할 뿐 새로운 물을 받을 수 없다. 이 프로그램의 이름이 비움과 채움이라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시간을 빌어 이런 기회를 준 아름다운재단에 감사하고 싶다. 이런 기회를 바탕 삼아, 다시 투명한 사회를 위해 열심히 활동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런 기회를 수많은 활동가들이 경험했으면 한다. 그분들의 활동에 우리는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혜택을 보고 있으며, 이런 여행이 우리에게 더 큰 혜택을 갖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끝)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전진한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