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한옥 담장이 붉은 장미로 물든 5월. 여느 서울의 풍경과 다른 아늑함. 그것이 아름다운재단에 처음 입사하게 되었을 때의 느낌인거 같습니다. 기부자 지원 단위에서 일하게 되면서 기부자님들의 전화 문의를 받거나 연락을 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걸려오는 전화가 아닌 처음으로 제가 먼저 전화를 걸게 된 분이 바로 김광부 기부자님이셨습니다. 현충일을 앞두고 인터뷰가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한지 보름쯤 지났을 때인가. 아직 재단도 어색하고 기부자님도 어색하던 그 시기. 그 떨림이란. 근데 기부자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떨림이 싹 사라지더군요. 마치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음성을 듣는 것 같은 푸근함. 따뜻함. 기부자님의 사연도 사연이지만 그 느낌에 ‘수박 한 통 사서 뵈러 가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국군의 날을 앞두고 기부자님을 뵈러 갈 수 있었습니다.
김광부 기부자님의 긴 인생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못내 짧았던 1박 2일 전남 고흥의 여정.
아들, 그 못 다한 사랑
현충일, 국군의 날. 김광부 기부자님(전남 고흥, 72세)은 이런 날과 관련이 깊습니다. 그건 김광부 기부자님이 기부하게 된 사연 때문입니다. 김광부 기부자님은 군대에서 사망한 자녀를 기리고자 아름다운재단에 자녀의 이름으로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신문 인터뷰에도 몇 번 나가곤 했습니다. 저희가 방문한 이유는 사실 인터뷰라는 목적보다는 올해부터 시작하는 장기기부자 감사 차원에서 방문한 것이었고, 기왕이면 아드님이 생각날만한 기간에 가서 감사를 전하고 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자녀분 이야기를 여쭙지는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픈 기억은 아픈 기억이니까요. 하지만 기부자님에게 재단은 아들과 떼어놓을 수 없는 기억인지라 먼저 말씀을 꺼내셨습니다.
“첫째 아들이야.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도 얼마 못하고 자라서 자식들만은 공부를 다 시키려고 했지. 아들 녀석은 공부도 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어. 근데 군대에 가서 권투경기를 하다가 그만 머리를 잘못 맞아서 뇌사가 되었지.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기계로 억지로 숨을 붙여놓고 있더구만….
때린 사람도 일부러 그랬겠나. 아들 녀석 명이 짧았던 거지. 탄원서를 부탁해서 탄원서를 써주면서 ‘네가 우리 아들 몫까지 해다오’ 했는데, 그 뒤로 한 번도 안 와. 우리 마누라는 생각날 때마다 서운해 하는데 나는 그냥 잊어.”
기부자님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저도, 같이 간 한나 팀장도 눈물을 닦아냈습니다. 1987년. 벌써 25년이 넘게 지났어도 아픈 기억은 아픈 기억입니다.
“우리 아들이 살았다면, 이 보다 더 큰 일을 했을 거야. 그래서 아들 이름으로 들어오는 국가유공자 연금의 10%를 기부하기 시작했지. 사실 이런 걸 밝히고 싶지는 않았는데, 죽은 사람 이름으로는 입금을 할 수가 없어서 알려지게 됐어.”
아담한 거실 한 쪽 벽면에 기부자님과 자녀들이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진에 故 김유정씨는 없습니다. 장성한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에는 미처 담지 못한 사랑스런 첫째 아들. 故 김유정씨는 아름다운재단에서 기부자로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아름다움을 향한 끌림, 인생을 담은 나눔
김광부 기부자님은 7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셨고, 시원시원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성격이셨습니다. 이야기하기도 좋아하고, 책을 읽기도 좋아하는 기부자님은 시골집의 아담한 담벼락을 비추는 따뜻하고 강렬한 태양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서울에서 고흥까지 딸 또래의 간사 두 명이 6시간을 달려온 길. 물어물어 올라오는 저희를 맞으러 나와서 환희 웃으시며 두 손을 잡는 그 모습에서 ‘아, 전화 느낌 그대로야. 오길 잘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오게 된 전남 고흥. 고흥은 서울에서 참, 멀었습니다. 미디어가 발달해서 서울에서 남극도 소식이 전해지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지역에도 여러 단체들이 있는데 어떻게 그 많은 단체들 가운데서 서울 한 구석에 있는 재단을 알게 되었을까? 재단에 기부하게 되셨을까? 궁금했습니다. 게다가 기부자님이 기부를 시작한 2002년은 이제 막 재단이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재단은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오는 내내 사실 제일 궁금한 것 중 하나였습니다. 성격 급한 박 간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물어보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준비해온 선물도 미처 꺼내지 못하고 이야기가 시작 돼버렸습니다.
“가난한 집에 외아들로 태어났어. 젊어서는 불교에 귀의하려고 했었지. 외아들이 스님이 된다니 부모님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어. 난 말을 뱉고 한다면 하는 성격이거든. 근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거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 이건 아니다.’ 싶었지. ‘이번 생에서는 아니겠구나.’ 그러면서 속세로 돌아왔지.
난 공부를 얼마 못했어. 초등학교만 나왔지. 그 시절 시골은 다 그래. 근데 책을 좋아했지. 동네 도서관에 있는 책은 내가 다 읽고, 여기저기서 책을 가져와서 도서관을 채우기도 했어. 난 외로움도 잘 안 타. 책이 있으니까. 책하고 벗을 하고 있으면 참 즐겁지.”
실제로 기부자님 집에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책이었습니다. 그 날도 저희가 오기 전까지 책을 읽고 계셨는지 서가 한 곳에는 책 위에 안경이 그대로 놓여있었습니다. 재단과의 인연을 풀어내면서 먼저 기부자님은 자신의 긴 인생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짧은 전화에서도 느껴지던 기부자님에게서 우러나오는 깊은 향기는 삶의 역경을 곳곳하게 다져온 인생의 향기였습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었어. 근데 어느 날 펜을 부러뜨렸어. 글이 아니라 삶으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해서지. 나눔에 대해서는 늘 생각하고 있었어. 지금도 재단 말고 다른 곳도 하고 있고…
사람이란 게 그래. 말하는 대로 살고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지. 말의 힘. 긍정의 힘. 나는 그걸 믿네. 그때 ‘아름다운 사람 모임의 집 좋은생각 나눔의 집’ 이라는 글귀를 적어 명함을 만들었어. 내 삶에 대한 가치를 적은 말이었지. 근데 며칠 뒤에 아름다운재단이 방송에 나오는 거야. 아마도 그 말의 힘에 이끌렸던 것 같아. 재단의 투명성을 믿어서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거지.”
‘아름다운’은 단순히 포장이 아닌 재단의 가치를 풀어낸 단어입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가치. 그 가치가 저희를 하나로 만들고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넉넉하지는 않아. 허리를 다치면서 농사도 안 짓고. 요즘은 주변 집들 품앗이 하고 있지. 하지만 꼭 생활이 넉넉하다고 다 나누는 건 아닌 것 같아. 사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나누지 않나. 그 마음을 아니까.”
그 마음을 아니까. 기부자님의 마지막 말이 여운을 남겼습니다.
그 마음을 아니까.
모든 시작은 어쩌면 그 마음을 아는 것 아닐까요.
삶으로 시를 쓰고 싶다네
오전 8:55 용산에서 광주행 KTX를 탔습니다. 12시 경 광주에 내려서 점심 식사를 하고 1시 경 다시 광주터미널에서 고흥행 버스를 탔습니다. 고흥에 도착하니 3시 30분 경. 택시를 타고 기부자님 댁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4시.
“고흥 처음 와봤지? 다음에는 좀 여유 있게 와. 이 근처에 좋은 곳이 많아. 여기서 조금 가면 나로호 발사한 곳이 있어. 팔영산 국립공원도 있지. 참. 영천이라고 아나? 그냥 샘이 아니라 신령한 기운이 있다고 영천이야. 온통 바위 밖에 없는데 가뭄에도 물이 콸콸 나오지. 나는 매일 아침 1시간씩 영천 샘물을 뜨러 가.”
고흥에서 나고 자란 김광부 기부자님은 고흥 이곳저곳을 마치 눈으로 보듯 설명해주셨습니다. 실제로 식사를 할 때 주셨던 영천샘물은 정말 달고 맛있었습니다.
“영천 가는 숲길을 걸어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올라와. 누군가의 아픈 기억, 누군가의 슬픈 기억. 하지만 그런 건 그냥 버려두지. 그리고 누군가의 웃음, 기쁨, 즐거움. 그 생각들을 마음에 담아와. 그런 것들만 간직하는 거지.”
몇 년 전 허리를 크게 다치셨다는 김광부 기부자님은 그 후로도 매일 아침 1시간씩 영천까지 오가며 1.5리터짜리 물통 2개를 꽉꽉 채워서 들고 오실 정도로 활력 있게 생활하고 계십니다. 많은 나쁜 것들이 있으나 좋은 것을 알아보는 안목. 많은 어두운 일이 있으나 좋은 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마음. 그 덕분에 병마는 다리를 좀 불편할 게 할 수 있어도 그 삶에 어두운 기색을 남기지는 못한 듯 했습니다.
기부자님 내외는 자고 가라고 하셨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기는 죄송스러워서 저희는 한사코 차려주시는 저녁만 먹고 6시경 일어났습니다. 오가는 12시간의 길.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2시간의 만남. 그러기에는 너무 마음에 들었던 고흥의 가을 풍경. 기부자님도 저희도 참 못내 아쉬웠던 것 같습니다.
기부자님 댁 근처에서 택시를 잡기는 어려울 거 같아서 오는 길에 명함을 받아왔는데, 기부자님은 아는 분이 계시다며 연락해서 택시를 불러주셨습니다. 서울에서 나타난 예상치 못한 낯선 손님들의 정체를 택시 기사님은 너무나 궁금해하셨고, 저희는 김광부 기부자님이 기부하고 계신 아름다운재단의 간사들이라고 신분을 밝혔습니다. 저희의 존재를 알아차린 기사님은 그제야 반색을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저분들이 넉넉한 분들은 아니야. 그래도 저렇게 나누며 살아. 참 본받을 만한 분들이지.”
김광부 기부자님은 삶으로 시를 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바람은 이미 현실이 되어 삶으로 그 향기가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먹으라고 주신 백가지 약초가 발효되었다는 효소처럼 모든 감정과 생각이 한 자 남짓한 가슴에서 70여 년 간 한데 엉켜 만들어낸 따뜻하고 넓고 깊은 향기. 누가 감히 그 향기를 안다고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그저 제법 인생을 이야기할만한 30대 중반에 기부자님을 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서울촌뜨기 박 간사는 멀미를 합니다. 원래 체질이 그러해서 저는 익숙한데 김광부 기부자님께서 마음을 쓰시니 어찌나 죄송하던지요. 그런 저희를 염려하시며 몸에 좋은 매실액과 백가지 식물을 발효했다는 효소를 두 통 담아주셨습니다. 게다가 직접 말린 새빨간 고추까지.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계시던 시골에 다녀올 때 바로 그 느낌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보다 더 많아진 풍성해진 가방. 기부자님이라고 생각하면 죄송한데 그냥 시골에 계시는 아버님이 주시는 마음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아왔습니다. 다음에는 남자친구랑 함께 오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다음에 뵈요, 울 멋쟁이 김광부 기부자님♥
사진. 신한나(아름다운재단 홍보팀 팀장)
글. 박해정(아름다운재단 캠페인/회원개발팀 간사)
만석
느낌 아니까~ 눈물난다. ㅠㅜ
아란이모
아. 기부자님도 글도 사진도 너무 따뜻따뜻. 마음까지 촉촉해지는 가을비 같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식후졸음이 사라졌어
점심후 졸음이 막 쏟아지는데…
이 글을 읽으니 잠이 깨면서 활력이 생기네요.
남쪽 고흥에 사는 기부자의 따뜻한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오네요.
루나엄마
기부자님이 쓰시는 삶의 시가 많은 분들에게 감동을 주네요. 사람의 이야기가 가장 향기나고 아름다운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흥리
그 마음 아니까..
감동이
아… 눈물이 나네요. 그 마음이 전해집니다.
angela
이렇게 깊은 분이신줄 몰랐네요. 삶의 철학이 담긴 기부금이 더욱 특별하고 감사하게 느껴집니다.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기부자님께도 감사하지만 먼길 마다않고 직접 만나고 와 주신 두 분 간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창훈
마음에 너무 와닿네요..건강하시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