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은 많은 비영리 공익단체들이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기회의 문을 넓게 열어두고 1%가 100%가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다양한 공익활동을 지원합니다. ‘2023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에 참여한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의 활동을 전해드립니다. |
예술로 기억을 잇다
2021년, 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프로젝트 지원사업으로 한국전쟁 다크투어 가이드북을 펴냈다. 대구, 경산, 영천, 칠곡, 문경, 여수, 순천, 구례, 남원, 보성, 목포, 거창, 산청, 임실, 청주, 대전, 단양, 영동, 거제, 통영, 진주, 부산, 고성, 속초, 강릉, 홍천, 강화, 인천, 파주, 고양까지 전국 곳곳을 다녔다. 대부분의 현장은 외진 야산이나 들판에 있었고, 굳이 어렵게 길을 찾아가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안내판 하나만 있거나 그마저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전쟁 다크투어 가이드북 후기에 이런 말을 적었다. “허락되지 않은 기억을 듣기 위해 찾아간 곳들마다 방문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언제나 우리뿐이었다.” 2022년부터 2023년까지 두 차례 그 현장으로 사람들과 함께 ‘기억여행’(소위 다크투어라고 부르지만 조금 더 직관적으로 와닿게 하기 위해 기억여행이라고 이름 붙였다)을 다녀왔다. 기억의 현장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2022년에는 청주로, 2023년에는 태안으로 떠났다. 2022년 기억여행과 다른 점은 바로 장애인 접근성을 마련한 것이었다. 2022년에 방문한 장소들은 대부분 휠체어 이동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휠체어 이용자 한 분이 참가 의사를 밝히셨지만, 어쩔 수 없이 참여가 어렵다는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허락되지 않은’ 장소에 방문하는 데 누군가는 거기에 방문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장애인 접근성이 확보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첫 답사지가 바로 태안이었다. 강희권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태안유족회 이사님을 소개 받아 태안 지역의 여러 학살지를 답사했다. 6곳을 다녀왔는데, 그 중 4곳이 휠체어 접근이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답사에선 휠체어를 가져가 장소마다 휠체어 이동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를 확인했고, 거기에 더해 실제 전동휠체어 이용자를 초빙해 한 번 더 확인을 하기도 했다. 턱이 있는지, 바닥마감은 어떤지 등 통행을 위한 점뿐 아니라 장애인 화장실 유무, 전동휠체어 출입가능한 식당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했다. 예술계에는 이와 같은 접근성 지침들이 많이 마련되어 있기에 함께 기억여행을 준비한 예술인들을 통해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태안은 바다와 인접해 있기에 정말 말 그대로 ‘여행’(대부분의 민간인 학살지는 여행보다는 탐험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하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외진 곳에 있는 민간인 학살지를 방문하면 그 장소성만으로도 여러 기억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한편, 학살지가 일상적으로 접근이 쉬운 장소에 있는 경우에는 괴리감을 느낄 수 있다. 태안에서는 특히 관광지로 유명한 만리포가 그런 장소였다. 물론 태안에서도 외진 곳에 있는 학살지가 있었기에 배제된 기억을 품고 있는 ‘장소성’과 ‘괴리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태안에서 유일하게 국민보도연맹 학살이 있었던 사기실재, 사기실재(현 소성정)에서 학살당한 피해자 시신을 수습해놓았고 근처에 보도연맹 사무실 터가 있는 태안면사무소(현 태안읍행정복지센터), 부역혐의 학살이 있었던 질목과 만리포(두 곳 다 해안가)를 방문했다. 총 2회차로 진행한 이번 여행의 주제는 ‘흐르는 바람: 불다, 머물다, 전하다’였다. 바람은 중의적이다. 소망으로서의 바람, 그리고 부는 바람. 학살당한 사람들이 죽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품고 있었던 바람, 그리고 그 유족들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고초를 겪어오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았던 바람에 직접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불어오고 불어가는 바람을 통해 그 간절한 바람을 전하고 싶었다.
처음 방문한 장소는 유일하게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세운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사기실재였다. 사기실재에서 우리는 색종이로 작은 바람풍선을 불어 서로에게 달아주었다. 참여자들은 여행 내내 작은 바람이 담긴 풍선을 달고 다녔다.
두 번째 장소인 태안면사무소 근처에는 부역혐의자를 가뒀던 방앗간 창고 터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 남아 있던(이제는 사라진) 보도연맹 사무실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증언과 진실화해위원회 태안지역 조사보고서에서 가져온 키워드를 이용해 탁본을 떴다. 글씨가 새겨진 사물에 흰 종이를 대고 연필이나 색깔 막대로 살살 문지르면 키워드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세 번째 장소인 질목에서는 바닷가 절벽에서 학살이 있었다. 당시에 고요하고 적막한 산길을 올랐을 피해자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사물을 이용해 소란을 일으켰다. 그때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곳에서 고요히 생을 마감했지만, 아직까지 당신의 바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전하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장소인 만리포에서는 지금까지 방문한 장소에 대한 소감을 기록하고 서로 공유했다. 만리포는 예전에 사막과 같은 지형이었는데, 학살이 있었던 모래 언덕은 만리포 주차장이 되었다. 구자환 감독의 다큐 ‘태안’에는 만리포에서 차에서 내려 발을 디딘 그곳이 바로 학살지라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의 여러 활동들은 정말 작고 작은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함께 바람을 불고 바람이 있던 장소에서 머물고, 다시 각자가 감각한 바람을 서로에게 전했다.
기억여행에서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태안면사무소 근처에 예전의 형태를 보존한 보도연맹 사무실 건물이 남아 있었다. 1회차 때는 그곳에 방문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인 2회차에 방문했을 때 건물이 모두 헐려있었다. 2회차 참여자들 모두가 그나마 남아 있는 기억의 장소마저 언제나 사라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이미 많은 기억의 장소가 이미 사라져버렸다. 5.18에 대한 기억을 다루는 박솔뫼의 소설 『미래 산책 연습』에서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본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랐던 미래를 지금 여기에서 함께 바라고 또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과거 사람들이 가졌던 마음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분명 기억이고, 동시에 이 기억은 광주 사람들이 바라보는 미래를 향해 있다. 그렇게 기억은, 바람은 계속 사라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다.
한국전쟁 기억여행이 특별하다고 한다면 실제 그 장소에 방문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활동을 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전에 다녀왔던 여행지가 가끔씩 그리워지는 것처럼 기억여행의 장소를, 그 장소의 기억을, 그 기억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것만으로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방문하고 두고 온 풍경의 안부를 궁금해한다면 이 기억 역시 미래로 계속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글, 사진 :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