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수많은 마음을 되새기며 아름다운재단이 기부회원과 나눔, 지식을 공유하는 자리 ‘마음을 잇는, 나눔산책’. 올해는 ‘기본권의 확장, 그 너머를 바라보는 우리’라는 주제로 기부회원 행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2024년 마지막 나눔산책의 강연자는 김승섭 서울대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교수입니다. 강연에서 ‘한국 사회와 타인의 고통’을 전할 예정입니다. 김승섭 교수는 사회역학자로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건강 불평등, 재난 생존자들의 고통을 살피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섬세하고 탁월한 연구로 뜻깊은 반향을 불러일으켜 온 바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사회를 바꾸어 나가기 위한 지식의 가치와 중요성을 지지하며, 차별과 편견 너머 모두를 위한 변화에 동참하고 있는 아름다운재단의 기부회원들이 이번 나눔산책에 함께했습니다. |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김승섭 교수님 책을 열심히 읽어왔는데, 때마침 알림 문자를 보고 바로 신청했습니다.”
“강연 주제에 이끌려 오게 됐습니다.”
“평소에 남의 아픔을 잘 모르고 내 생각만 하고 사니까,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어요.”
가을이 깊어 가는 11월 7일 저녁. 정동1928 아트센터 컨퍼런스룸에는 김승섭 교수의 저서를 품에 지니고서 일찌감치 자리 잡고 앉은 기부회원들이 있었습니다. 참가 동기가 한결같이 가슴 뜨겁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정성껏 준비한 따끈따끈한 백설기처럼, 강연장이 벌써 훈훈합니다. 이번 강연은 온라인으로도 동시에 진행이 되었는데, 온오프라인을 합쳐 여든 여명의 기부회원들이 참가했습니다.
연단에 선 김승섭 교수는 “자신의 일상에서부터 바람직한 사회변화에 기여하고 있는 분들이 모인 곳에 작게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 강연을 준비했다”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가 타인을 보는 시선에 대한 함의를 알기 위해 먼저 사회역학의 데이터부터 두루 소개합니다.
“암묵적 편견이 소수자 집단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강력한지 검토한 여러 연구가 있는데, 일례로 예일대 아동연구소에서 나온 연구보고서가 있어요. 흑인들은 어릴 적부터 과도한 ‘사회적 평가 위협’에 시달리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연구입니다. 사실 우리도 ‘쟤가 뭔가 실수를 할 거야’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는 따가운 눈총이 얼마나 아픈지 잘 알잖아요. 그런 시선을 받고 계속 긴장하고 있으면 안 하던 실수도 하게 되고, 또 실수도 더 잘 발견됩니다.”
사회적 배제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더 가까이
김승섭 교수는 “우리는 스스로 합리적이며 아무도 차별해서는 안 되고 또 차별하지 않는다고 여기기 쉽지만, 지금 살아가는 사회와 그간의 역사에서 형성된 무의식적 수준의 태도와 믿음을 반영하여 타인을 판단할 수도 있다”고 찬찬히 설명합니다. 차별을 받거나 사회적으로 배제된 이들의 쓰라린 경험도 상세히 짚었습니다.
“‘거절은 아픈가?(Does Rejection Hurt?)’라는 논문에서 자기공명영상을 이용한 뇌 실험 결과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따돌림과 같은 배제를 겪을 때 놀랍게도, 신체에 물리적 폭행을 당할 때와 같은 뇌 부위가 활성화됩니다. 공동체에서 차별과 소외를 겪으면, 사람의 뇌는 아프다고 인식하는 것이지요. 그리스 고전에도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거나 친구를 잃었을 때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다는 표현이 나와 있는데요. 사회적 배제를 겪을 때 우리는 실제로 아픕니다.”
강연장에 앉은 기부회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하고 나지막이 호응하며 더욱 귀 기울입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아픔에 주목할 수 있다면
예리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김승섭 교수는 사회적으로 단절되고 고립에 놓인 이들에 관한 연구를 선구적으로 진행해왔습니다. 해고노동자, 산재 피해자, 재소자, 화장품 판매직 노동자, 소방공무원, HIV 감염인, 이주민, 트랜스젠더의 건강실태에 대한 분석, 또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천안함 사건 생존 장병, 세월호 참사 생존자 연구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 현장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를 밀도 있게 경청해왔습니다.
“생존자들은 ‘살아남은 게 아파요’, ‘살아서 미안합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비극적이며 힘든 장면이 자꾸 떠오르니까 더 힘들고, 또 힘드니까 무감각해지는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고통을 경시, 비하 당하기도 하지요. 이들이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통받는 건 단지 차별이나 재난 사건 때문만은 아닙니다. <타인의 고통>으로 널리 알려진 철학자 수잔 손택이 저서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환자들이 가장 깊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고통을 비하한다는 고통’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피해자들, 살아남은 사람들의 그 아픔에 더 주목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길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이들과 만나면서 “미래에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를, 나처럼 비참해지지 않길 바란다”는 간절하고도 중대한 소망을 들어왔다는 김승섭 교수.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도, 가정이나 직장 등에서 겪은 자신의 고통을 돌이켜보며 한국 사회와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고 숙고하는 기부회원들과 활발한 소통이 줄곧 이어졌습니다.
고통을 겪은 이들이 마음을 터놓고, 아픔에 대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우선 필요하며, 제도적·정책적 지원이나 제안과 더불어 사회적 공감이 든든한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근본적이고 추상적인 물음 대신, 구체적인 과제를 세우고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것도 사회적 설득을 위한 한 방법일 것입니다.
“차별과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사실상 간단치 않습니다. 완전히 편견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세계 어디에도 없고, 한 번도 차별하지 않은 존재도 없습니다.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모든 인간은 어떤 순간에 가해자가 될 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질문하고 끈을 놓지 않는 것. 질문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이겠지요.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이해를 포기하지 않는 길을 함께 찾아 나가길 바랍니다.”
모두를 위한 변화, 변화를 만드는 연결
어느새 올해 마지막 나눔산책이 끝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쉬움이 짙게 남지만, 기부회원들은 신중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강연이라는 감상을 입 모아 들려주었습니다.
한 참가자는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모두의 건강권을 찾으려 할 때, 오랜 시간 약자들과 직접 마주한 연구를 객관화해서 근거를 갖고 논의하는 부분에 무척 공감했다”면서 “정상성을 따지며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보다, 타인의 경험을 듣고 대화와 논의를 시작하는 게 진전을 위한 한 단계가 될 것 같다”라고 값진 소감을 들려주었습니다.
김승섭 교수도 “귀한 실천을 하고 계신 아름다운재단의 기부회원과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하다”고 인사해주었습니다.
귀갓길, 갑작스레 쌀쌀해진 밤 날씨로 좀 움츠러든 마음에 따스하고 환한 불이 켜집니다. 우리 사회 곳곳의 아픔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그 길에 기부회원들의 존재 덕분이겠지요. 더 좋은 사회를 향해 나아가달라는, 기부회원들의 소중한 기대와 바람에 아름다운재단은 꾸준히 응답해 나가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기부회원님, 참 고맙습니다.
글 | 조승미 작가
사진 | 김권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