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이 사자에 물렸습니다. 바로 뒷발을 들어서 사자 턱을 찼어요. 사자는 어떻게 될까요? 며칠 뒤에 죽습니다. 턱뼈가 부러져서 뭘 씹질 못하니까요. 우리도 강한 상대가 공격해 오더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 돼요.”
마음껏 훈련해도 땀이 마를 수 있을 정도로 선선해진 9월 어느날, 서울 종로구 보건소 지하 1층에서 자기방어훈련이 진행됐다. 아름다운재단 매니저 20명과 자기방어훈련 선생님 두 분이 모인 자리였다. 자기방어훈련은 단어 그대로 누군가로부터 신체적, 정서적 위협을 당했을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익히는 훈련이다. 굳어있던 몸과 마음에 용기가 꽉 들어찰 것만 같아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태권도 국가대표 출신인 고재경 강사를 보자마자 남다른 아우라를 느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누가 달려들어도 방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힘까지! 훈련이 진행될수록 선생님에게 반한 사람이 속출했으니 말 다했다. 훈련을 마치고 고재경(이하 재경), 백재희(이하 재희) 강사를 만나 대화를 나눠봤다.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만난 두 사람에게 먼저 재단 매니저들과의 훈련은 어땠는지 물었다.
“분위기가 조금 달라요. 재단 매니저들은 또래 여성들에 비해서 열정적인것 같아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적극적이에요.” (재경)
다른 이들과의 수업도 비슷한 분위기일거라 지레짐작하고 내뱉은 질문이었는데 의외의 평이 돌아왔다. 17년 간 자기방어훈련을 진행하면서 참여하는 여성들의 모습도 조금씩 달라져왔을 거라 생각했다.
“몸을 사용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운동선수들조차도 침해를 받았을 때 자신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부당하다고 느끼는 건 말해야 한다는 것부터 가르쳐드려요. 소리 지르거나 자세를 잡는 것도 어색해하니까요.
반면 폭력 피해자를 상담하는 분들과 수업했을 때는 (재단 매니저들처럼) 기운이 넘쳤는데요. ‘내 권리를 침해하면 이렇게 할 거야’라는 마인드 세팅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몸은 이렇게 하면 돼요’라고만 해도 쏙쏙 받아들이죠. 그나마 훈련을 진행하면서 달라졌다고 느껴진 게 있다면 ‘직장 생활 하는데 괜히 말해봐야 나만 손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조금씩 말하는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점이에요.” (재경)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멘탈이 가장 중요해요.”
맞다. 부당한 것에 저항하는 건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가만히 서 있는데 별안간 시비를 걸어올 때,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뒤에서 땅을 친 적이 많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고재희 강사는 훈련 초반 짧은 강의에서 ‘반평생 몸과 마음이 분리됐었다’고 말했었다. 누구도 덤비지 않을 것 같을 것 같은데 어떤 경험을 했던 걸까?
“신체적 능력은 좋았지만 물리적으로나 언어적인 침해를 당했을 때 하지 말라고 하거나 반격하지 못했어요. 대학생일 때 1교시 수업에 가려고 일찍 나온 날이면 늘 성추행범을 만났거든요. 20대니까 몸이 굉장히 날렵할 때인데도 마음같이 안되더라고요. ‘꽉 끼는 청바지 입고 다니면 안돼.’, ‘짧은 치마 입으면 안 돼’ 고등학교 3년 내내 이런 말을 듣고 자랐어요. 그러니 성추행을 당해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그래서 스스로 어떤 의식을 갖느냐에 따라서 몸도 달라진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재경)
자기방어훈련이 스포츠와 분명한 차이가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규칙 안에서 승리하는게 목표인 스포츠와 달리 자기방어훈련은 공격하겠다고 마음 먹은 상대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이다.
“스포츠는 규칙이 있죠. 반칙도 있고 심판도 있고요. 자기방어는 정해진 게 없어요. 살면서 내가 누구를 만날 지 어떻게 알겠어요?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예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자기방어는 스포츠와 달리 ‘저 사람한테 해코지를 당하지 않겠어’,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내지 않겠다’라는 의지가 더 필요해요.” (재경)
나를 지킬 수 있다면, 우리를 지킬 수 있다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훈련까지 함께 진행해야 하는만큼 자기방어훈련은 8주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신체훈련은 고재경 강사가 담당하고, 이론 강의는 백재희, 장준미 강사가 주로 담당한다. 세 사람이 뭉쳐 활동한다니 어쩐지 뒤에 든든한 언니들이 있는 느낌이 든다.
“자기방어훈련은 머리로도, 몸으로도 이해해야 해요. 그래서 스스로를 진단하는 게 먼저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일들을 당했는지도 떠올려봐야 해요.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봐야 하니까요. 근데 의외로 ‘지금까지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상적인 침해는 잘 떠올리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사례를 넣고 직접 낭독하고, 연습하는 과정도 진행합니다.” (재희)
2024년에는 아름다운재단 변화의물꼬 지원사업을 통해 중장년 여성들과 함께 자기방어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백재희 강사는 중장년 여성들에게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40대 넘어가면 세상 앞에 배포도 좀 생기거든요. 몰라서 못했던거지 알게 되면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어요.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이와 여성이 누군가에게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내 동생이에요, 내 딸이에요, 당신이 뭔데?” 이런 말이라도 외칠 수 있어요. 앞으로 이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재희)
반짝이는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를 가르치는건 애정없인 불가능하단 말이 있다. 모두의 몸과 마음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래서 가지고 있는 재능과 지식을 나누겠다는 의지에서 다정함이 느껴진 이유다.
“제 주변 여성들을 보면 나이를 막론하고 똑똑한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무슨 일을 해서 똑똑한 게 아니라 그냥 삶 자체가 지혜롭기도 하고 똘똘한 그런 느낌 있죠? 근데 본인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지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 운동과 자기 표현을 통해서 사회에도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면 정말로 많은 변화가 있지 않을까요?” (재경)
1시간 남짓한 인터뷰를 진행하며 멋진 언니들과 인생 상담을 나눈 기분이 들었다. 글을 읽으며 과거의 여러 일들이 떠오른다면, 발목을 붙잡는 기억이 있다면 마지막 조언에 귀기울여보자. 지금의 나를 도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존재는 ‘타인’이 아니라 ‘나’니까.
“자기방어훈련도 배웠다고 해서 한 번에 되지 않아요. 불편한 일을 당했을 때 넘기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다음에는 ‘뭐라고 그러는 거냐?’ 한 마디 하는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거죠. 그런 것들이 연습이 되면 언젠가는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당황스럽거나 위협적인 상황에서 대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 없습니다! 우린 그런 것을 배워보지 못했고, 국가도 나서서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