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 씨(가명)는 대학교 4학년 자립준비청년이다. 취업을 준비하느라 다양한 자격증을 따면서 가장 신경 쓴 것은 언어, 그중에서도 영어였다. 문화유산 분야로 진로를 고민했기에 토익이나 토스도 공부했는데 회화가 제일 재미있었다.
자립준비청년 은수 씨(가명)는 중학교 때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마음은 ‘네이티브’인데 입과 귀가 따라주지 않았다. 주입식 제도교육에선 좀처럼 영어 실력이 늘지 않았다. 특히 듣기가 어려웠다. 팝송을 듣고 가사를 해석하면서 혼자 공부했지만, 독학에는 한계가 있었다.
외국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승주 씨(가명) 역시 자립준비청년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워낙 겁이 많은 성격인데다 경제적 여건이 더 발목을 잡았다. ‘나를 책임져줄 어른도 없는데, 해외까지 가서 돈을 써도 되는 걸까?’
영어는 늘 스트레스였고 외국 여행은 언제나 로망이었지만, 이들에게 어학연수는 ‘남의 일’이었다.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해외 어학연수를 다녀온 또래들,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아서 영어가 유창한 친구를 보면서도 세 사람은 어학연수를 계획하지 않았다. 아름다운재단과 리커버리센터의 대학생교육비지원사업 참여자에게 제공되는 해외어학연수 지원을 만나기 전까지는.

25년 캐나다 해외어학연수 참여자
세 사람은 2025년 7~8월 캐나다 밴쿠버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각자의 바람과 기대를 안고 같은 곳을 향해 비행기를 탔고, 낯선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에서 두 달을 살았다. 저마다의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었고, 조금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영어 실력이 부쩍 늘었고 마음의 크기는 더 많이 늘었다.
실제 이 사업의 취지가 그렇다. 자립준비청년이 ‘현지 어학원 프로그램을 통한 어학 능력 향상’과 ‘해외 체류를 통한 넓고 새로운 경험’을 쌓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 자립준비청년 6명을 선정하고 현지 어학프로그램 등록비, 숙박 및 식사비, 체류비, 항공권, 보험료 등을 지원한다. 캐나다 어학연수는 2달이지만, 참가 신청과 면접·심사, 오리엔테이션에다가 귀국 후의 피드백모임까지 생각하면 1년 내내 이어지는, 꽤 긴 여정이다.

“꼭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한국에서도 잊지 않으려 해요.”
굳게 마음먹고 도전한 어학연수의 참가자로 선정된 건 너무나 기쁜 일이지만, 그 뒤의 준비 과정도 쉽지는 않다. 학원비, 항공권, 홈스테이, 체류비 등 각종 비용을 지원받지만, 체류비 일부는 개인이 자부담 한다. 만리타국에서의 두 달 살이는 준비부터 실제까지 산 넘어 산 좌충우돌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특히 해외에 나간 적이 한 번도 없는 승주 씨는 ‘갑자기 아프면 어떻게 하지? 지갑을 분실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으로 잠에 못 들 정도였다.
가장 먼저 해결할 숙제는 역시 돈. 세 사람은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풀었다. 승주 씨와 은수 씨는 꾸준한 아르바이트로, 현진 씨는 공모전 상금으로 비상금을 모았다. 어찌 보면 장기간 모은 돈을 단기에 쓰는 셈이지만, ‘이럴 때 쓰려고 모은 돈’이라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결정을 내렸다. 이번 어학연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경험이었다.
재정계획은 세웠지만, 준비는 이제 시작이다. 짐 싸는 것부터가 험난하다. 해외여행을 몇 차례 다녀온 현진 씨에게도 두 달의 살림을 챙기는 게 쉽진 않았다. 패션을 포기하고 화장을 포기하며 짐을 줄였다. 반대로 은수 씨는 최대한 많이 챙기는 ‘맥시멀리스트’다. 기내에서 “피부가 건조한 것 같다”고 하면 수분크림을 꺼내주는 사람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선 ‘도라에몽 주머니’로 통했다.

맥시멀리스트 은수씨
취향도 방식도 각자 다른 세 사람이지만 “유용한 조언 덕분에 어학연수가 든든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업을 운영하는 아름다운재단과 리커버리센터는 물론 유학센터에서도 청년들을 알뜰살뜰 챙긴 것이다. 제출 서류를 제때 챙길 수 있도록 알려주고, 필요한 물품 체크리스트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먼저 어학연수를 경험한 선배들의 조언이 효과적이었다. 수건은 몇 장 가져가야 하며 생리대는 어디서 사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경험자의 꿀팁이 전수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꼼꼼히 준비해도 실전은 다르다. 어학연수 기간 내내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이어졌다. 아시안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캣콜링(길가는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행위)도 겪었고, 길에서 마약 복용자나 노숙인이 너무 흔해서 당황하기도 했다. 반대로 나이나 국적을 뛰어넘어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자유로운 문화, 어디서든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좋은 충격이었다. 장애인이 활동하기 편하게 짜인 사회 시스템도 놀라웠다.

스탠리파크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피크닉
“낯선 땅에서도 잘 지냈는데… 이제 어디서든 잘 살 것 같아요”
어학연수의 1차 목표는 어학 실력이다. 세 사람은 이 목표를 얼마나 이뤘을까? 우선 듣기 실력이 많이 늘었고, 말하기도 조금 더 익숙해졌다. 승주 씨는 “실력도 늘었는데 자신감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선 외국인 앞에서 늘 우물쭈물했지만, 캐나다 어학원에서는 ‘나만 못하는 게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일단 입을 열었다. 종일 영어를 써야 하는 생활환경의 영향도 컸다. 다양한 나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영어 실력은 하루하루 늘었다. 은수 씨는 “처음에는 홈맘(홈스테이 관리자) 말을 못 알아들었는데 점점 대화가 자연스러워지더라”고 전했다.
현진 씨는 독한 마음으로 한국인을 멀리했다. 같이 어학연수를 떠난 친구들이 서운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들 현진 씨를 이해해주었다. ‘극I 성향’인데도 그는 용감하게 외국인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옆집 사람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 나중에는 디저트 가게에서 줄을 서다가 옆 사람에게 말을 걸고, 길을 가다가 축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끼어도 되겠냐”고 묻기도 했다. 한 달도 안 되어 귀가 트였다.

독한 마음으로 어학에 집중한 현진씨
어학연수는 쉼 없이 달려온 자립준비청년들에겐 간만에 찾아온 휴식의 시간이기도 하다. 은수 씨는 수능을 마치고 지금껏 4~5년 가까이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었다. 공부 욕심이 많은 그에게 어학연수는 다른 걱정 없이 자기 계발만 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승주 씨는 외국 영화와 드라마 속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동경했다. 홈파티에 참여해 여러 사람과 만나보고 싶었다. 현진 씨는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 장소에 가보고 싶었다. 시설에서 친구들이랑 옹기종기 모여서 보던 정겨운 드라마, 그 추억의 장면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다행히도 세 사람은 각자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이번 어학연수가 바로 그런 경험이었다. 청년들에게 이런 발견은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소중한 단서다. 자신감이나 자기효능감이 높아진 것도 큰 성과다.
승주 씨는 “꼭 완벽하지 않아도 되더라”고 말했다. ‘완벽주의자’ 승주 씨의 마음에는 그동안 두려움이 컸다. 완벽하지 않을까 봐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그 때문에 자존감이 떨어져 두려움이 앞서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어학연수 내내 여유를 즐기면서, 또 여유로운 캐나다 사람들을 보면서 그의 마음도 조금은 느긋해졌다. 한국에서도 이 마음을 잊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완벽주의를 내려놓게 된 승주씨
은수 씨는 “이제는 어디서든 잘 살 것 같다”고 했다. ‘아는 사람 없이도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땅에서도 이렇게 무사히 잘 살았는데, 도와줄 사람도 많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은 한국에서 못 버틸까’ 싶은 것이다. 그가 앞으로 통과해야 할 자립의 터널은 길고 험하지만, 지난 두 달의 삶은 고비의 순간마다 용기가 될 것 같다.
현진 씨 역시 “제가 생각보다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을 과소평가하면서 다른 사람의 기대에 자신을 맞추려 애썼던 것이다. 이번에 알고 보니 현진 씨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도 좋아하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이 발견은 진로에 대한 새로운 고민으로 이어졌다. 지금껏 전공인 역사와 문화유산 분야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해외 자원봉사에도 관심이 생겼다.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시간
“그동안 남에게 맞춰왔지만, 나는 생각보다 큰 사람”
자립준비청년들에게 캐나다 단기 어학연수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이자 ‘익숙한 나를 낯설게 만나는 여행’이기도 했다. 새로운 언어뿐만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결심을 가득 안고 세 사람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몸은 한국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비행기를 타고 있는 걸까. 세 사람은 “다시 해외로 나가보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은수 씨는 체력이 받쳐줄 때 부지런히 여행을 다니고 싶다. 현진 씨는 죽기 전에 아프리카도 다녀오고 싶단다. 어학연수가 두려워 잠을 설치던 승주 씨는 여러 나라에서 한 달씩 살고 싶다고 했다. 세계는 넓고, 이 청년들에게 주어진 가능성의 세계는 더 넓다.

어학연수 참여자들이 챙겨 온 기념품
인터뷰를 마치면서, 새로운 세계의 문 앞에서 한창 들뜬 세 사람에게 조언과 당부의 말을 청했다. “다음에 어학연수를 다녀올 후배들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어학연수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어요. 세상을 보는 눈을 제게 선물해줬거든요. ‘완벽하지 않아도 나를 사랑하면서 살아야겠구나’ 알게 해줬죠.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승주 씨)
“끈기를 갖고 용감하게 욕심을 내서 도전하세요. 인생은 한 번이잖아요.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어학연수에서 중요한 건 체력이라는 점도 잊지 말고요.” (은수 씨)
“자립준비청년이든 일반 청년이든 어학연수는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니죠.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니까 계획을 잘 세워서 소중한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현진 씨)
글│박효원
사진│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