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트: 빙하기, 소, 217
퀴즈탐험 신비의세계 왕중왕전에나 나올 법한 문제를 내보려 한다. 힌트는 세 개. 아시는 분들은 첫 문단을 패스하셔도 좋다.
첫 번째, 빙하기도 버티며 한반도에서 살아남았다.
두 번째, 소에 가깝다. 위가 네 개라 소처럼 되새김질이 가능해서 생존력이 높다.
세 번째, 천연기념물 217호로 지정될만큼 개체수가 적어 귀한 동물이다.
정답은? 이름부터 낯선 산양이다. 오늘 이야기는 산양이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오면서부터 시작된다.
야생동물이라 인간의 눈에 띌 일이 없는 산양이 어느 날부터 동네에 출몰한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국립공원 지키는 데는 누구보다 진심이었지만, 산양에는 관심이 1도 없던 시민단체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정인철 사무국장(이하 정 국장)은 ‘폭설이 와서 그런가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해당 단체는 국립공원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회원으로 활동한다. 지역에서 오래 거주한 회원들조차 난생 처음 산양을 목격한 상황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탈진한 채로 발견된 산양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폐사체로 발견된 산양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마침 중앙일보 기자가 현상에 대해 확인하고 싶다며 현장 가이드를 부탁해왔다. 취재길에 동행한 게 2023년 12월이었다.
“기자가 우연치 않게 얘기를 들었다고 해요. ‘지난 겨울동안 산양이 한 200마리가 죽었다는데요?’ 그러더라고요. 갑자기 소름이 끼쳤어요. 뭔가 있겠구나. 기자와 동행해서 산양 사체를 확인하고, 이후에는 관련 데이터를 받아서 현장하고 비교하는 작업을 한 달 여 정도 하기 시작했죠.”

모니터링 활동 중인 정인철 사무국장, 오른쪽 도로 경계석 너머에 산양이 보인다. ⓒ정인철
포착: 눈에 띄면 달려가는 말벌아저씨? 산양아저씨!
모두가 폭설 때문이라고 했다. 정 국장은 다른 이유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근거 없는 확신만으로 대책을 요구할 순 없었다. 정확한 증거가 필요했다. 정부에 등록되어 있는 산양 폐사 데이터를 기초로 통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만든 통계예요. 좀 단순해 보이죠? 근데 신고가 됐던 시점에는 이 수치만 존재했어요. 200마리가 죽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얘네가 어디서 죽은 건지 그리고 언제 죽은 건지 데이터도 없고요. 정보공개청구를 하면서 자료를 입력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제보받았을 때 분석했던 자료, 폐사위치와 개체수 등 기본 자료가 적혀있다. (2023년)

모니터링을 병행하며 593개체의 폐사 원인을 파악한 데이터, 왼쪽과 비교하면 데이터가 구체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24년)
살면서 산양이라곤 단 한 번 밖에, 그것도 멀찍이서 본 게 전부인 정 국장이 언제부턴가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인간이 평화롭게 일상을 영위하는 사이,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산양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정부에 요청해서 받은 데이터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동시에 강원 지역 일대를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몰랐다. 떼죽음이 막 시작되는 순간이었다는 것을.
“설악산에서 시작해서 화천, 양구, 인제, 고성 등 민간인 통제선 쪽으로의 모니터링을 확대했죠. 눈이 오면 무조건 갔고요. 눈이 쌓인 상태에서 또 눈이 올 때 출현 빈도가 가장 높았거든요. 1~4월은 계속 눈이 쌓여 있으니 눈이 올 때마다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기회를 놓치면 또 관찰하기 어려우니까. 새벽 4시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화천 민간인 통제선 입구에 딱 6시 50분에 도착해요. 그때부터 숨 안 쉬고 도시락 먹고 돌고 돌아오면 4시 반이 됩니다. 나중에는 저녁도 아까워서 야간 적외선 카메라를 구해서 야간 관찰도 병행했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가닥이 잡혔습니다.”
정 국장이 보여준 데이터 시트에는 산양의 연령대, 성별, 폐사원인, 감염원인 등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산양이 3년 간 남긴 죽음의 발자국을 집요하게 따라간 결과, 드디어 원인이 입증됐다.
발견: 인간이 친 거대한 그물에 걸렸다
폭설과 함께 산양을 떼죽음으로 몰고간 건 아프리카돼지열병(African Swine Fever, ASF) 차단 울타리였다. ASF가 농가로 확산되는 것을 막겠다며 2019년부터 4년 동안 무려 3,000km의 울타리가 설치됐다. ASF차단울타리가 떼죽음을 촉발시켰다는 건 정 국장만의 생각이 아니다. 동물 전문가가 아니기에 데이터 저널리즘 전문가, 교수, 국회 등 여러 사람들과 머리를 맞댔다. 2025년 11월에는 국책 연구기관도 같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강원도 인제와 양구에 걸쳐있는 대암산 일원에서 울타리에 걸려 죽은 산양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울타리 일대를 모니터링하고 있는 정인철 사무국장 ⓒ정인철
“울타리 설치가 시작된 건 2019년이고, 2020년부터 급작스럽게 산양 폐사율이 높아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인과관계를 누구도 인지하지 못했어요. 지도에 폐사 위치를 점을 찍어가며 살펴보니 윤곽이 나오더라고요. 산양 50% 정도가 화천, 양구에서, 30% 정도가 설악산에서, 20% 정도가 울진 삼척에서 떼죽음을 당했는데 화천, 양구는 ASF 차단 울타리가 집중적으로 설치되어있는데다 군 철책이 있습니다. 산양이 이동하지 못하고 고립되면서 먹이 활동을 못하게 된 거죠. 다행히 산양 위가 4개라서 되새김질이 가능하다보니 눈 속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버틸 수 있어요. 근데 생각 이상의 눈이 와버렸을 때는 산양도 대피로가 필요하잖아요. 그게 계곡이에요. 물이 흐르기 때문에 생각보다 온도가 눈이 금방 녹거든요. 그렇게 계속 내려가다가 돌아가려고 보면 울타리에 가로막혀서 갈 수가 없는 거죠.”

ASF울타리가 설치된 붉은 선을 따라 폐사체가 분포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기헌 의원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쉽게 생각하면 이렇다. 물고기 개체 감소 원인 중 하나로 저인망 그물이 꼽히곤 한다. 배 두척이 나란히 그물을 매달고 가면서 바닥까지 긁어서 물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치어들까지 잡히는 방식이라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저인망 그물을 산으로 올려보면 아마 ASF차단 울타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물샐틈없이 설치한 ASF울타리는 폭설에 갇힌 산양을 이중으로 가뒀고, 저체온증에 먹이까지 구하지 못한 스트레스로 인해 떼죽음에 이르렀다. 위가 네 개라 되새김질을 하며 오래 버틸 수 있는데도 아사, 탈진으로 사망한 개체가 가장 많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삽시간에 산양 1,022마리가 떼죽음을 당했고, 남은 개체는 4~500마리 정도로 추정된다.


최근 5년 간 폐사한 개체 중 543개체 분석, 산양 폐사 원인의 88.5%가 아사,탈진이었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변화: ASF차단 울타리 철거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이 밝혀낸 사실이다. 이후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작년처럼 산양이 집단 폐사한다면 국내에서는 완전히 멸종될 수도 있다. 겨울이 오기전에 ASF차단울타리를 철거해야했다. ASF는 야생멧돼지를 매개로 전국으로 확산된 상황이라 울타리를 통한 차단효과가 미미한 상황이라 더 유지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여기에 산양을 살려야 한다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더해졌다.
그리고 2025년 11월 4일, 정부가 ASF차단 울타리 철거 로드맵을 공식발표했다. 떼죽음이 알려진지 1년 8개월만의 일이다.

정부가 발표한 철거 로드맵, 울타리 철거 우선순위 및 구간이 표기되어 있다.
“문제가 알려지면서 울타리를 부분 개방하기도 했었는데요,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로드맵의 필요성을 이야기를 했고 정부가 수용을 했습니다. 사실 끊임없이 팔로우해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무엇보다 국회, 언론의 역할이 굉장히 컸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는 제가 좀 방심할만하면 전화를 해요. 정부도 기자 전화번호가 뜨면 일단 긴장부터 했고요. 의원실에 있는 비서관도 그렇고 드러낼 수 없는 분들도 누가 좀 흔들린다 싶으면 ‘서로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고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다는 촉박함, 지금 뭐라도 하지 않으면 작년의 사태가 반복될거라는 마음이 하나로 모인 결과일 것이다.
“이번 연초에 디테일하게 현장을 봤더니 비무장지대 일원은 사람이 없어서 산양이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새끼 산양을 발견하기도 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죠. 문제는 설악산인데요. 출현 빈도가 급격히 떨어졌어요. 종이 생존, 번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개체 수가 유지가 되지 않는 위험단계까지 왔다고 봐요. 그래서 앞으로는 산양 생태 복원과 같은 보호에 초점을 맞춘 활동이 이뤄질 거예요. 생태이동통로도 확대해야 될 거고요. 사례를 찾아보니 해외는 동물이 쉬어갈 수 있는 쉘터를 많이 만들더라고요. 눈이 왔을 때 피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는 거죠.”
[이슈리포트] 2024 천연기념물 산양 집단 떼죽음 원인과 대응 방안

산양 이슈를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다며 강조한 자료집, 2024 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했다.
이 이야기의 끝이 절망일까봐 사실 두려웠다. 이번 인터뷰 역시 겨울이 오기전에 산양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만든 기획이었으니까. 그러나 인터뷰 일주일 전쯤 정부가 철거를 공식 발표했고 염원이 이뤄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정작 정 국장은 아직 맘을 놓지 못했다. 3,000km를 철거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니 끝까지 지켜봐야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시민들의 도움도 필요하다. 산양의 흔적을 기록하고, 구조를 지원하는 일, 그리고 울타리 철거를 같이 감시하는 일은 상근 활동가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정인철 사무국장
“정부의 울타리 철거 로드맵 발표는 시민들의 관심이 만들어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산양을 살리기 위한 첫 걸음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당장 올겨울, 폭설이 내리기 전에 산양의 이동로를 막고 있는 죽음의 울타리들이 신속하게 제거되어야 합니다. 작년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정부의 약속이 현장에서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는 시민들의 매서운 눈이 필요합니다. 이 변화의 여정에 끝까지 함께해 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서로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된다’고 말해줄 시민들이 오늘부터 우리의 동료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겨울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