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국내] – ‘벼랑 끝 기억’여행 팀

파란만장 벼랑 끝 동행기 


3박 4일 간 서울, 서산 그리고 무주 여행을 통해 삶과 추억과 전통이 잊혀 갈 위기에 처해있는 곳, 또는 이미 잊혀가고 있는 곳을 찾아가 자본과 편의에 밀려 ‘벼랑 끝’에 몰려있는 사람, 자연, 마을에 더 귀를 기울이고 우리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나가거나 잊지 않기 위해 떠나는 [벼랑 끝 기억 여행] 팀의 길 위의 희망찾기

벼랑 끝 기억 여행 팀원들 점프샷

벼랑 끝 기억 여행 팀

3박4일 여정 중 셋째 날 아침. 덕유산 케이블카 탑승장 앞에서 만난 ‘벼랑 끝 기억 여행’ 팀은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파릇했다. 분당에서 출발하여 서울과 서산을 거쳐 무주에 이른 촘촘한 일정. 더욱이 유례없는 폭염 속 여행임을 감안한다면 제 아무리 혈기 방장한 십대라 해도 조금은 후줄근해졌으리라 예상했건만, 열일곱살의 에너지란 실로 불가사의한 신재생에너지였다. 일정표 상으로도 3일차 여정은 앞서 이틀보다 난이도가 높았다. 오전 중 덕유산 행, 점심 이후 합천 해인사로 이동, 저녁예불을 마치고 성주로 이동…. 하루 만에 전남-경남-경북, 무려 3개 도를 넘나드는 일정이었다. 에너지의 체급이 다른 터라 과연 이들을 쫓아다닐 수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통통 튀기는 에너지의 파편을 맞을 때마다 터지는 웃음의 힘으로 벼랑 끝 기억 여행에 동행했다.

산에 드는 길, 자연에 갖춰야 할 예의에 대하여

케이블카 타는 사진

케이블카 이용은 케이블카 설치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피부로 느껴보자는 취지의 편리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선택이었다

케이블카 이용은 케이블카 설치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피부로 느껴보자는 취지의 편리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선택이었다


상행길은 무주리조트에서 운영하는 관광곤돌라를 타고 설천봉에 올라, 향적봉까지 0.6km 남짓한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기실, 덕유산 일정을 계획한 건 국립공원 내 케이블카 설치가 야기하는 문제들을 피부로 느껴보자는 취지였기에, 케이블카 이용은 편리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선택이었다.

시작은 물범이었다. 조력발전소 건립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가로림만에 멸종위기에 처한 점박이물범이 서식한다는 이야기를 접했고, 그 물범을 보고자 8명의 친구들이 모였다. 자본과 편의를 위해,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상처입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삶과 자연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테마를 정리하자 걸음이 바빠졌다. 서울의 구룡마을과 개미마을을 시작으로, 서산 가로림만, 무주 덕유산, 합천 해인사, 그리고 사드로 뜨거운 성주까지, 쉴 틈 없는 동선으로 설계한 3박4일간의 벼랑 끝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체사진

뒤돌아앉아 브이를 하고 있는 모습

자본과 편의를 위해,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상처입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삶과 자연을 찾아가는 여행의 시작

해발 1520m 높이의 설천봉까지 불과 10여 분 만에 도착. 바다처럼 흐르는 운무와 구상나무며 주목의 고사목이 어우러진 풍경은 흡사 선계를 담은 수묵화 같다. 설천봉~향적봉 구간은 수백 년 된 주목 군락과 다양한 아고산대 식물을 관찰할 수 있는 산길이다. 폭염 속에도 산중엔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나무계단으로 조성한 탐방로는 어린 아이도 걸을 수 있을 만큼 잘 닦여 있다. 국립공원 중 덕유산이 겪는 스트레스 지수가 1위라는 건, 이 달콤한 편리의 이면이다. 남한에선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산이라는데 이렇게 쉽게 올라도 되는 걸까, 하는 각성도 잠깐. 향적봉에서 조망하는 근사한 풍경에, 미안한 마음도 잠시 뒷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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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의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많은 경우 그 공존이라는 것도 인위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덕유산 자료조사를 맡은 승헌은 이전에 아빠와 함께 했던 덕유산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때는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랐고, 족히 4시간이 걸렸단다. 

“같은 산인데 느낌이 완전히 다르네요. 아름다움도 덜하고, 감동도 덜해요. 케이블카로 인한 환경훼손도 문제지만, 저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산을 대하는 태도가 아쉬웠어요. 샌들을 신거나 심지어 슬리퍼를 신은 사람도 눈에 띄더라고요. 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랄지, 그런 게 없어보였어요.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이 너무 쉽게 허락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케이블카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왜 기어코 정상을 ‘찍어야’ 하는지, 심지어 멋대로 ‘정복’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는지. ‘산을 오른다’는 말도 조심스러워 ‘등산(登山)’이 아니라 ‘입산(入山)’이라 했던 옛 사람들의 마음을 더듬어 볼 일이다.

케이블카를 통한 덕유산행의 아쉬움은 승래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미 백두대간 종주 때 덕유산을 찾았던 그에게, 오늘의 덕유산은 이전의 기억과 다르다.

“덕유평전에서 원추리 사이로 뛰놀던 기억이 정말 선명해서, 그때 그 경험을 친구들과 공유하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쉽게도 거기까진 못 갔네요. 노약자나 산을 오르기 힘든 분들도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분명 케이블카 덕분이죠. 하지만 덕유산이 인간의 소유물은 아니잖아요. 산을 깎고, 스키장을 들이고, 곤돌라를 놓는 행위들… 자연과의 공존을 이야기하지만, 많은 경우 그 공존이라는 것도 인위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덕유산 꽃길 내려가는 청소년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쉽사리 산에 들었던 미안함을 싹 풀어준, 고난의 하행길이었다. 걸어서 하산하기로 한 계획을 지켜야 했고, 다음 코스를 위해 시간도 단축해야 하는 상황 속. 선택은 오직 ‘빠른 길’이었으나, 빠른 길은 험한 길이자 때로는 길 아닌 길이어서, 그야말로 생생한 야생을 체험했다.

비눗방울 놀이하는 청소년

길 위에서 쌓은 추억으로 우정의 농도를 한층 더한 듯 했다.

길 위에서 쌓은 추억으로 우정의 농도를 한층 더한 듯 했다.


사진 담당이라 누구보다 열심히 뛰어다니며 친구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던 유니는 하산길에 가장 뒤처졌다. 경사 급한 내리막길을 무서워하는데다, 발에 물집까지 잡힌 극한 상황. 아이들은 뒤처진 친구를 기다릴 줄 알았고, 덤불에 긁힌 상처에 서로 연고를 발라줬으며, 부족한 물을 나눠 마셨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비눗방울 장난감을 꺼내 특수효과를 연출하며 기념사진을 찍었고, 풀벌레와 유독 교감지수가 높은 명랑소녀 유경이의 손끝엔 볼 때마다 매번 잠자리 친구가 앉아 있었다. “인생, 참 쓰다…” 덕유산을 내려와 유니가 남긴 저 명대사는 깊은 한숨에도 불구하고 한바탕 웃음바다를 만들었을 뿐.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8명의 아이들은 이우고등학교 1학년 4반 친구들이었지만, 길 위에서 쌓은 추억으로 우정의 농도를 한층 더한 듯 했다.

해인사로 향하는 숲길을 걷는 청소년

계곡을 옆에 낀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아이들은 금세 가야산의 깊고 무른 품에 쏙 안겼다.

계곡을 옆에 낀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아이들은 금세 가야산의 깊고 무른 품에 쏙 안겼다.


해인사로 가는 길.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잠드는 신기를 보여주었고, 어느 틈엔가 깨어나 다시 또랑또랑한 눈빛을, 짜랑짜랑한 웃음을 복구했다. 절 아랫마을 산채식당에서 비빔밥과 된장찌개로 늦은 점심을 챙긴 후 해인사로 드는 산길을 걸었다. 또 산이냐는 웅성거림도 잠시. 홍류동 계곡을 옆에 낀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아이들은 금세 가야산의 깊고 무른 품에 쏙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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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판전을 천천히 관람하고, 저녁예불 시간까지 잠시 자유시간을 가졌다. 삼보사찰답게 위풍당당한 가람 배치를 조망하며 물결치듯 도열한 검은 기와지붕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바람의 향방을 명징한 울림으로 짚어주는 처마 밑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했다. 종교색을 떠나 천년의 문화를 더듬는 시간. 찬 돌샘에 목을 축이고, 절 마당에 미로처럼 그려진 해인도를 따라 걷다보니 어느덧 저녁예불을 알리는 법고가 시작됐다. 스님 세 분이 연이어 치는 법고는 온 몸의 세포를 바짝 일깨웠다. 마치 시원한 소낙비에 흠씬 두드려 맞는 듯 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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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의 사자후에 홀린 듯 범종루에 시선을 고정한 아이들을 뒤로 하고 해인사를 나왔다. 법고가 끝나면 타종이 이어질 터. 아이들의 가슴에 종소리가 남길 파문이, 장엄한 저녁 예불이 남길 무늬가 궁금했다. 절을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맑고 가지런한 뒷모습들이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자꾸만 떠올랐다.

글 고우정 ㅣ 사진 임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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