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삼천포로 빠져야 하는 이유
봄날의 보약 한 첩 도다리쑥국,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구이, 겨울철 감기약으로 그만인 물메기탕, 청정해역에서 건져 올린 은빛 멸치… 우리가 기꺼이 삼천포로 빠져야 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무수하며, 그중에는 바다를 닮은 아이들도 포함된다. ‘삼천포 홍보단’을 자임하는 용궁문지기 이야기다.
삼천포 홍보단을 소개합니다!
용궁문지기와의 만남은 삼천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노산공원에서 이루어졌다. 쨍쨍한 가을볕 아래 빛나는 푸른 바다와 바람결에 묻어나는 싱싱한 바다 내음에 가슴이 두근거릴 즈음, 핫핑크색 단체티를 맞춰 입은 세 친구가 잔디밭 저편에서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총 14명의 모둠원 중 인터뷰에 함께한 이는 모둠대표 윤서, 홍보담당 윤주와 인영이다. 나머지 친구들은 ‘논길 프로젝트’ 현장에서 오늘 하루치 작업 분량을 뽑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 앳된 열일곱 소녀들이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다’며 의젓하게 인사를 챙기는 모습이 사뭇 신선했다. 과연, 삼천포에서 나고 자란, 정통 ‘삼천포 유지’다운 어엿한 매너랄까.
사천군과의 통합으로 사라진 지명이건만, 아이들은 ‘삼천포’란 이름과 어우러질 때 더욱 빛을 발하는 고향의 산과 바다를 사랑한다. 하여, 그 사랑을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용궁문지기를 결성, 삼천포 지킴이 혹은 삼천포 알림이로 나섰다. 여고, 남고로 흩어지고 타 지역 학교에 진학하며 삼천포를 떠난 친구도 있었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이런 활동을 해 보겠나’ 싶은 마음이 17년 지기 동네친구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 진학과 취업을 이유로 삼천포를 떠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친구들과 바닷바람을 한껏 들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어렴풋이 예감한 까닭이다.
일이 커지려 그랬을까. 동아리를 결성할 즈음, 청소년자발적사회문화활동(이하 청자발) 지원사업을 접하게 된 사연도 흥미진진하다. 모둠원 중 유재석의 열혈 팬인 한 친구가 유재석 관련 이슈를 검색하던 중, 기부를 통해 그가 아름다운재단과 맺고 있는 오랜 인연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렇게 연결된 재단 홈피에서 청자발 지원사업 공고를 접했다 하니, ‘유느님’의 미담 사례에 또 하나를 추가해도 좋겠다.
벼와 함께 익어간 논길프로젝트 전말기
봄부터 추진해온 논길 프로젝트는 ‘삼천포 지킴이’로서의 첫 사업이다. 용궁문지기는 모둠원 대다수의 모교이기도 한 용산초등학교 앞 논둑길을 주목했다. 논바닥과 높낮이차가 제법 나는 데다 폭이 좁은 농로는 초등학생들의 등하교 길로 위험해보였다. 안전사고를 예방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논둑길에 그림을 그려 넣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아이들의 관심을 끌만한 예쁜 그림으로 찬찬히 길을 보며 걷게끔 유도하는 전략이었다.
학교까지 134m에 달하는 논둑길은 사계절을 테마로 채워졌다. 경쾌한 피아노 건반으로 시작, 벚꽃 난분분한 봄으로, 생동하는 여름 바다로 이어지다가 어느덧 단풍 들고 눈이 내려 크리스마스카드 같은 겨울풍경으로 완결된다. 용궁문지기 모둠원 중엔 동생이 용산초등학교를 다니는 친구도 있다. 어린 동생이 넘어지지 않길, 다치지 않길 바라는 언니의 마음이 담긴 길이다.
벼포기가 초록 물결을 일렁일 무렵부터 시작된 밑그림과 페인팅 작업은 여름과 함께 쑥쑥 무르익어 완성이 머지않은 상황이다. 누렇게 익은 벼를 추수할 쯤, 논길프로젝트도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여름방학 내내, 모둠원들은 부지런한 농군처럼 일했다. 뜨거운 볕을 피해 동틀 무렵과 해질 무렵에만 그림을 그리다보니, 밭일 나온 동네 어르신들과도 친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참 잘해주셨어요. 더운데 또 나왔냐며 과일도 내주시고, 페인트 통을 비롯한 작업도구를 맡아주시기도 했고요. 근처에 어린이집 애기들도 저희가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곤 했어요. 애기들을 데리고 나온 선생님이 ‘언니, 오빠들에게 박수!’ 그러면 박수도 짝짝 치고요. 애기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응원을 많이 받았어요.”
용궁문지기 취재에 동행한 김지수 배분위원(인생나자작업장 상임이사)은 논길프로젝트의 마침표로 아기자기한 오픈식 아이디어를 보탰다. 작업도구를 맡아준 할머니, 인근 어린이집 꼬마들, 모둠원들의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 동네잔치를 벌여도 좋겠다는 것.
“교장선생님께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잔치를 해도 재밌을 거예요. 논길을 주로 이용할 초등학생들이 선배들이 만들어 준 길에 대한 감사와 자부심을 새길 수 있는 계기도 되고, 그림에 대한 애착과 책임감을 갖게 될 테니까요. 이후 논길 그림에 유지․보수 작업이 필요할 때, 초등학교 아이들을 참여시켜도 좋겠죠. 그런 식으로 용궁문지기가 그들의 프로젝트를 물려줄 후배들을 키울 수도 있다고 봐요.”
고향과 소꿉동무의 설레는 재발견
열일곱 살의 여름을 아이들은 훗날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우리끼리만 알고 있기엔 아까운 삼천포의 맛과 멋을 널리 공유하겠노라는 약속과 그 이행과정은 전혀 새로운 경험들을 동반했다. 소꿉동무들과 논둑길에 엎드려 그림을 그린 것도, 타 지역 친구들을 초대해 1박2일 동안 삼천포 구석구석을 안내한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지난 5월, 청자발 O.T 당시 AD FOCUS 팀의 콜라보레이션 제안은 용궁문지기 친구들에게 그야말로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영상고등학교 광고제작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보다 양질의 삼천포 홍보영상을 만들 수 있을 터인즉, ‘삼천포 알림이’로선 절호의 기회였다. 더욱이 서울 친구들을 삼천포로 초대하는 형국이라, ‘내 친구를 삼천포에 초대합니다’란 사업명을 정확하게 실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용궁문지기 친구들의 손님맞이는 스케일부터 남달랐다. AD FOCUS 팀의 원활한 촬영을 위해 부모님을 움직여 멸치잡이 어선을 띄웠을 뿐 아니라, 삼천포의 맛을 각인시킬 궁극의 맛집과 바다 전망의 숙소 섭외까지, 꼼꼼하고도 세심한 준비로 타지 친구들을 감동시켰다는 후문이다.
“사천8경과 삼천포의 비경을 찾아다니며, 삼천포에 대한 자부심이 더 높아졌어요. 삼천포를 처음 와본 AD FOCUS 친구들도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간혹, 삼천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고향을 설명해야 할 때면 소극적이 되곤 했는데, 이젠 적극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얘깃거리를 두둑이 챙겼으니까요.”
같은 해, 같은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동갑내기 친구들은 유치원과 목욕탕, 초등학교와 놀이터를 공유하며 내내 함께 자랐다. 첫 소풍도 함께 가고, 중2병도 함께 겪었으며, 변화하는 몸무게까지 싹 다 꿰고 있단다. 부모님들끼리도 소꿉동무라 대를 잇는 절친도 허다하며, 친인척으로 얽힌 경우도 있다. 서로 모르는 게 없다 생각했던 친구들이었건만,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속에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도 했다. 삼천포의 산과 바다가 그러했듯, 익숙한 친구의 얼굴에서 발견한 낯선 아름다움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이다.
글 고우정ㅣ 사진 김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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