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호흡하는 아나운서

1995 KBS 21기 공채로 입사해 2002년에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자유로이 대중과 만나는 솔직하고 맛깔스러운 입담을 자랑하는 최은경 아나운서. 그녀의 어렸을 적 꿈은 영어 선생님이었다. 방송에 관련된 일을 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초등학교 때 발표를 시키면 말 안하고 30분 동안 서 있는 아이가 바로 그녀였다.

그렇게 나서기 싫어하는 성격에 무슨 아나운서냐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재미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은 건 인터뷰였는데 사람에게 공감하는 순간이 좋았던 것이다. 평생 직업을 얻는 느낌이라고 할까.하지만 마냥 좋았던 건 아니다. 말랑말랑한 성격이 아니라 남들보다 대본 한 번 더 보고 2시간 동안 진행하는 라디오를 오롯이 들으면서 모니터링 할 만큼 자신에게 엄격하고 치열했다. 매순간 다음엔 더 잘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노력했다. 앞서가는 건 힘들어도 제 자리에서 성실했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단 프로그램을 먼저 생각하고 사람을 둘러보며 20여년을 지냈다.

“2MC 하면서 배운 게 둘 다 잘하려고 하면 망한다는 거예요. 한 사람이 말을 많이 하면 말없이 곁에 있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함께 사는 세상인 거죠. 파트너십에 대해 나름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런 의미로 4년 동안 진행한 <동치미>는 저랑 정말 잘 맞아요. 오랫동안 좋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족 같기도 하고요. 나이 들면서 제 나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맡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검정색 옷을 입은 최은경 아나운서가 마이크로 말을 하고 있는 옆모습입니다.

아이를 통해 세상을 품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가 아름다운재단과 인연을 맺은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막연하게 아프거나 힘든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기부자인 남편을 통해 믿을 만한 단체를 만난 것. 첫 만남 이후로 그녀는 여러 방법으로 기부를 실천했다. CF 출연료 전액을 기부하는가 하면, 아름다운재단 행사 사회나 홍보 내레이션 참여 등 재능기부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나눔을 고민하게 됐고 ‘발리네 집 기금’을 마련했다.

“흔히들 ‘나중에 돈을 벌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지’ 그렇게 얘기하곤 하는데 그런 생각만 갖고 있지 기부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멀리서 바라보고 멀게만 생각했던 거예요. 한데 가만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고요. 가까운 예로 제 남편은 꾸준히 기부를 해오더란 말이죠. 그 덕에 아름다운재단을 알게 됐고 저는 거기 얹혀서 한동안 평범한 기부자로 지냈어요. 그러다 아이가 태어났고 어떤 변화가 생겼어요. 내 아이는 아프다고 하면 대신 목숨도 내어 줄 부모가 둘이나 있는데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어떡하나,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래서 각자가 아닌 우리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기부가 없을까 고민했고 ‘가족 기금’을 만들었죠.”

아이의 태명에서 따온 ‘발리네 집 기금’은 나눔을 통한 소통이었다. 단순한 기부에서 벗어나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품는 부모의 마음으로, 자신의 아이에게 생활 속의 나눔을 가르치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실천. 그것은 가족과 공유하는 ‘나눔의 일상’인 동시에 타인과 만들어가는 ‘나눔의 삶’이었다.

“저마다 설움이 있겠죠. 공부 못하는 설움, 엄마 없는 설움, 집이 없는 설움, 하다못해 부자도 명품백이 품절돼서 못 가지는 설움이 있지 않겠어요(웃음). 그 많은 설움 중에 제겐 몸이 아픈 설움이 가장 크게 다가와요. 특히 어린이들이요. 건강하게 자라서 스무 살이 넘으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데, 아직 어린 아이이고 더군다나 아픈 아이들은 다르잖아요. 다솜이작은숨결살리기에 관심을 가지는 건 그 때문이에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서 그렇기도 하고요.”

보라색 옷을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최은경 아나운서<사진 출처 : 기획사 제공>

건강한 세상을 위한 나눔

최은경 아나운서는 저마다 자신의 수준과 입장에서 타인을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여러 단체에 기부하고 그녀의 어머니가 독거노인 배식봉사에 몰입하는 것도 그 맥락일 거라고 덧붙인다. 그들 모녀의 나눔 철학은 서로 닮아 있다. 어쩌면 그녀의 나눔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DNA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그러세요. 혼자 계신 어른들 보면 ‘나는 내 딸이라도 있는데…’ 생각하신다고. 요즘에는 발리가 봤으면 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하세요. 얼마 전엔 봉사상을 받으시곤 ‘사람이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손자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대요. 발리는 할머니가 노벨상을 탄 줄 알죠.”

요즘 그녀의 고민 중 하나는 아이에게 나눔을 이해시키는 일이다. 타인을 공감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몰입하는 아이를 위한 나눔 교육이 핵심이다. 물론 쉽지 않다. 2년 전엔 해외 아동을 후원하는 것을 두고 “왜 모르는 아이, 그것도 다른 나라 아이를 도와야 하느냐,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거 싫다”고 해서 매일 싸우기도 했다. 조근조근 말로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논쟁 끝에 “기부는 하겠다. 하지만 한국 사람으로 바꾸겠다”는 것으로 타협을 보기는 했지만 아이의 나눔 교육은 여전한 숙제다. 첫술에 배부를리 없다고 생각하며 아이가 나눔을 자연스레 깨우칠 수 있도록 지켜보고 다독이자고 다짐하는 중이다.

“수년 간 기부하면서 제 나름대로 세운 기부철학이 있어요. 그게 ‘자신도 모르게 나눠라’예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보다 더 나아가서요(웃음). 그래서 자동이체 시키고 일부러 살피지 않아요. 나가는 게 빤히 보이는데 정말 대단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매달 돈 쓸 일이 생기고 그러다 보면 슬그머니 계산기를 두드리게 되거든요. 물론 스스로 일일이 직접 체크하고 기부하시는 분들도 있죠. 그분들은 정말 대단한 수양이라고 생각해요.”

간혹 그럴 거면 왜 하냐고, 주체적이지 못하다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녀는 자신 같이 의지가 강하지 않은, 줏대 없는 사람은 그렇게라도 해야 된다고 강조한다. 기부를 정신적인 사치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치쯤 부려도 괜찮다고 장려한다. 어떤 이유로든 나눔을 실천하면 세상이 건강해 질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의 아픔을 알게 돼요. ‘60일의 건강보험증 캠페인’이 바로 그 예인데, 처음엔 이해가 안 됐어요. 화가 나기도 하고요. 1년에 병원 몇 번 안 가지만 내가 더 낸 돈으로 누군가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생활을 꾸리는 것도 벅찬 사람들이 아픈데도 병원을 갈 수 없는데 제도적으로 도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니 이 캠페인이야 말로 정말 필요하구나 생각했죠.” 

검정색 옷을 입은 최은경 아나운서가 단상 앞에서 마이크로 말을 하고 있다.

11월의 마지막 토요일, 그녀는 건강한 나눔을 널리 알리는 취지의 캠페인 행사 사회를 맡았다. 자신의 재능기부로 사각지대에 놓인 아픈 사람들이 건강해지기를, 더 많은 사람이 ‘60일의 건강보험증 캠페인’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보듬어 모두가 행복하기를 꿈꾼다.

“제게 나눔은 꽃을 건네는 일이에요. 꽃을 건네받은 사람도, 건넨 사람 손에도 향기와 기쁨이 남기 때문이죠. 일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만드는 나눔에 여러분이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글 우승연 l 사진 이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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