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추운 겨울 한복판에서
김은성(가명) 씨가 남편과 따로 살게 된 건 2003년부터다. 어느 새 10년이 훌쩍 지났다.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고단한 시간.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어려워졌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가 발단이 되어 결혼 5년 만에 별거가 들이닥쳤다. 두 달 후부터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그 겨울 그녀의 칼바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것은 전업주부였던 김은성 씨가 홀로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의 촉감이었다.
세살배기 딸아이와 함께 나선 세상은 단호했고 차가웠다. 매순간 도종환 시인이 이야기한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절망의 벽”을 느꼈다. 무너뜨리기는커녕 넘어설 수조차 없는 상황이 버거웠다. 누구라도 손 잡아주기를 희망했으나 내려다보면 빈손이었다. 끌어주기 힘들어도 곁에 서서 지켜봐주기를 바랐던 시절이었다. 그 힘으로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 부산 사상지역자활센터를 만났다.
“한두 달 남편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이제 스스로 먹고 살아야지 싶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들긴 했죠. 그래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일을 찾자고 결심했어요. 한데 그동안 꼭 붙어있어선지 아이가 떨어지려고 하지 않더라고요. 정말 막막했어요. 그런 제게 누군가 동사무소에 문의해 보라고 귀띔해줬어요. 전화했더니 한부모가정 지원을 알려주시더군요. 그 과정에서 부산 사상지역자활센터를 알게 되고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첫 직장은 집 바로 옆에 위치한 여성문화회관 상담실 보조였다. 아이가 5살이 되기까진 떨어뜨려놓을 수 없기에 이보다 좋은 자리는 없었다. 살갗을 에는 바람이 멈췄다. 다시 봄이었다. 계절의 순환 앞에서 김은성 씨는 수그러드는 마음을 곧추 세웠다.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것의 의미
두 번째 일터는 학교 도서관이었고 세 번째는 신나는 자활장터 내 커피하우스였다. 10년 동안 세 군데 직장을 다니면서 오로지 딸만 생각했다. 매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직장이고, 딱 먹고 사는 것만 해결되는 최저생계비를 쥐고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2인 가구가 살아가기에 빠듯해도 안정적인 수입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6시에 일을 마치니까 그때까지 아이를 맡아줄 곳이 필요했어요. 계속 학원을 돌렸죠. 학원비가 만만치 않게 들어갔는데, 크게 돈을 모으고 살지는 못해도 아이 키우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니까 아깝지 않았어요. 그런 제 맘을 이해해선지 아이도 잘 따라줬어요.”
늘 미안하고 고마운 딸아이는 10년 동안 부쩍 성장했다.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매달리던 아이는 이제 진로를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한다. 힘든 순간 서로 의지하며 지낸 시간을 오롯이 기억하는 김은성 씨에게 아이의 독립은 낯설고 불안한 요소다. 얼마 전 마감한 고등학교 원서 접수를 두고도 격하게 부딪쳤다.
“결국 아이가 원하는 학교에 지원했어요.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파요. 조금만 자신감을 가지면 충분히 가능한데도 아이가 자신감이 부족해 보여서요. 부족한 게 있어서 그런 건 아닌가, 혹시 환경 때문에 위축되는 건 아닌지 자꾸 돌아보게 되네요. 2015년 커피사업단에 들어오고 올 해 부터 야간 근로가 있는 2호점으로 옮기면서, 늦을 땐 10시에 마치다 보니 아이와 얘기할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좀 더 신경 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네요.”
아이의 독립적인 선택을 존중하지만 혹시 가장 필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는 김은성 씨. 이토록 마음이 쓰이는 건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혼자 결정하는 게 얼마나 불안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중대한 결정을 오롯이 혼자 책임질 때의 두려움은 한부모 여성가장으로 지내는 내내 그녀를 힘들게 했다. 누구에게라도 조언을 구하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혼자구나’ 되뇄다. 그 순간엔 부산 사상지역자활센터의 도움으로 깨우친 공동체의 의미마저 희미해지곤 했다. 그저 자활을 위해 좀 더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적어도 아름다운재단의 ‘한부모 여성가장 건강권 지원사업’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돌덩이 같은 불안을 떼어내다
“종종 아프긴 했는데 진통제 먹고 잊었죠. 최저 생계비로 아이 학비에 올인 하다시피 지내는데 병원은 사치였으니까. 약 먹으면 조금 괜찮아지니까 별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했어요. 이혼 후 온갖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 정도 아픈 건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하고. 어쩔 수 없으니까 돌아보지 않았는데 늘 걱정됐어요. 큰 병에 걸렸으면 어쩌나.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딸은 어떡하지. 한부모여성가장 건강권 지원사업은 그런 제게 딱 필요한 지원이었어요.”
3번 두드린 끝에 지원 대상자가 되어 기뻤다. 부산대학교병원 건강검진센터 1차 검진 후 유방초음파, 복부CT, 소변검사 재검이 결정됐고 초조한 마음으로 2차 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큰 병은 없었으나 담석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종종 느꼈던 피로감, 소화불량과 복통의 원인이었다. 수술이라지만 떼어내고 회복하면 되겠구나 생각하니 안심이 됐다. 다른 곳은 건강한 편이고 수술비는 지원이 된다고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묵혀온 돌덩이 같은 불안을 떼어내는 일과도 같았다.
“10월 12일에서 입원해서 13일에 담낭 결석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2cm, 1.5cm 각각 1개씩 제거했습니다. 1mm 미만의 담석이 꽤 있긴 했는데 모두 없앨 순 없었고 이후 살펴보기로 했어요. 5일 동안은 병원에서, 1주일은 집에서 지냈는데 정말 오랜만에 쉬었던 것 같아요.”
10년만의 휴식이었다. 물론 수술 후 통증에 고달팠고 간병할 사람이 없어 난감하긴 했지만 돈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오롯이 스스로를 위해 쉴 수 있었다. 아름다운재단에서 병원비 전액을 지원 받기에 가능한 시간이었다. 퇴원한 뒤 수술 전 보험 등을 챙기며 써놓았던 유서를 발견하고 피식 웃었다. 아이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기 싫어 “가벼운 시술이니 오지 말라” 해놓곤, 엄마 없더라도 잘 커야 한다느니, 보험은 어디 있다느니 잔뜩 써놓은 게 미묘했다. 당시 김은성 씨의 복잡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다.
“지원을 받아 온몸 구석구석 꼼꼼하게 검진을 받고 아픈 곳을 치료 받으면서 좋았던 게 뭔 줄 아세요. 더 이상 아프지 않겠구나, 큰병일까봐 걱정하지 않겠구나, 뭐 그런 것도 있지만 제겐 그보다 더 큰 게 혼자가 아니라는 거였어요. 아픈 건 참을 수 있지만 그건 참… 자활센터에서 지원받아 직업도 얻고 창업도 꿈꾸고 재단에서 지원받아 몸을 챙길 수 있는 것이 너무 고맙고 따뜻해요. 어려울 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는구나 생각하며 이상하게 기운이 났어요.”
2017년엔 부산사상자활센터 동료 몇과 커피하우스 창업할 것이라며 웃는 김은성 씨. 그녀는 10년 동안 한부모 여성가장으로 지내며 뒤집어쓴 소외를 벗었다. 무탈한 일상, 짧은 결혼생활에서도 얻지 못한 더불어 사는 미래를 꿈꾸게 됐다. 여럿이 함께 손잡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것이 부술 수도 넘을 수 없는 벽을 어떻게 넘어가는지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든든하고 따뜻한 낯모를 이의 지지가 가르쳐준 진실. 이제 기다릴 뿐이다. 그녀가 넘어선 벽, 저 너머의 세상, 그 시간을.
글 우승연ㅣ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