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내 삶의 예고편
꼬로꼬로는 청구고등학교 2학년생 25명으로 구성된 학내 자율동아리다. 1학년 때부터 2년째 함께하고 있는 모둠원들은 동아리 안에서 역사‧경제‧사회문화 등 자신의 관심사 및 진로와 관련한 분야별 프로젝트 팀을 구성해 연구와 토론을 기본으로 다양한 대외활동을 진행해왔다. 2015년 한 해 동안 프로젝트 팀별 활동을 활발히 펼쳐온 모둠원들은 그 각각의 역량을 꼬로꼬로의 이름 아래 하나로 모아보자는 욕구를 갖게 된다. 모둠대표 예찬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문‧이과가 모여 뭔가 작품 하나 해보자!” 의기투합 했다는 것. ‘길의 인문학 지도’라는 타이틀로 ‘2016 청소년 자발적 사회문화활동(이하 청자발)’에 지원하게 된 계기다.
낯설게 바라본 익숙한 동네
꼬로꼬로 모둠원들이 함께 만들어낸 ‘작품’은 청구고등학교에서 버스로 5분 남짓한 근대골목을 주제로 한다. 근대골목은 중구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으로, 대구 청소년들에겐 매우 익숙한 동네다. 동산선교사주택, 3.1 만세운동길, 계산성당, 이상화․서상돈 고택 등 근대문화유산이 오롯해 체험학습 단골 코스이기도 하거니와, 인근 동성로 일대가 대구시내 최대 번화가인 까닭이다.
가령, 이 지역 청소년들이 친구들과 놀러 나간다면, 약속장소는 필경 동성로 언저리가 될 것이다. 민족저항시인의 고택과 고딕건축양식의 오래된 성당보다는 멀티플렉스와 카페 때문에 자주 찾는 동네다. 하지만 꼬로꼬로 모둠원들은 근대골목이 품고 있는 가치를 주목했다.
“익숙한 데 비해 별로 아는 게 없더라고요. 해설사와 함께하는 근대골목투어를 체험했지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어요. 분명 대구를 대표하는 관광자원이고 문화유산임에도 그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게 기존 관광홍보자료의 문제점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직접 다르게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다가, 근대골목의 역사‧경제‧문화‧건축양식 등을 총 망라한 ‘길의 인문학 지도’, 테마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기획하게 됐죠.”
팀별 활동에 익숙한 모둠원들은 일단 각자의 관심사에 따라 역사‧경제‧문화‧건축 등의 분야를 나눠 가졌다. 그리고는 자신이 맡은 분야를 통해 근대골목 안에 깃든 이야기를 집중 탐구했다. 이를테면 역사파트는 근대골목 유적답사와 일제 잔재에 대한 조사를 맡고, 경제파트는 근대골목에 자생하는 사회적기업 연구를 맡는 식이었다.
인터넷으로 찾는 자료엔 한계가 있어, 연구 작업 대부분이 발로 뛰는 취재를 필요로 했다. 이태리어로 ‘나는 달린다’는 뜻을 가진 모둠명처럼, 꼬로꼬로 모둠원들은 2016년의 뜨거운 여름 한철을 근대골목 속으로 내달렸다.
정의와 진실의 문을 두드리며
경제파트를 총괄한 예찬은 북성로 사회적경제 클러스터를 주 활동무대로 삼았다. 사회적기업가를 육성하는 ‘북성로 허브’와 사회적기업 5곳을 취재하며, 사회적경제의 가치와 가능성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1학년 때부터 경제학과 쪽으로 진로를 설정해둔 소년에겐, 막연했던 꿈을 보다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새롭게 열어갈 자본주의 4.0, 5.0 시대엔 무한경쟁과 이윤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어우러지고 환경을 생각하는 따뜻한 자본주의를 추구한다고 하잖아요. ‘북성로 허브’와 사회적기업들을 탐방하면서, 그 따뜻한 자본주의의 중심에 사회적경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회적경제의 불모지였던 대구에서 신념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온 분들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어요. 이기적으로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고, 미래에 제가 우리나라 경제를 위해 일하게 된다면 이런 부분을 더욱 신경 써야겠다는 새로운 다짐도 생겼습니다.”
사회문화파트를 맡은 지환은 골목투어 인기코스인 김광석거리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집중 탐구했다. 가수 김광석이 유년시절을 보낸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 일대가 관광명소로 떠오른 건 2010년, 벽화거리가 조성되면서부터다. 관광객이 대거 몰리며 지역상권이 되살아난 듯 했지만, 명암은 극명히 갈렸다. 이 일대 점포 임대료가 최근 5년 사이에 5배나 폭등했다는 것. 오랫동안 방천시장에 둥지를 틀어왔던 영세상인들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하나 둘 떠나고, 프랜차이즈 식당과 술집·카페 등 거대 자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젠트리피케이션, 이른바 둥지 내몰림 현상이 심화된 것이다.
지환을 포함해 사회문화파트를 맡은 5명의 모둠원들은 김광석거리를 둘러싼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이해하고 그 해결점을 찾고자 중구청 담당 공무원, 경북대 교수, 방천시장 상인 등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중구청 공무원에게선 지쳐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조례 제정을 추진했으나 시의회에서 보류돼 가로막혔으니, 힘이 빠지기도 했을 거 같아요. 교수님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김광석거리에 일어난 현상이 젠트리피케이션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가진 분이셨는데, 일반적인 문헌과는 다른 시각이라 흥미로웠죠. 기존 뉴스와 자료를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건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됐고요. 시장 상인분들과의 인터뷰는 쉽지 않았어요. 사전 섭외가 어려워 무작정 찾아갔는데, 장사 준비로 바쁜 시간에 두서없이 들이닥쳐서인지 영 마음을 열지 않으시더라고요. 아쉬움으로 남는 부분이에요.”
역사파트를 맡은 민규와 정무는 근대골목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한편, 근대골목을 중심으로 대구시민의 일상 속에 자리한 일제 잔재를 조사했다.
“독도 문제나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문제를 보면서,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를 처음 방문하며 심은 일본의 대표적인 조경수 가이즈카 향나무가 달성공원에만 무려 101그루라고 해요. 이러한 일제 잔재를 조사하며 느낀 건, 우리 일상에 굉장히 광범위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었어요. 무조건 다 없애기보단 역사교육의 장으로 잘 활용하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다른 스케일의 예고편
‘길의 인문학 지도’ 프로젝트는 이제 각 파트별 보고서를 취합해 잡지를 제작하고 배포할 일만 남았다. 모둠원들이 일찌감치 마음속에 품은 잡지 시안은 <KTX 매거진>. 청자발 면접과 O.T 참석차 대구와 서울을 오가던 길에, 열차 안에 비치된 폼 나는 여행 잡지를 보며 키운 꿈이다. 올 컬러로 100부를 제작해 지역아동센터에 배포할 계획이다.
지난 활동과정을 돌아보면 빽빽한 학사일정과 학원 스케줄 속에 짬을 마련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탐방과 답사, 인터뷰 일정이 모두 여름방학으로 집중된 것은 그 때문. 유례없는 폭염에 달구어졌던 2016년 여름, 불가마를 방불케 하는 대구의 열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근대골목을 누빈 기억은 고등학교 시절의 가장 뜨거운 추억이 됐다.
“청년들이 정의를 외치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사실, 사회문제나 정치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회 정의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젠트리피케이션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이야기 되는 것도 결국은 성숙한 시민의식이었어요. 주민협의체를 구성하고 임대인과 임차인끼리 갈등을 해소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더라고요. 당사자가 아니라 해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관심을 갖고 힘을 보태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게 됐어요.”
‘네가 이걸 해서 뭐할 건데? 뭘 바꿀 수 있는데?’ 하는 부정적인 반응과 부딪칠 때도 있었다. 더러 힘이 빠지기도 했지만 알면 알수록, 그리고 고민이 커질수록 꼬로꼬로 프로젝트에 대한 자긍심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꼬로꼬로 활동과 관련해 친구로부터 ‘너 혼자 딴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는 지환. 예찬이 옆구리를 툭 친다.
“살짝 으쓱함도 들지 않든?”
그 기분을 안다는 듯 모두 웃었다. 당장 바뀌지 않는다 해도 문제제기를 멈출 순 없다는 것을, 아이들은 이미 알아버렸다. 진실에 다가서는 용기도, 선하고 정의로운 의지도 ‘꾸준함’을 축 삼아 지탱된다는 것을.
마지막 질문 삼아 ‘나에게 청자발은 oo이다’에 넣을 만한 의미 매김을 청하자, 지환은 한참 생각 끝에 [예고편]이란 단어를 넣었다. 이 모든 활동이 앞으로 만나게 될 사람과 사건과 사회에 대한, 그 속의 고민과 갈등, 내 자세와 대처에 대한 예고편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본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흥미진진한 예고편에,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글 고우정ㅣ사진 현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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