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나리오] 이름으로 진행되는 여러 사업 중에서 유일하게 활동가 개인을 지원하는 사업이 있습니다. 2002년부터 매년 진행하는 ‘활동가 재충전 (휴식/해외연수) 지원사업’으로 활동가 스스로 쉼과 회복을 위해 기획한 재충전의 기회를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 변화의시나리오 활동가 재충전 해외연수부문 지원사업]은 2014년에 신설되었으며 소속된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슈와 관련하여 해외 단체 또는 지역탐방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2016년에는 총 7팀 27명의 활동가가 선정되어 해외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태영철님은 금산간디학교 중학과정 교사 이은혜, 이은숙, 안영신, 홍진아, 김을순, 이지연, 장윤호, 이형근, 임병덕님과 함께 영국 최초의 전환마을(Transition Town) 토트네스(TOTNES)를 방문했습니다. 이번 탐방은 금산간디학교 중학과정이 ‘전환학교’를 선언하면서 계획되었다고 하는데요, 토트네스라는 ‘전환의 숲’에서 ‘희망’이라는 휴식을 보내고 온 이야기를 전합니다. |
왜 전환마을인가?
2016년 9월의 마지막 날, 대표적인 전환마을(Transition Town)로 손꼽히는 아일랜드의 ‘킨세일(Kinsale)’과 영국의 ‘토트네스(Totnes)’를 방문했다. 이번 탐방은 올해 초, 금산간디학교 중학과정이 ‘전환학교’를 선언하면서 계획되었다. ‘전환학교’를 선언하게 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첫째는 학교의 특성화와 지속가능성이 그것이었다. 몇 년 전부터 ‘금산간디 시즌2’라는 표현으로 학교를 새롭게 변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간디학교의 ‘사랑과 자발성’이라는 교육철학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피크오일과 기후변화를 위한 대안으로서 전환마을을 선언한 토트네스였다. 이 마을을 보면서 먼저 떠올랐던 것은 마하트마 간디 선생이 말하던 ‘마을공화국’이었다. 인도에 70만 개의 자립적이고 자치적 마을이 생긴다면 인도는 영원히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간디 선생의 제안 말이다. 토트네스가 바로 간디 선생의 비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마을이 아닐까 싶었다. 간디학교의 교사로서 그의 비전이 실현되고 있는 마을을 직접 탐방해보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소망일 것이다. 인류의 ‘오래된 문화’이자 ‘오래된 미래’가 될지도 모를 ‘전환마을’에서 학교의 새로운 비전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이번 탐방을 더욱 설레게 했다.
전환마을 킨세일, ‘작은 것이 아름답다’
첫 방문지, 킨세일! 아일랜드 남부의 관광과 어업이 어우러진 소도시이다. 주변 경관과 도시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이 작고 아름다운 도시를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전환마을’과 관련된 매력들이었다.
우선 이 작은 마을에는 유난히 젊은 청년들이 많았다. 작지만 특화된 킨세일 칼리지Kinsale College가 있어서 젊은이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학과가 퍼머컬처라고 한다. 퍼머컬처를 배우기 위해 유럽 전역에서 킨세일을 찾는 청년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청년들이 거리 곳곳을 활보하면서 힘과 에너지를 불어넣는 소도시! 금산에 청년들이 만든 별에별꼴, 들락날락, 아랑곳이 미래에 이런 시민대학으로 발전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어보았다.
이 마을의 두 번째 매력은,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알고 실천하는 마을이라는 것에 있었다. 킨세일에는 EU와 아일랜드가 준 상장Tidy Town Award이 유난히 많았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 같았다. 공공건물은 물론이고 작은 가게들과 골목길조차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길가의 화분 하나까지도 전체와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고려한 배치로 보여졌다. (사진) 어쩌면 전환마을이라는 것이 관념적이고 가치지향적인 것이라기보다 삶의 작은 실천으로부터 시작된 운동임을 짐작하게 했다.
킨세일의 세 번째 매력은, 작지만 소박한 희망의 마을이었다. 세계 최초로 전환마을을 선언했던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 마을 언덕을 넘어 후미진 과수원에 올랐다. 풀들이 우북한 조그만 과수원, 그 한쪽에 소박하게 자리 잡은 나무벤치. 여기서 롭 홉킨스와 몇몇 농부들은 작지만 재밌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우리, 킨세일을 전환마을이라 불러보는 것이 어떨까? 이제 곧 석유도 동나고 기후변화의 문제도 닥칠 텐데, 이런 문제들을 함께 풀어갈 마을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작은 의자에 엉덩이를 맞대고 앉아서 이런 엉뚱한 상상력을 나누었던 것이 실현되어 오늘날 세계적인 전환마을이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변화가 어쩌면 이런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희망도, 혁명도, 운동도 결국은 작은 상상력으로부터 시작했다. 킨세일은 아무리 봐도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경구가 딱 맞아 떨어지는 마을이었다.
토트네스, 외적전환에서 내적전환으로!
지금 세계적으로 49개국에서 전환마을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29개국에 전환마을을 연결하는 허브가 생겨났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이 바로 토트네스이다. 토트네스 하면 ‘피크오일’, ‘기후변화’, ‘에너지자립마을’, ‘지역화폐’, ‘퍼머컬쳐’, ‘공공텃밭’ 등이 떠오른다. 하지만 토트네스 탐방을 하면서 가장 뜨거웠던 주제는 ‘내적전환’(Inner Transition)이라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사전에 탐방 준비를 할 때는 토트네스에 대한 어떤 자료에서도 ‘내적전환’이라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현지에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일종의 막막함이 우선했다. ‘내적전환’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이 말의 의미가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에너지자립주택, 지역화폐, 로컬푸드, 퍼머컬쳐 등등 눈으로 보이는 외적전환과 더불어 구성원들 각자의 내면의 전환도 함께 중요하다는 의미에서의 내적전환! 외적전환과 내적전환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진정한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관점으로 받아들여지자, 토트네스가 새롭게 보였다. 단순한 마을운동이 아닌 인류 문명의 근원적 전환 운동으로서의 가능성도 엿볼 수 있었다. 한 예로 토트네스의 공공텃밭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마을에서 놀고 있는 땅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공공텃밭으로 만들어가는 프로젝트인데 빈 공간과 사람들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이면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이를 더 확장하면 전환마을과 마을의 연결이 곧 지구적 전환마을인 것이다. 에너지, 경제, 기후변화, 음식을 통해 사람들을 소통하고 연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 문제가 지구의 문제와 연결되고 한 사람의 희망이 지구의 희망과도 연결된다는 세계관이다. 문명의 전환도 이와 같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멀리 유럽까지 찾아가며 우리가 걸었던 기대는 토트네스의 전환기술을 배우고 벤치마킹해서 교육에 접목하자는 취지였다. 에너지자립, 퍼머컬쳐, 공공텃밭, 지역화폐, 로컬푸드 같은 기술들 말이다. 하지만 토트네스는 이러한 외적전환에는 내적전환 역시 등가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었다. 이것은 교육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대안교육은 어떤 면에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었을까? 우리끼리 잘하고 있다고 우쭐해하면서 그 안에 갇혀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비슷한 색깔을 가진 사람들끼리,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만 연대하려고 했던 단절적 교육운동은 아니었을까? 전환마을에서 전환은 ‘단절’에서 ‘연결’로의 전환이었고, ‘끼리끼리’에서 ‘함께’로의 전환이었다. 나와의 연결, 사람들과의 연결, 세상과의 연결, 에너지문제와의 연결, 기후문제와의 연결…. 이것이 전환마을 토트네스가 던진 화두였다.
슈마허 칼리지의 비결, ‘먹고 만나고 연결하라’
토트네스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슈마허 칼리지를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으로 잘 알려진 환경운동가 사티쉬쿠마르 선생과 얘기 나누는 자리가 예정되어 있어서 들뜬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직접 만난 사티쉬쿠마르 선생은 지긋한 연세에도 ‘활력’ 그 자체였다. ‘선생의 사전에 은퇴는 없을 것이다’고 하던 안내자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학교 이름이 ‘간디’라는 말을 듣자마자, 마하트마 간디의 교육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셨다. ‘간디’ 교육의 핵심은 봉사와 헌신이며,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이 곧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에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 삶에 유용한 기술을 익히는 것, 그리고 자신과 이웃과 자연을 돌보고 존중하는 것. 특히 셋째에 관해서는 설명을 덧붙이셨다. 간디교육의 핵심 가치라고 해야 할 소중한 내용이었다. 어떠한 교육과정이든, 생활이든, 관계이든 이 세 가지의 가치가 온전히 녹아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고, 사람들(상대)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자연과 환경과 공생하고 도움을 주는 이 세 가지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단순 명쾌한가!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사티쉬 쿠마르 선생은 걸림이 없어 보였다. 내면으로 향하는 길과 외면으로 향하는 길이 다르지 않다. 삶이 곧 교육이고 교육이 곧 삶이다. 즉, 내면의 깨달음이 곧 사회적 깨달음임을 설파하신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인 것은 음식의 중요성이었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티쉬 쿠마르 선생은 단호히 ‘식당’이라고 하신다. 학생들이 식사시간을 기다리고 식사를 즐길 수 있어야 하며 식사 준비를 할 때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고, 먹는 것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교육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쩌면 교육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가장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은 ‘먹는 것’이다. 단순히 욕구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교육과정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가장 근원적인 교육의 한 부분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말씀으로 새겨들었다.
이 원칙은 나중에 토트네스가 전환마을로 성장할 때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토트네스 최초의 모임이 시작된 곳도 바로 동네 방앗간이자 빵집이었다. 사티쉬 쿠마르 선생의 제안으로 빵을 함께 만들고 먹으면서부터 마을의 모임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그 다음 프로젝트들의 발화점이 되었다. 선생께서 설립하셨고 간디학교 초창기의 모델이 되었던 하트랜드도 ‘도서관’과 ‘식당’을 중심으로 하는 학교였다. 이 가치는 여전히 슈마허 칼리지와 토트네스에서도 유효하다. 금산간디학교에서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미래를 여는 또 하나의 대안, ‘전환교육’
열흘에 걸친 전환마을 탐방을 마치고 귀국한 후 한동안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학교와 대안교육 전반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대안교육이 위기라는 말은 진작부터 있었다. 그때마다 ‘민주주의는 항상 위기다’는 말처럼, 대안교육도 항상 위기일 수밖에 없고 그 위기를 극복하면서 내공을 길러왔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방어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측면의 세 가지 위기감이 감지된다. 그것도 ‘초’스피드로 다가오는 위기감 말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은, 문명사적인 위기의 가속화이다. 기후변화, 피크오일, 핵이나 테러, 환경에 따른 안전문제는 인류의 존립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 고민하게 한다. 그 어떤 정책과 시스템도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고민이다. 이러한 문명사적 위기는 교육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학교라는 체제가 시스템의 균열을 넘어 해체 수순으로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오래된 예측이었다.
둘째, 사회적 위기의 가속화이다. 자본주의적 세계관은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기업으로 만들어 버렸다. ‘돈’ 이외에는 그 어떤 담론도 끼어들지 못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빈부격차와 가족해체의 가속화로 이어졌고 드디어는 교육 해체의 가속화로 드러났다. 모든 것이 돈과 자본의 관점으로 치환되어 버린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우리의 삶은 자본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다. 시장이 개입한 지 오래인 교육 역시 좀비 자본주의 교육으로 바뀌고 있다.
셋째, 존재론적 위기의 가속화이다. 자본주의의와 가족해체의 가속화, 사회적 안정망의 해체로 인해 청소년들은 더욱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할 정서발달과 사회성발달은 더디기만 하고, 새로운 장애와 온갖 증후군을 앓는 학생들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이미 이 사회에는 휴대폰과 게임에 중독되고, 입시교육의 패배자로 낙인찍히고, 학교폭력과 왕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이도저도 아닌 무중력과 무기력으로 정신 줄을 놓은 채 겨우 생존하기 일보 직전의 학생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위기의 가속화는 교육 불가능의 시대로 이어지고 있다. 20년 전, 희망에 차서 대안교육의 깃발을 꽂을 때와는 사뭇 다른 양상들이다. 몇 해 전부터 대안교육의 쇄신을 바라며 ‘대안교육 2.0’이라는 담론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도 같은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혹은 상상력은 무엇일까?
킨세일과 토트네스에서 얻은 통찰을 바탕으로 세 가지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전환교육의 관점에서 제안하고 싶다.
우선, 문명사적 전환을 위한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다. 문명의 위기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이를 풀어갈 수 있는 생태적 감수성, 전환적 사고, 기술 습득이 가능한 대안적 환경을 구축하는 교육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에너지 자립과 의식주 자립기술 습득 등에 관한 교육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학교의 건물과 환경 자체를 전환기술로 바꾸는 교육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회적 전환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지구독점기업의 폐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찾아내고 직접 실험하고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이다. 자본의 축적만을 위한 사회가 아니라 삶을 나누고 공유하는 공동체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전환마을이 바로 사회적 전환을 위한 핵심 모델이 될 수 있다.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화폐, 마을축제, 마을카페, 마을가게 등의 다양한 생산 활동은 물론이고 동아리모임과 학습모임, 자조모임, 쉐어하우스(공유하는 집) 등의 다양한 사적 모임까지 실험하고 도전할 수 있는 교육 현장이 필요하다.
물론, 학교를 물리적 공간으로 한정 짓지 않고 마을과 지역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정신적인 공간도 확장해가는 시도도 필요할 것이다. 마을을 통해 인적․물적 만남을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에서 배움을 얻어 미래를 희망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마을과 학교가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고, 학생들은 마을을 교육과 삶의 터전으로 여길 수 있는 교육을 시도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존재적 전환을 위한 교육이다. 파괴되고 해체된 사회와 가정의 영향으로 ‘3무(무기력, 무감각, 무의미)세대’로 전락한 청소년들이 자발적․주체적 개인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시민으로의 자발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키우고, 인문․철학적 사고를 통해 세계관의 전환을 촉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은 개인의 영적 감수성과 사회적 감수성의 조화를 통해 존재적 의미와 가치를 성숙시키는 근원적 교육이기도 하다.
이 세 가지를 전환마을의 관점에서 본다면 문명사적 전환과 사회적 전환은 ‘외적 전환’으로, 존재적 전환은 ‘내적 전환’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적 전환과 외적 전환은 각각 다른 차원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것이다. 이 셋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연결의 주체가 다름 아닌 깨어난 한 개인일 것이다.
간디 선생은 “한 존재가 깨어나면 세상이 깨어난다”고 했다. 전환마을 운동의 핵심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마을이고, 사람과 자연이 만나는 마을이며, 사람과 세상이 만나는 마을이다. 따라서 외적인 전환에만 매몰되어 존재를 놓치거나 내적 전환에만 매몰되어 세상을 등지지 않는 조화로운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내적전환과 외적전환의 조화를 교육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심각하게 던져야 한다. 그리고 문명사적․사회적 전환을 시도하면서도 존재적 전환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학교들과 교육주체들이 적극적으로 만나고 연결되어야한다. 올해 시작된 ‘전환교육모임’이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전환을 고민하는 학교나 교육주체 모두에게 열린 모임이며 이를 통해 전환교육에 대한 논의를 심화 확장할 것이다.
아울러 ‘지역․사회․세상과 적극적으로 공감․소통․연결하기 위해 위기의 대안교육은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대안교육 스스로도 심각하게 던져야한다. 도전과 변화를 두려워하는 교사회! ‘대안’이라는 자기 틀 속에 갇혀버린 폐쇄적 대안들! 마을과 지역사회 속에서 섬처럼 존재하는 단절된 대안학교들! 이제 대안교육도 전환의 시기를 맞이했다. 닫힌 ‘대안’에서 열린 ‘대안’으로의 전환, ‘대안’ 안에서 ‘대안’ 밖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학교 패러다임을 깨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학생들을 학교 안에 가두기보다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연결하도록 촉진하는 역할(Connectator)을 통해 학생들이 청소년 시민으로 혹은 자립마을공화국의 마을시민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새로운 대안교육, 즉 전환교육의 모습일 것이다.
글ㅣ사진 태영철 (금산간디중학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