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변시 이야기-프로젝트 B]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 B는 1년 이내의 단체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1년간의 사업으로 당장의 효과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각 단체별로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방식의 사업들을 전개해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사업들입니다. 2013년 변화의 시나리오 – 프로젝트 B에서는 총 10개의 단체가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3년 수행한 사업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독립다큐멘터리를 제작하던 제작사들이 ‘여성주의’를 맥락으로 한 데 모여 만든 [여성주의 영화제작소 야] 에서 진행한 첫 프로젝트의 주제는 ‘낙태’였습니다.

낙태는 개인이 겪는 일이지만, 낙태 담론은 정책이나 법, 연구 등 사회적 맥락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많은 경우, 낙태가 여성 개인의 죄 처럼 여겨지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런 식의 낙태가 범죄화 되는 흐름 속에서, 심지어는 개인의 목소리가 빠져있는 담론과 고민은, 여성에게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근본적인 대안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

극영화와 다큐의 결합이라는 영화적 형식의 참신함에서 역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동안 ‘낙태’를 말할 때 찬반으로 이야기 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는 지점이 잘 표현된 것, 이것들을 관객이 느꼈다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표는 달성했다고 보여집니다.

(아, 저도 영화를 보고서야 ‘낙태’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깨달은 관객 중 한 사람입니다.. 아 너무 좋았어요)

※ 공동체 상영으로 이 변화의 시나리오를 함께 완성해주실 분들을 기다립니다. 
   공동체 상영 신청과 문의 : 이메일 letsdance2013@gmail.com, 홈페이지 letsdance2013.tistory.com


 

있지만 없는 이야기, 낙태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영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기획 상영회가 잡혀있다는 것은 부담일까? 행운일까? 극장을 가진 대기업들이 만든 영화가 극장의 시간표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현실에서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는 장르인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에게 그것은 단연코 행운이다. 거기다 어쩐지 고통의 이야기가 넘쳐나 관객들이 쉽게 보려하지 않을 것 같은 ‘낙태’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은 우리들에겐 더욱 소중한 기회이다.

여성주의 영화제작소 ‘야’는 아름다운재단에서 ‘변화의 시나리오’를 통해 영화의 후반 작업과정과 영화를 완성한 후 전국 5회의 기획 상영회, 시사회와 포럼을 하는 것을 지원받았다. 아직은 영화의 생김새가 불투명하던 2013년 2월, 재단에서 함께 선정된 분들과 오리엔테이션을 하며 우리 사업을 소개했을 때만 해도 사실은 조금 불안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촬영을 했지만, ‘우리가 지금 발표 하는 대로 의미 있는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우리 팀은 험난한 후반제작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최고의 PT상까지 받으며 격려를 받게 되자 더욱 부담이 커졌다. 그 이후부턴 어떤 어려움이 있든 간에 잘 완성하는 것 말고는 피할 길이 없다며 팀원 모두가 열심히 후반제작에 임했다. 동시에 아직 나오지도 않은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한국여성민우회를 찾아가 시사회와 포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하고, 한 두 번 인연을 맺은 적 있었던 각 지역의 여성단체들과 상영단체들에게도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낙태’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고, 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인지 많은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공동주최에 응해주셨고, 영화도 고통스러운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본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드디어 영화의 최종 편집본이 나왔고 기획 상영회의 이름도 ‘이토록 다양한 낙태이야기’로 정했다. 깔끔한 홍보물도 나왔다. 첫 상영회 날짜도 가까워지고 있었다. 보통 영화를 만들고 나면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선을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기획 상영회를 통해 관객을 처음 만나는 것이기에 준비를 하면서도 콩닥콩닥 마음이 떨렸다.

드디어 이른바 비공식 월드프리미어 상영! 2013년 9월 27일에 서울의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열린 첫 상영회는 ‘임신출산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 활동가들과 함께 했다. 누구? 바로 활동가들!

우리가 ‘낙태’를 주제로 작업을 할 때 여러모로 정보를 얻기도 하고 관점을 빌리기도 했던, 그리고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여성의 ‘낙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 말이다. 어떻게 봐주실까? (두근두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낙태를 주제로 논문을 쓰셨던 지승경님과 조세영 감독, 그리고 작은 극장을 가득 채워주신 관객들이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낙태’한 여자들의 고통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보다보니 자기 이야기라서 눈물이 났다는 관객, 어떤 장면에서는 ‘낙태’에 대한 공포가 더 심해지는 것 같다는 관객, 딸이랑 같이 봤는데 참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관객 등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영화를 좋아해주셔서 감사하기도 했지만, 지난 2년 반 동안의 노력이 바로 이런 순간, 그동안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아왔던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마이크를 잡고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는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구나 싶어 감격스러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를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새삼 느끼게 해준 상영회들이 이후로도 이어졌다.

10월 2일은 인천여성영화제 건물의 드넓은 옥상에서 갓 삶아진 고구마와 따뜻한 뱅쇼, 열정적인 관객들이 모여 영화를 보았다. 초대하지 않은 추위와 강풍이 찾아오는 바람에 스크린이 펄럭여 당황했다. 하지만 추위로 오들오들 떨면서도 영화를 끝까지 봐준 관객들과의 뜨거운 대화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10월 4일엔 제작팀 모두 광주에 갔다. 극장 입구에서 ‘낙태’에 관한 홍보물을 설치하고, 찾아오는 관객들과 소통하려는 광주여성민우회와 광주인권영화제의 세심한 준비에 감탄했었다. 10월 24일 부산 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는 미디토리의 젊은 활동가들과 함께 부산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보다 더 센 이야기를 나눠주시는 관객들 덕분에 대화가 풍성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지역상영회는 10월 30일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 재미에서 열렸다. 원광대학교 총여학생회와 센터에서 공동주최를 해주셨는데, 손수 끓여주신 육개장부터 높은 집중도를 보여주신 대화시간과 엠티 온 것 같은 뒤풀이 자리까지 제작팀에게는 모든 것이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닌 기획 상영회는 임신출산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 활동가 몽,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나영, 전남대 사회과학 연구소 김경례 박사님께서 이야기 손님으로 함께 해주셨다.

11월 4일엔 그간의 기획 상영회의 이야기를 모아 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포럼과 시사회를 진행하였다. 사전에 신청을 받았는데 그간 기획 상영회 하면서 소문낸 덕분인지, DMZ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덕분인지 일찌감치 신청이 마감되었다. 좌석을 구할 수 없냐는 문의 전화가 계속 이어져 담당자였던 가람은 발을 동동 구르며 한 자리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당일 참석이 가능한 지 확인하기 위해 신청자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돌리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 행복했던 동동거림! 인디스페이스 극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출연자와 감독, 김영옥 선생님(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의 나영님과 함께 영화와 한국사회의 ‘낙태’에 대해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사실 영화를 완성하는 것과 동시에 기획 상영회와 포럼을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실무를 진행하느라 바쁘고 힘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글을 적으면서 그간의 시간들을 죽 돌이켜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기꺼이 공동주최를 하기로 하고 참여할 단체를 섭외하는 것부터 홍보하고 뒤풀이 자리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셨던 각 지역의 활동가분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이다. 마이크를 잡고 쑥스럽게 혹은 불만에 가득차서 혹은 눈물이 가득차서 이야기를 나눠주셨던 관객들의 얼굴이 떠올라서이다. 그날의 상영관 공기가 새삼 느껴져서이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섰던 용기 있는 출연자들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서이다. 무엇보다 긴 시간, 부딪히고 상처받으면서도 끝까지 영화를 완성해낸 동료들이 떠올라서이다.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남았을까? 영화는 이미 완성되었지만, 이번 기획 상영회와 포럼을 통해 상영과 배급에 관한 또 다른 변화의 시나리오가 쓰여 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자,이제댄스타임]의 상영과 배급을 통해 ‘낙태’가 여성 개인이 책임지는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할 사회적 문제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의 문제로 여겨지는 변화가 생기길 기대한다.

 글·그림 제공 | 여성주의 영화제작소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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