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리(16세), 배준영(16세), 김보경(17세), 하헌석(17세), 류하안(17세), 이정민(18세). 이상 6명은 열일곱인생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열일곱인생학교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1년 동안 정규 교육과정을 벗어나 자신의 삶과 꿈을 탐색해보는 단기 대안학교다. 스스로 선택한 ‘십대의 안식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아이들은 제각각, 혹은 협업을 통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자발적 여행도 그 흥미로운 모의 중 하나로 시작됐다.
“여행지에 어울리는 노래로 버스킹을 할까?”
“버스킹 하는 모습을 찍어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건 어때?”
멤버들 모두가 좋아했던 ‘음악’이란 코드는 버스킹과 뮤직비디오로 발전했고, ‘여수 밤바다’가 이끌어낸 여수처럼, 종내 잡히지 않던 낯선 도시들을 호출해냈다. 6월의 고성, 7월의 여수, 8월의 영월, 9월의 부산. 노래가 낸 길을 따라 초여름부터 늦여름까지, 총 네 번의 ‘길 위에서 음악 찾기’ 여행을 떠났다. 모든 날이 좋을 순 없었다. 비가 내려 아쉽고, 지갑을 잃어 당황하고, 마음이 어긋나는 순간들이 툭툭 치받쳤지만,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만회할 만큼 아름다운 시간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했다. 그런 기억이 또 다른 노래를 길잡이 삼아 다음 여행을 떠나도록 부추겼다.
기(起): 6월의 고성+‘선물할게’
비를 몰고 다닌 강원도 고성에선 여행 첫날 천둥번개까지 치는 바람에,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접어야 했다. 숙소에서 바비큐 파티라도 즐기자 했으나, 숯불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희망의 삼겹살마저 다 태워먹었다. 불운이 겹친 첫 여행에 그래도 위로가 되어준 건 바다였다.
밤에 비가 잦아들어 숙소 근처 초도해변을 산책했어요. 시원한 바람과 잔잔한 파도소리, 맨발에 닿는 고운 모래의 감촉. 밤바다는 시각보다 청각과 촉각이 즐겁더라고요. 비를 몰고 다니다 여행이 끝날 것 같은 불안도, 실패한 바비큐 파티의 아쉬움도 씻어낼 수 있었어요.” (한유리)
이튿날은 다행히 비가 그쳐 일찌감치 화진포해수욕장으로 향했다. 깨끗한 백사장, 초록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투명한 바다는 첫 여행의 설렘을 담아내고자 했던 뮤직비디오에 잘 어울렸다. 6월의 노래는 옥상달빛의 ‘선물할게’. 헌석(기타)과 하안(멜로디언)의 연주에 유리의 상냥한 보컬이 어우러졌다. 촬영감독은 준영. 보경은 스틸 컷을 찍었다.
버스킹 하는 모습을 찍어 뮤비에 넣겠다는 계획이었는데, 여기서 함정은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거예요. 바닷가엔 오직 우리만 있어, 거리공연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죠. 덕분에 주변상황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연주하고 노래하고 촬영할 수 있었어요.” (배준영)
1박 2일의 짧은 여행은 고성행의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던 보랏빛 꽃대궐, 하늬 라벤더팜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친구와 헤어지듯 아쉬운 여정이었지만, 초여름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부른 노래는 선물 같은 추억으로 남았다.
승(承): 7월의 여수+‘빗속으로’
여수역에 내리자 바다 냄새가 훅 덮쳐왔다. 과연 ‘여수 밤바다’로 각인된 도시답다 생각했지만, 7월의 노래는 이미 그 곡이 아니었다. ‘여수 밤바다’는 여수행을 이끌어낸 결정적 동기였으나, 노래를 바꿀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첫째, 고성에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휴대폰 카메라로는 밤바다를 담아내기 힘들다는 것. 둘째, 보컬을 맡은 정민의 컨디션이 좋지 못해, 부르기 어려운 노래는 피하고 싶다는 것. 셋째, 장마전선을 감안, ‘비’가 들어간 노래를 부르자는 것. 그래서 고른 곡이 ‘빗속으로’였다(이 역시 ‘여수 밤바다’를 부른 장범준의 노래다).
해안가를 달리는 레일바이크 위에서 버스킹 영상을 찍었다. 보경(멜로디언)과 정민(기타, 보컬), 준영(촬영)과 정승훈 선생님이 4인승을 함께 타고, 유리와 헌석이 2인승을 탔다.
승훈 쌤과 준영이가 앞에 앉아 페달을 밟고, 저와 정민이는 뒤에 앉아 연주와 노래를 했어요. 사실 준영이도 몸을 돌려 저희들을 촬영하느라 바빠, 쌤 혼자 열심히 페달을 밟으셨죠. 엄청 힘드셨을 거예요. 옆 철로를 달리는 사람들이 박수도 쳐주고 호응해 준 덕분에 기분이 좋았어요.” (김보경)
레일바이크 옆 만성리검은모래해변은 ‘여수 밤바다’란 노래를 탄생시킨 해변으로 알려진 만큼, 장범준의 노래로 버스킹을 준비한 아이들에겐 필수 코스였다. 바다를 뒤로 하고 해변에 앉아 기타와 멜로디언을 꺼내든 보경과 정민 옆에 유리도 투입됐다. 준비해온 악기는 따로 없었지만, 빈 생수병에 모래와 자갈을 담아 급조한 마라카스를 흔들었다. 여수 앞바다의 모래와 자갈은 라틴아메리카풍 타악기의 재료로 손색이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버스킹과 영상 촬영을 이어갔다. 차창 너머 흘러가는 풍경을 배경 삼은 열차카페 안 공연은, 레일바이크와 해변 버스킹 장면에도 조화로이 어울릴 것 같았다. 관객의 호응이 없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연주-노래-촬영 모두 원활하게 진행됐다. 계획대로 되지 않은 것은 딱 하나, 호우주의보를 배반한 날씨 뿐. 노래는 빗속으로 점점 젖어 들어가는데, 여수를 떠날 때 까지 비는 한 줄기도 내리지 않았다.
전(轉): 8월의 영월+‘바람이 불어오는 곳’
전날까지 퍼붓던 비가 그치고 모처럼 맑게 갠 하늘에, 출발부터 산뜻했다. 차를 가지고 가는 여행의 좋은 점은 이동 중에 자유로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 영월로 가는 길 내내, 유리는 노래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8월의 노래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란 곡이었는데, 가사를 외우기가 진짜 힘들었어요. 반복되는 멜로디 속에 가사가 4절까지 있거든요. 영월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노래만 불렀어요.” (한유리)
뮤직비디오 영월 편의 첫 로케이션 장소는 법흥계곡. 6~7월 내내 바다만 가다가 산골짜기로 드는 기분이 색달랐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아래로~” 열심히 연습했던 유리의 노래는 세찬 계곡 물소리에 싹 묻혔지만, 유리를 애먹인 노랫말은 계곡 풍경과 조화로웠다.
노을 질 무렵, 평창강 끝머리에 자리 잡은 선암마을을 찾았다. 구불구불 흐르는 평창강은 강변마을 곳곳을 휘감고 도는데, 이러한 물돌이 지형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일명 ‘선암마을 한반도지형’이라 불리는 명승지로, 선암마을 뒷산에서 조망할 수 있다. 30분 남짓 마을 뒷산을 올라 만난 풍경은 과연 영월의 명소다웠다.
나뭇잎 사이로 빛나는 하늘, 적당히 눈부신 햇살…. 전망대로 이어지는 숲길부터 좋았어요. 노을이 예쁘게 물들고 있는 와중에 만난 한반도지형은 정말 아름다웠어요. 제가 본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장면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더라고요.” (이정민)
둘째 날엔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를 가고자 했으나 나루터에서 발길을 돌려 나왔다. 그제까지 내린 비에 물이 불어, 나룻배 운항이 중단된 까닭. 배를 타면 1분 안에 닿을 코앞의 작은 섬을 아쉬워하며 붕 떠버린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가, 인근 수변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유리와 보경이 넘어지고, 준영의 삼각대가 부러지는 등 몇 가지 불운이 겹쳤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 버스킹과 뮤직비디오 촬영을 이어갔다. 첩첩산중 영월엔 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종종 불었고, 바람이 불어오는 모든 곳이 무대가 됐다.
결(結): 9월의 부산+‘떠나요 열일곱’
수원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꼬박 5시간을 달려 부산에 도착했다. 초가을보단 늦여름이 더 기세를 떨치는 9월 하순. 남쪽 도시 부산은 후덥지근했다. 부산 시티투어의 빼놓을 수 없는 코스인 국제시장과 깡통시장, 버스킹 촬영지로 찜해둔 송정해수욕장까지, 가보고 싶은 곳과 가야할 곳이 여느 때보다 빽빽했다. 부산에선 유독 준영이가 주인공이 된 해프닝이 많았다. ‘길 위에서 깡통과자 찾기’, ‘길 위에서 지갑 찾기’ 사건이 그것.
“깡통과자 파는 곳이 어디에요?” 하고 물어볼 때마다 시장 상인들이 가르쳐주는 ‘저기, 저쪽’을 따라가 보면, 어김없이 수입과자 파는 가게가 나왔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준영의 어머니가 찾아보라 했던 깡통과자는 없었다. 존재 유무를 알 수 없는 과자를 찾아 깡통시장을 두세 바퀴 쯤 도느라, 시장구경은 톡톡히 했다.
“엄마도 정확한 이름은 모르고, 깡통 안에 각종 사탕과 과자가 들어있어 ‘깡통과자’라 불렀대요. 엄마 어릴 때 외할아버지께서 깡통시장에 파는 그 과자를 종종 사주셨다는데, 정말 맛있었다고, 저도 꼭 먹어봤음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어떤 과자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엄마가 그리워하는 과자를 선물하고 싶기도 해서 물어물어 찾아다녔는데, 어디에도 없었어요.” (배준영)
준영이 지갑을 분실한 사실을 알게 된 건, 송정해수욕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던 찰나였다. 지하도 바닥에 주저앉아 가방과 옷을 샅샅이 뒤졌건만 지갑의 행방은 묘연했다. 용돈과 교통카드, 게다가 팀 회비까지 들어있는 지갑이었다. 멘붕에 빠진 준영, 그런 준영을 위로하는 유리, 왔던 길을 차분히 되짚어보는 보경. 준영이 가방을 열거나 오래 머물렀던 공간은 게스트하우스와 국제시장 통닭집, 영도대교 세 곳으로 압축됐다. 세 사람이 각자 한군데씩 맡아 찾아보기로 하고 흩어진지 30분 뒤. 게스트하우스를 맡은 보경이 지갑을 찾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지갑은 준영이 사용했던 침대 틈에 떨어져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도 미처 발견 못한 분실의 사각지대에서 지갑을 찾아낸 ‘매의 눈’ 보경 덕분에, 자칫 비극이 될 뻔했던 지갑 분실 사건은 가벼운 해프닝으로 마무리됐다.
해넘이에 찾은 송정해수욕장은 ‘길 위에서 음악 찾기’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아늑한 해변엔 서핑과 산책, 낮잠 등 각자의 방식으로 바다와 소통하는 사람들이 띄엄띄엄 공존했다. 바람은 시원하고, 넘어가는 햇살은 포근했다. 바다는 푸르고, 종일 볕에 데워진 은빛 모래는 따뜻했다. 이전 여행에선 운전대만 잡았던 담임선생님이 연주자로 전격 발탁돼 우쿨렐레를 잡았다. 보컬엔 유리, 영상 및 스틸 촬영은 준영과 보경이 각각 담당했다.
고심 끝에 고른 9월의 노래는 ‘제주도의 푸른 밤’. 제주도가 주인공인 원곡을 그대로 부르자니 부산에 미안해, 가사는 바꿔 불렀다. 부산행 기차 안에서 개사 작업을 마치고 ‘떠나요 열일곱’이라 제목까지 바꿔 단 9월의 노래는, 부산의 푸른 낮과 밤은 물론, 6월의 고성과 7월의 여수, 8월의 영월까지, 기-승-전-여름의 추억을 되감아냈다.
네 번의 여행이 각각 다른 빛깔이었어요. 고성을 생각하면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바다가 떠올라요. 바다의 도시인데도 여수는 짙은 주홍색이 연상되고요. 영월은 밝은 연두, 부산은 짙은 파랑색이에요.” (한유리)
떠나요 열일곱, 모든 걸 훌훌 버리고
남포동 푸른 밤, 그 별 아래
이제는 더 이상 얽매이긴 우린 싫어요
시험에 공부에 인간관계에
아파트 담벼락보다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좋아요
씨앗호떡 먹으며 밀면도 우리 함께 먹어봐요
정말로 그대가 외롭다고 느껴진다면
떠나요 남포동 푸른 밤 하늘 아래로
(최성원의 ‘제주도의 푸른 밤’을 개사한 ‘떠나요 열일곱’ 중에서)
글 고우정ㅣ사진 현일수
[길 위의 희망찾기]란? 아름다운재단이 진행하는 청소년 자발적 여행활동 지원사업 ‘길 위의 희망찾기’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아동청소년들에게 국내외 여행 프로그램을 지원함으로서 ‘청소년 스스로 만들어가는 여행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2년부터는 여행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트래블러스맵과 함께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