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지원사업’은 우리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공익활동, 특히 ‘시민참여와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공익활동’ 지원을 핵심가치로 합니다.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B 지원사업>은 시민사회단체 및 풀뿌리 단체의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하고자 합니다. |
서울역사기행 – 광화문 <20春기> 중에서.
2017년 02월 18일. 스무살 학교 두 번째 만남이 이뤄진 장소는 ‘광화문’이었다. 광화문 광장은 현재 우리나라의 혼란한 내정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장소임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고자 했다.
처음에 버스에 내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주한일대사관을 향해 앉아있는 소녀상을 찾아갔다. 나는 소녀상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대변하는 상징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소녀상은 내가 상상한 것만큼 당당한 위용을 뽐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 있는 주한일대사관 건물은 한창 보수 공사 중인지 높은 철벽이 처져 있었고, 그녀의 주변에는 공사 폐기물과 기자재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우리나라 정부와 일본 정부의 태도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소녀상이 외로워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는 학생들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님에도 소녀상의 철거를 막기 위해 곁을 지키는 분들과 소녀상 발밑에 놓인 많은 꽃과 편지들이 사람들의 발자취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광화문 광장으로 향했다. 2월의 추운 날씨에도 많은 사람이 각자의 사정으로 그곳에 모여 있었다. 사드배치 반대를 외치며 파란풍선을 나누는 사람들, 예술계의 블랙리스트에 반대하는 사람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외치는 사람들, 세월호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길가에 쳐진 텐트에서 밤을 보내면서도 광화문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한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세월호 리본을 손수 만들어 나눠주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세월호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유가족들에 슬픔에 크게 공감해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직장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리본을 나눠주는 것이 자신과 자식들에게 떳떳한 행동이기에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에게도 리본을 나눠주시며 리본에 담긴 의미를 잊지 말아달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서울 시민청에서 열리는 전시회 ‘그리움을 만지다’ 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는 중이었다. 서울 시민청의 입구로 들어가려 지하로 향하는데 태극기를 손에 든 사람들이 꽤나 모여 있었다. 그랬다, 말로만 듣던 일명 ‘태극기 집회’를 첫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별 것 없었다. 그냥 나이가 적잖은 분들이고 나와는 상이한 정치적 신념을 가진 분들이라는 것. 내가 타인의 주관에 대해 옳다 그르다 단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자신만이 애국자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집에 가는 길 여기저기 버려진 그 상징이 뭐가 그리 대단할까. 나는 과거에 주변인에게 태극기 집회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탄핵의 당위를 듣게 되면 조금이라도 나의 의견에 동조해 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 치기도 태극기 사이를 가로 질러 느껴지는 아니꼬운 시선에 고이 구겨 버렸다.
가까스로 도착한 전시장 내부에서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자그마한 만찬을 나누고 있었다. 음식들의 의미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넋을 기린다는 의미임은 조금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전시된 뜨게 작품들은 하나같이 활기 넘치는 다양한 색감이었고 은은한 조명과 어우러져 따스한 느낌도 들었다. 아이들이 이름이 수놓아진 목도리들, 손바닥 만한 뜨게 수백 개가 모여 천장을 덮을 만큼 크게 엮인 작품, 전시를 준비하며 웃고 얘기하는 부모님들의 사진 등등. 근 몇 해 동안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땀 한땀 떴을 작품들을 찬찬히 보았다. 다시 한번 보았다. 그 중에서 ‘만지고 싶어’라는 문구 옆에 사람 키만큼 쌓아 놓은 방석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나도 한번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포근해 보이던 방석은 아이들을 향한 부모님들의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눈가에 붉은 기가 서려 조금 먹먹히 앉았다. 옛 부터 ‘실’은 사람의 인연을 잇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이 부모님들과 아이들의 인연을 지금도 이어주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광화문과 그 언저리에서 전에는 알지 못 했던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그 만큼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광화문 일대는 나라의 일이 이뤄지는 곳에서 우리가 서있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 곳에 모인다. 하지만 내가 거주하는 곳과 멀어, 불 꺼진 밤에만 찾아 갔던 대 여섯번이 전부였다. 광화문에서 아침 해를 맞으며 외로이 싸움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잘 몰랐다. 안산의 노란 물결이 점차 사그라들 때, 과연 나는 어떤 기분이었더라. 안산 사람들만 잊지 못하는 슬픔이 외롭다고, 여기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냐고 생각했다. 이래서는 내가 서운해 했던 불특정 다수와 같지 않은가. 나는 광화문에서 촛불로 외로움을 녹였었다. 촛불을 불어 빈 소원은 언제나 단 하나였다. 모두들 빈 소원은 단 하나였다만, 녹이고자 했던 것은 달랐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을 불안감을, 누군가는 표현의 억압을, 누군가는 사회와 역사의 부조리를.
‘무엇을 보고 듣느냐’는 사람의 인생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반대로 ‘무엇을 못 보고 못 듣느냐’도 그렇다. 나는 18살의 슬픔을 가지고 갔다가, 21살의 담담함을 가지고 왔다.
※ <20春기>는 스무살학교에 참여한 친구들이 직접 만든 에세이다. <20春기>는‘봄을 닮은 스무살들의 이야기를 만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글ㅣ사진 최도희 (스무살학교 기획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