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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법정>
지난 7월 13일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소속 양여옥 활동가가 아름다운재단에 방문했습니다. 평화로움이 가득한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 전쟁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 준비 위원회”로 약칭으로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로 불립니다. 한 단체가 아니라 한베평화재단,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아디 이렇게 4개 단체가 연대하여 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 낯선 이 단어를 접하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Q. 시민평화법정 준비위원회는 어떤일을 하는 곳인가요?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것인가요?
시민평화법정은 기존의 공식적인 법적 절차가 아니라 시민들이 만드는 민간법정으로,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일어났을 때 피해를 입은 분들이 원고가 되어 대한민국을 상대로 하는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한국사회에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문제가 알려지기 시작했던 99년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정부를 통한 공식적인 사과나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시 공론화시키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에 한국정부의 법적인 책임을 좀 더 명확히 할 수 있는 “법정”에 대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법정이라는 형식을 통해 한국의 책임을 입증할 증거 자료들을 준비·발굴하여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라크 전범 민중재판, 조선일보 반민족·반통일 행위에 대한 민간법정, 2000년에는 도쿄에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민간법정(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이 일본시민사회 주최로 열린 적이 있습니다.
Q. 일반 법정과 시민법정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시민법정은 실제 법적인 절차가 아니기 때문에 판결에 구속력은 없습니다. 공식적인 재판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시민평화법정 헌장을 통해 법정의 근거를 마련하고, 전문성과 사회적 명망을 가진 재판부를 구성하여 변론준비기일을 통해 소장과 증거제출, 증인신청 등의 절차를 거쳤습니다. 소송을 제기하는 원고측 변호인단 외에도 피고 대한민국의 변론기회를 보장하기 위해 피고측 변호인단을 구성하여 법정에서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등 실제 소송만큼이나 엄격한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일반법정과는 다르게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민법정에 방청오신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기존의 법리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알기쉬운 설명과 영상자료, PPT 등을 활용하여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Q. 베트남전쟁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한 활동을 하나요?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입니다. 한국은 1964년 9월 의료진을 중심으로 비전투요원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30만 명이 넘는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했고, 그 과정에서 1만6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시민평화법정에서 다뤄진 사건은 1968년 2월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 위치한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입니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규모는 약 80여건, 9천여명의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사건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어 가장 많은 증거가 남아있는 이 두 개 마을의 사건을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퐁니·퐁넛 마을 주민 74명, 하미 마을 주민 135명이 한국군에게 학살되었습니다. 퐁니·퐁넛 학살 생존자 응우옌 티 탄(57) 씨의 증언에 따르면 9세(한국 나이) 때 한국군이 쏜 총에 배를 맞고 창자가 튀어나온 채 가까스로 구조되었으나 역시 중상을 입고 구조된 오빠를 제외한 가족은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약 1년간 입원 치료 후 퇴원한 그는 전쟁고아 신세가 돼 식모살이를 하며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하미학살 생존자로 동명이인인 응우옌 티 탄(60)씨는 한국군의 학살로 부모님과 남동생 등 가족들을 잃었습니다. 자신도 수류탄 공격을 받아 지금까지도 왼쪽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베트남전쟁은 경제를 살리기 위한 파병으로 기억되지만, 한국군에 의해 가족과 마을을 잃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 처참한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합니다. 두 마을 모두 올해 학살 50주기가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 없이 50년이 흐른 것이죠. 더 늦기 전에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철저한 조사와 진상규명을 통한 사과가 필요합니다.
Q. 시민평화법정 판결은 어떻게 되었나요?
지난 4월 21일~22일 시민평화법정이 개최되었고,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태 변호사,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구성된 시민평화법정 재판부는 이틀에 걸친 심리 끝에 “피고인 대한민국은 원고로 참여한 두 명의 베트남 피해자에게 국가배상법이 정한 배상기준에 따른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존엄과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조치하라”며 22일 원고승소판결을 했습니다. 또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있었는지 진상조사 할 것을 권고하고, 전쟁기념관 등 베트남 참전을 홍보하는 시설에 민간인학살에 대한 내역도 함께 전시하도록 했습니다.
Q. 한편으로는 베트남 참전 용사의 억울함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를 위해 싸운 “영웅”에서, “가해자”가 되었으니까요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며 그런 항의전화를 많이 받았고, 법정에 방청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내부적으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분법 구도를 넘어서기 위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 참전군인을 가해자로 접근하게되면 전쟁이라는 폭력을 제대로 드러낼 수도, 진실을 밝혀낼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학살의 규모나 양상을 봤을때 어떤 특정한 개인의 일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합니다. 물론 명령에 의한 일이었다고 해서 수행한 개인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 참전군인들을 가해자의 자리에 놓고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폭력상황에 처해졌던 그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전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고, 좀더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시민평화법정에서는 학살을 수행한 사람을 찾아서 처벌하는 형사소송이 아닌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민사소송의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Q. 베트남 전쟁은 한국과 베트남의 전쟁이 아니라, 베트남 내전에 미국이 개입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미국이 요청한 파병이었던만큼 미국의 책임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한국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 파병을 요청한 나라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파병을 했고, 전쟁수행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에 대한 불법행위는 한국군이 져야할 책임입니다. 미국도 밀라이학살 등 민간인학살 문제가 드러나 지휘관들이 재판을 받는 등 책임논란이 있었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어려운 게릴라지역에서 한국군이 군사작전을 하도록 하는 등 미국 역시 연루되어 있지만, 시민평화법정에서는 한국정부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기 때문에 미국의 책임에 대해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Q. 이번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베트남에 시민사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여행가서는 베트남이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민간인학살과 관련된 일로 방문했을 때는 감시당하거나 추방당할지 걱정을 하며 조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한국과의 경제적인 교류에 힘을 쏟는 베트남 정부는 과거의 사건이 양국간 미래에 영향을 줄까봐 민간인학살 문제를 다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죠. 피해주민들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설득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한다는 것도 베트남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다가, 마을을 불태우던 한국군으로 한국을 기억하는 생존자들은 이런 증언을 하면 참전군인들이 본인을 죽이려고 하지 않겠냐며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식사를 제대로 못하실 때도 많았고요. 그래서 한국방문 일주일간 안전을 위해 늘 신경써야 했습니다. 다행히 베트남으로 돌아가실 때는 환대해주는 한국의 시민들을 더많이 기억하시고 고맙다고 하셨지만요. 벌써 50년이 지난 학살사건이라 증거조사를 위해 베트남의 학살마을을 방문했을 때 당시 현장을 목격한 여러 증인들이 너무 연로하셔서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어하셨고, 이미 많은 분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살피해 생존자들이 살아계실 때 한국정부 차원의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Q. 평화 운동을 오래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무슨 계기로 하셨나요?
대학 때 이라크 반전 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이후로 전쟁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2006년부터 10년간 “전쟁없는세상”이라는 평화단체에서 상근하며 활동하였습니다. 현재도 한국 사회의 군사주의 문제, 군대와 병역거부 문제, 무기 문제 등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군대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더 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원하다보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성찰해야만 전쟁의 가능성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쟁이라는 부당한 전쟁에 파병으로 동참하여 민간인학살이라는 과오를 저질렀던 한국은 그 이후 세계곳곳에 파병을 하고 무기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반성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으면 과거의 잘못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Q. 활동하면서 힘들지 않았나요?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한국사회가 분단상태이다보니 “안보”라는 가치가 최우선적으로 여겨지고 모든 것을 움직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화운동의 자리는 점점더 좁아져가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남북관계가 변화되면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듯 보이지만, 정권이 바뀌고 제도가 생겼다고 모든 것이 한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부가 알아서 해줄거라는 믿음이 오히려 사회운동을 위축시키기도 하고요. 이런 지점들이 더 위험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는 것은 마음 아파하면서도 저 멀리 어린아이가 총탄에 맞아 몇 명 사망했다는 소식은 “문자”로만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1964년에 있었던 시대적 · 공간적으로, 심적으로도 멀리 있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그때 그곳은 그러했던 곳” 으로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지난 7월 1일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도 받지 못하셨죠. 일본군’위안부’ 할머니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나몰라라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슬픈 역사이며 고귀한 할머니들입니다. 베트남 전쟁 사망자의 손녀, 손자, 딸 아들도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한국인이 아무 이유 없이 죽였어요.” 왜 죽어야만 하고, 왜 본인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오랜 원망이 쌓였을 것입니다. 제대로 사과 받고, 제대로 사과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
글 송혜진 간사 ㅣ사진 권연재 간사
2018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시민사회단체 및 시민의 공익활동을 지원합니다. 올해는 총 38개의 단체와 7개의 시민모임이 선정되었습니다. 1년간의 사업수행 기간 중 선정 단체와 모임의 사업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중간방문을 진행하였습니다. 그중 7개 단체와 1개 시민모임을 방문하였고, 8개의 인터뷰 콘텐츠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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