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에도 아름다운재단은 변화의 시나리오 지원사업의 하나로 어김 없이 [활동가 재충전 지원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예년과 다르게 활동가들의 휴식을 위한 프로그램 이외에 단체 활동과 연관된 [해외연수] 지원사업을 진행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4개의 팀이 선정되어 각기 일본, 독일,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해외 각지로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각 팀이 다녀온 연수 이야기, 함께 공유합니다.
먼저 [관악주민연대]는 일본의 We21 Japan, Workers Collective에서 운영하는 각종 지역활동단체를 방문하고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일본 지역운동의 다양한 사례를 경험하여 활동가 개인의 운동적 정체성과 전망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고, 현재 몸담고 있는 지역 풀뿌리단체의 활동방향과 내용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 이야기를 두 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몸과 마음에 다 담기 힘든 벅찬 감동의 여운을 새기고 일어난 셋째 날.
아침은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거실 TV에선 연신 태풍 속보와 대피요령을 내보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해장국으로 속을 달래고 집을 나서려니 빗줄기기 굵어졌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한시간여 비바람과 씨름하며 도착한 곳은 노인요양시설인 라포르(Rapport)였다.
라포르 후지사와는 생협조합원의 기부를 모아 설립한 노인요양시설로 일본 노인복지의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장애나 치매 등 질환 때문에 가족이 부양하기 어려운 어르신들이 입소해 공동으로 생활하는 시설인데, 주목할 점은 공간 구획이나 운영이 철저하게 시설에서 생활하는 어르신 입장에서 계획, 실행된다는 것이다.
각자의 거주공간에서 생활하는 10명의 어르신을 1개 유닛으로 구성해 공동거실, 부엌 등의 편의시설을 구비해 놓았다. 각자의 방은 법적 범위보다 넓게 설계했고, 개인취향에 맞게 가족이 직접 꾸밀 수 있으며, 방 구분도 숫자가 아니라 어르신이 원하는 명칭을 사용한다.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어르신 상태에 적합하게 직원들이 조리해 배달하는데, 어르신이 원할 경우 유닛에 구비된 부엌에서 손수 조리할 수도 있다. 생활자 중심의 운영은 100명의 어르신을 돌보기 위해 1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감수하더라고 서비스의 질을 낮출 수 없다는 고집을 느낄 수 있다.
점점 거세지는 비바람을 맞으며 다음 목적지인 K2 International Group(이하 K2)으로 향했다.
K2는 한 요트회사의 히키코모리 청소년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인 ‘인터내셔널 콜럼버스아카데미’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회사에서 분리해 본격적으로 가정문제, 따돌림 등으로 학교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고립청소년을 위한 활동을 하며 현재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K2의 성장과정에서 돋보이는 점은 고립청소년의 필요에 대한 철저한 천착이다.
K2의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소년이 가정으로 돌아가 다시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공동생활공간을 마련하고, 그렇게 성장한 청소년의 취업난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공동작업장과 오코노미야끼 가게, 카페가 만들어지고, 이후 결혼한 세대의 육아문제에 대응해 아동보육시설을 세우는 등 K2가 벌이고 있는 일련의 활동은 히키코모리 청소년이 성장하면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에 대한 대응이다. 그렇게 필요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설립된 총 28개의 사업장이 한 지역에서 상호 연계되어 자연스럽게 마을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는 K2 스텝의 설명을 들으며 오코노미야끼 매장 <콜럼버스>로 들어갔다. 히키코모리에서 이제는 매장 지배인이 된 두 청년이 만들어준 요리로 저녁을 대신할 무렵 태풍은 점점 요코하마로 접근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약해진 틈을 이용해 서둘러 가게를 나와 전철을 탔다. 객지에 혼자 내보낸 자식들이 걱정이었는지 어머니는 전철역 앞에서 차를 가지고 기다리고 계셨다. 전철에서 내려 비바람을 뚫고 숙소까지 걸어갈 걱정이 태산이던 일행은 몰려오는 안도감과 어머니 얼굴에 눈물이 글썽일 지경이었다.
집에 도착해 녹초가 된 몸을 추스르기도 잠시, 어머니는 오늘까지의 연수 결과를 평가하라며 애써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며칠새 익숙해진 자애로운 어머니 모습에서 잊고 있었던 활동가 군지상의 요청에 잠시지만 돌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치를 채셨는지 아버지가 간단한 주안상을 준비해 평가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셨다. 일본과 우리활동의 다른 점, 일에 매몰되어 놓치고 있던 것, 원칙과 집요함, 필요에 대한 천착, 각자의 평가를 나누며 어머니집에서의 마지막 밤이 깊어갈 무렵, 요코하마는 태풍과의 일전을 치르고 있었다.
태풍으로 오전 일정이 취소되어 약간의 여유가 생겼지만 우리는 다음 행선지로의 이동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와의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엊그제 잔치를 같이 한 이웃들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전철역으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과 무거운 짐을 끌고 도착한 곳은 요코하마 시민활동지원센터다. 일본에는 현재 약 120여 개의 시민활동지원센터가 있다. 일본은 1990년 이후 버블경제의 붕괴로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1995년 고베 대지진 피해 복구과정에서 민간단체나 자원봉사의 역할이 부각되어 NPO지원법을 제정했다. 특히 동경의 외곽인 요코하마는 급격한 인구증가로 인프라가 부족해지고 그로 인해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민간단체가 네트워크를 통해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시민활동지원센터는 NPO의 성장을 지원해 공공 문제의 해결과정에서 ‘민’을 참여시키고 ‘관’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만들어졌다.
요코하마에서 민관 사이의 협동은 ‘요코하마 코드(Yokohama Code)’로 불리는 6가지 원칙에 근거해 이루어진다. 대등, 자주성 존중, 자립화, 상호이해, 목적공유, 공개의 원칙이 그것이다. 요코하마센터는 NPO단체 상담, 회계·법률 전문가 파견, 현장코디, 정보지제작, 구단위 민관거버넌스 지원, 네트워크 회의, 민관 거버넌스에 대한 신입공무원 교육 및 교재개발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민관 사이의 협동과정은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에서 행정과 NPO는 서로 협동하며 마을의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한다. 2단계는 어떤 문제를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과 교류하며 사례, 정보, 지식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마지막 3단계에서 문제의 이해당사자들(주민)은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찾는데, 행정은 주도하지 않고 측면지원을 하며 차츰 역할을 줄여나간다. 원칙에 근거한 협동, NPO에 역할에 대한 신뢰, 시민활동지원센터의 공동운영, 주민주체성의 확보 등 일본 민관거버넌스의 선진모습이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시간을 쪼개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말하며 경험을 나눈 일본 연수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갔다. 다음날 아침에 방문할 마지막 단체인 일본 노동자협동조합 연합회(Japan Worker’s Co-operative Union)와의 접근성을 고려해 마지막 숙소는 공항 근처의 호텔로 정했다. 호텔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여관 정도의 수준이었다. 피곤한 몸이었지만 마지막이기에 숙소 근처의 야경을 구경하고 선술집에 들러 따뜻한 사케 몇 잔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사케가 무슨 마중물처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어떤 뜨거움을 불러냈다. 깊어가는 어둠이 그 뜨거운 무언가를 애써 내리누르며 사케잔을 채워갔다.
일본노동자협동조합연합회(이하 ‘일본노협’)는 그동안 방문한 단체와는 규모면에서부터 달랐다. 꽤 큰 사무실에 얼핏 보아도 수십명은 됨직한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다. 올해로 35주년을 맞이한 일본노협은 1970년대 실업극복활동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 ‘협동노동’이라는 개념을 선명화시켜가며 세 번의 원칙 변경을 겪었다. 협동노동이란 고용되지 않는 노동을 말하는 것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자신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협동노동자들도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어 상호간의 협동을 실천하고 있다. 협동노동은 일하는 사람들과의 협동, 노동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이용자와의 협동, 지역과의 협동이란 3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런 원칙하에 일본노협은 공공시설 청소와 관리, 생협 물류, 개호보험 관련 복지시설운영, 보육, 교육분야 정부 위탁사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일본노협과의 교류를 마지막으로 4박 5일간의 일본연수가 막을 내렸다.
태풍으로 방문이 취소된 단체를 빼더라도 총 8개 단체를 4일 반나절 동안 돌아다녔으니 꽤 무리한 일정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짧은 시간동안 이왕이면 많은 단체를 만나게 해 주려는 가이드와 군지상의 배려임을 알기에 입술이 터지는 고통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동네 이웃들의 환영잔치와 연수 일정 곳곳에 배어 있는 어머니, 아버지의 속 깊은 마음은 이번 연수를 더욱 값지게 해주었다. 며칠 동안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나눈 이야기를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을 태운 비행기가 공항 활주로를 벗어나고 있었다.
글 / 사진 제공 : 관악주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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