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공익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민모임, 풀뿌리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합니다. 특히 성패를 넘어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합니다.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에서 어떤 활동들이 이루어졌는지 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 아래 글은 피스모모가 진행한 “평화교육 진행자되기 과정”에 참여한 참가자의 후기입니다.
진행자되기 과정을 닫으며
내 발로 지구를 지탱하고, 내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한 뒤로, ‘사랑과 자유’를 쥐고 가야할 중요한 무게중심으로 두었다. 처음 세상에 나온 아이처럼 배워나가려 했고, 그런 내게 모모는 좋은 배움터가 될 거라 믿었다. 그리고 정말로 모모는 나에게 사랑을, 자유를, 평화를 알게끔 해주었다.
세상에는 사랑과 자유, 평화에 관한 정의가 넘쳐난다. 그에 수반하는 여러 주장도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이런 세상에서 칠판에서 민주를 받아 적고, 책에서 정의를 읽고, 찬반이 오가는 토론장에서 평화를 재왔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던가, 안보를 위해 무기가 허용되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은 나에게도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오라고 말했다. 아픈 마음을 잠시 꾹 눌러놓고, 왜 이것이 폭력과 억압인지 설명하기 위해 근거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논리라도 평화를 만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세상이다. 마음으로 전해져야 할 아픔이 글을 통해서만 전달되기에는 버거웠다.
‘사랑을 배우는 것과 사랑을 하는 것은 다르다.’ 마음 깊숙이 담아두었던 이 말을 모모에서 몸으로 느꼈다. 여름이 시작되던 유월 초, 그 날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감정을 내뱉었다. 어색하다, 당황스럽다, 두렵다, 먹먹하다, 흥분된다, 슬프다, 아프다, 무력하다, 지친다, 기쁘다, 몽글하다, 끝내준다. 이렇게나 다채로운 감정이 있었나싶다. 내 앞에 앉은 존재의 눈을 바라보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속도에 맞추다보니 온갖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모모의 공간에는 지식, 글, 틀이 없다. 수많은 에너지가 그 공간을 함께 채워나갔다. 기쁨과 슬픔이 오가는 과정에서 각 존재들은 스스로 마음 근육을 키워나갔다. 마음근육은 감수성을 온몸으로 퍼뜨렸다. 감수성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림’, 다른 존재가 ‘되어봄’으로 이끌었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당신의 존재를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것. 이 담백한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와 함께 마음 근육이 움직여야했다.
모모에서는 정답을 배우지 않았다. 정답이 없다는 것만을 배웠다. 나의 모습에도 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20대, 학생, 여성, 한국국적, 김씨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냥 민주라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그 곳에서 나는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고, 촉진자가 되고, 동무가 되고, 식물의 목소리를 대신하기도 하고, 소수가 되었다가, 다수가 되기도 했다.
실은 다른 사람에게 쉽게 보이지 못하는 나의 숨겨진 모습이 있었다. 세상의 온도에 굉장히 예민하다는 것. 슬퍼서 심장이 무척 아프다거나, 벅차서 눈물이 펑펑 흘러나온다던가, 기뻐서 방방 뛸 때도 잦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눈물을 흘리거나, 감정을 풀어내는 시를 쓸 때마다 쓸데없거나, 이상하다며 거부당해왔다. 요즘에서야 스스로 나의 진짜 모습을 사랑해주고 있지만, 모모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 받아서 한껏 자신감이 생겼다. 안전한 배움터였기에 나를 더 드러내고, 너를 더 알아챌 수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것은 나누고 싶다. 한껏 나누고 싶다! 가장 좋은 선물은 선물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당신에게도 사랑, 자유, 평화의 근육이 있다는 것을 알게끔 해주는 바람이 되어 살아가고 싶다. 사랑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더 짙어졌다.
2강을 닫으며
동그랗게 모여 앉아있던 우리는 “이 공간의 중심을 찾아 이동해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쭈뼛대며 흩어졌다. 물리적 중심,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공간, 가장 사람이 많은 공간 등 여러 가지 중심이 있었다. 그러다 마이크를 든 진행자가 “사실 이 곳이 이번 활동의 중심이었습니다. 모두 이 곳으로 모여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머리로 ‘어? 저기는 내가 생각하는 중심이 아닌데?’라고 생각했지만, 몸은 그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곳에 다다르는 순간 활동이 끝났고, 느낌 나누기를 했다.
나의 불편한 감정을 풀어내면서 아차 싶었다. 마이크를 쥐고 있던 진행자의 말에 몸으로 복종했고, 내 움직임은 그 공간에 있던 사람들을 움직이는 또 다른 힘으로 작용했다. 나를 제약하는 힘에 대한 거부감과 반사적인 복종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며 혼란스러워했다.
며칠 뒤, 놀이가 아니라 실제의 권력을 마주했다. 학원에서 원장선생님이 그 날 따라 기분이 안 좋았다. 자신의 실수로 학생 한 명의 보충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된 것에 화가 나서, 나에게 왜 자신에게 보충할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지 않았냐며 나무랐다. 그러면서 추가 근무를 하지 못한다는 나에게 언짢은 표정을 보였다. 어이없고 짜증이 났다. 누가 봐도 나의 잘못은 없고 추가 근무를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원장선생님 앞에서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분명 내 마음은 죄송하지 않은데.
어차피 조만간 그만 둘 일이었으니까 할 말 다하고 나왔어도 된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괜히 서로 얼굴 붉히기 싫었던 것도 있겠지만, 철저히 을의 몸짓을 체화했기 때문도 크다. 직장에서 고용주가 버럭!할 때 조아리게 되는 그 몸짓. 그가 무슨 소리를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권력에 저절로 반응하는 몸의 움직임이 섬뜩했다. 나에게 타자는 이렇게 나뉠 수 있었다. 나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내가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 이 두 분류의 사람들에게 내가 대응하는 방식은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나를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권력은 어떤 힘이다. 하지만 그냥 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힘 내!’라고 말할 때의 힘이나, 바람을 만들어내는 공기의 힘과는 다르다. 두려움의 감정을 동반하는 힘이 존재한다. 힘(power)이나 에너지(energy), 그리고 권력(authority)은 어떤 대상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권력에는 사회적으로 가치가 부여된다. 그것은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우월성, 다수의 합의 같은 것이 포함된다.
권력을 가진 자의 몸짓과 가지지 않은 자의 몸짓은 확연히 달랐다. 크고, 역동적이고, 자신을 더 드러내는 몸. 작고, 움츠러들고, 경직되고, 고개를 숙이는 몸. 식물이 햇볕에 따라 잎을 펼쳤다 접었다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우리 몸은 반사적으로 반응하고 있다.
두려움이 나의 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 힘은 어떻게 두려움을 동반하게 될까? 각자마다 두려움의 정도가 다른 것을 보면 나의 경험이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내가 욕망하는 것과 반하는 상황에 힘으로 나를 몰아넣을 때를 겪을 때가 자주 있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 때의 불쾌감이 권력에 대한 복종 때문이었음을 인지하게 된 적도 더러 있다. 그래서 비슷하게 만들어진 그 힘을 나에게 쓰려고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바로 두려움의 표상을 떠올린다. 그 두려움은 저 사람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나에게 요구할 것이고 나는 그것을 행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불편함, 무기력감 등과 함께 작용했다.
권력에는 어떤 가치가 부여된다. 힘을 가진 자가 우월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열등하다는 통념에 동의하기에 모두가 질서 정연하게 그 구조에 맞게 움직인다. 내가 느낀 두려움은 스스로를 열등하고, 대항할 힘이 없는 존재라고 만듦으로서 더욱 생생해졌다.
학교에서의 선생님, 가정에서의 부모, 사회에서 어떤 직책이 있다는 사람, 나이가 많다는 사람, 가부장적 남성 등. 왜 나는 이들에게 불편함을 느껴야 하는가? 왜 이들 앞에서 어색하게 행동하게 될까? 그들이 나를 어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 내가 가진 그 믿음이 나를 부자유하게 만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찜찜한 부분이 있었다. 학원이나 인문학 교실에서 청소년을 만나며 나는 서로 존댓말을 쓰고 이름을 부르려고 한다. 내가 존댓말을 쓰는 것을 친구들을 당황해하거나, 반말을 쓰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어색하게 ‘민주씨’라고 부르기도 하고.
나는 이런 이유에서 청소년과 만나는 것이 좋았다. 나는 몇 년 더 숨 쉬었다는 이유로 청소년에 비해 사회적으로 가치 부여된 것(나이나 사회적 직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씩 껍데기를 벗고 개체 대 개체로 교류하는 장(field)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점은 나를 설레게 한다.
하지만 이것도 힘이다. 수평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도 나에게 어떤 힘이 있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가 어린 청소년이 ‘따라’오는 것이다. 결국 평화적 서로배움터를 만들어가는 것도 권력에 의한 것임을 느끼고는 조금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모모에서 이야기 나눔을 하며, 보지 못했던 힘의 어떤 면을 보았다. ‘권력’이라 했을 때, 대부분은 가장 먼저 부정적인 감정을 떠올린다. 무기력함, 불쾌감, 두려움, 허무함, 좌절 등. 그런데 누군가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도록 밀어주는 힘이라면 어떤가? 그것을 힘을 주는 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힘은 가장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강력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힘의 작용 안에서 헤엄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힘을 가지기도, 제약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힘에 짓눌릴 때의 나를 더 자주 인지한다. 나도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지 않으면 나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힘을 갖고 싶다. 세상에 스스로 뿌리내리는 힘을 주는 힘, 부당한 힘에 저항하는 힘을 갖고 싶다.
3강을 닫으며
이 세상에 같은 것이 있을까? 한 가지에 붙어있는 나뭇잎 두 장도 다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도 다르게 느껴지는데,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겐 진리로 받아들여진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다름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간다. 하지만 ‘다른 무엇’이 눈앞에 또렷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공기가 존재하는지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떤 순간 공기의 존재를 확! 느끼게 되는 것처럼. 그 대상이 낯섦, 불쾌감, 당혹감과 같은 감정과 함께 다가올 때 그러하다. 나는 이런 감정을 동반하는 다름을 만날 때, ‘타자’라고 이름을 붙여왔다.
물리적, 정신적으로 나를 공격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부정적인 감정이 유발된다. ‘내 공간’에 대한 선이 확실할 때 위협감은 더 크다. 실질적인 생존 공간, 확고히 믿고 있는 신념을 부정한다고 여겨지는 다름은 틀렸다거나 나쁘다는 가치와 엮인다. 가치 판단과 함께 타자와의 갈등은 시작된다. 타자로 명명되는 대상에게는 특정 방식으로 대응한다.
말, 표정, 손짓발짓을 사용해 온몸으로 거부하고 선을 긋는다. 특히 이해관계가 같은 누군가를 만나며 갈등은 심화된다. ‘우리’라는 집단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배제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안에도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차이의 세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갈등은 나쁜 사람이라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촉진되고 심화된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 속에 있을 때는, 그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대화/토론을 촉진시키거나, 공통점을 확인한다거나, 신뢰를 형성하는 등의 갈등 조정방법이 있다고 한다. 제3자의 중재도 그 중 하나이다.
이야기 나눔을 할 때, 갈등 조정자에 대한 중요성에 모두가 크게 공감했다. 그 자리에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역할에 서툴렀던 나를 떠올리곤 부끄러웠다. ㄱ과 ㄴ이 다투었을 때, 중간에서 중재를 한답시고 원래 ㄱ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ㄴ과 대화를 하며 오히려 ㄴ의 감정만 더욱 격하게 만든 적이 있다. 결국엔 둘 사이의 벽이 더욱 높아져버렸다. 나는 갈등조정자의 탈을 쓴 갈등메이커였다!
조정자는 한 측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답을 정해둔 사람도 아니다. 당사자들이 자신과 상대방의 감정을 오롯이 소화하고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서로 배움의 현장에 있고 싶은 나는, 좋은 갈등 조정자의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지혜를 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배움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뿜어내는 좋은 에너지는 더욱 크게 만들어주고, 마찰음은 함께 줄여나가도록 귀 기울여주고 싶다.
다름을 다루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다름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다름을 다루는 것은 세상을 직면하는 것이다. 다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4강을 닫으며
한 달 만에 만난 “ㅎ”은 삼계탕을 먹다가 존재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냐는 것이었다. 낯선 두 단어가 함께 불러지니 더욱 생경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ㅎ는 ‘나가섬’의 상태에서는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바로 다음 날 모모에서 나는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 날 모모에서 우리는 만남을 시작하며 노래를 불렀다.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크고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쌩뚱 맞게 왜 노래를 부를까 했는데 그 공간을 채우는 목소리의 떨림, 높낮이, 속도가 세세하게 마음에 박혔다. 그 울림이 느껴질 때마다 ‘아, 당신은 이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군요.’라고 마음으로 속삭였다. 그리고 <서로>의 배 속에 있는 존재에게 다 같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마침 우리가 불렀던 노래는 남아프리카의 자장가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함께 그 공간을 채워준 소중한 존재.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존재. 그 존재도 고마웠는지 <서로>에게 감동의 눈물을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모모의 공간에는 사실 수많은 존재가 뒤섞여있었다. 서른 여명의 사람들과 이리저리 엮여있는 반려식물, 반려동물, 애인, 친구, 가족. 내가 먹은 음식, 입고 있는 옷, 쓰고 있는 종이에 묻어있는 존재들. 그리고 나는 그 날 평창올림픽 유치로 인해 잘려나간 가리왕산 엄나무에게 목소리를 빌려주었다. 무게가 아래로 쏠려 너무나 아프다고, 당신들은 산사태로 집을 잃을 것이 두렵다지만 나는 이미 내 친구와 집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500살이 된 엄나무의 아픔이 목에 턱하고 걸려 말하기 힘겨웠다.
인간, 식물, 동물 혹은 백인/흑인, 여성/남성, oo종/xx종과 같이 어떤 류(類)로 묶일 때, 고유한 존재가 지워지기 쉽다. 깔끔하게 분류된 집단은 가치판단과 함께 배제, 지배, 차별이라는 움직임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우열은 허상이고, 존재는 실재한다. 모든 존재는 다른 무엇에 비해 모자란 것이 없으며, 다른 무엇처럼 되어야할 필요도 없다. 들풀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쓰지 않지만,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광수용체로 햇빛과 소통한다. 들풀과 나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서로 배움의 시간을 닫으며 짝꿍과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짝꿍과 마주선 채로 우리는 둥그런 원을 만들었다. 오로지 짝꿍에게만 집중해서 아주 느리게, 느리게 걸어가 더욱 느리게, 느리게 토닥여주고 되돌아왔다.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천천히 뒤로 물러날 때,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에게 좋은 에너지를 한껏 건네준 존재에게 참 감사해서였다. 나의 짝꿍의 눈에도 반짝이는 눈물이 보였다. 몇 번의 토닥임에서 우리는 감사함, 소중함, 위로와 응원을 주고받았다.
한 숨에 한 발자국씩, 천천히 짝꿍에게 걸어가 꼭 안아주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모든 이들의 표정은 내가 살면서 본 얼굴 중 가장 아름다웠다. ‘존재로 충분해.’라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얼굴은 평온하고, 반짝이고, 아름답다.
글ㅣ 참여자 김민주 님
사진ㅣ 피스모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