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사 고람수다! (이제야 말하는 겁니다)”
그 말을 육성으로 직접 듣고 나서야 ‘현재 진행형의 역사’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로 살아서 다가왔습니다.
4.3 당시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전국 각지의 형무소로 보내져 수형인으로 살다가, 살아 돌아온 소수의 생존희생자 분들이 최근에 국가를 상대로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당사자로서 증언을 결심하고 재판정에 나온 분들은 대부분 80~9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셨어요. 서울 표준말씨를 쓰는 판사와 검사의 수많은 질문에 생존희생자 분들은 버거운 듯 보였습니다.
당시의 정확한 기억을 요구하는 질문들이 계속되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생존희생자의 자제분이 답답함을 못 이기고 외쳤습니다. 어머니께서 수감되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평생 자식들에게 한번도 이야기하지 않고 살아오시다가, 이번 재판을 앞두고 증언을 결심하고 나서야 처음으로 어렵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2019년 1월, 드디어 생존 수형인 분들은 공소기각, 사실상 무죄 판결을 받았지요.
목소리로 다가온 현재진행형의 역사 “이제사 고람수다!”
2018년, 4.3 기행을 진행하면서 참가자들에게 4.3은 70년 전에 끝난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여러 모로 현재진행형인 역사라는 말을 자주 하고 강조하는 편이었는데, 그 날 재판정에서 그 목소리들을 듣기 전까진 어찌 보면 역사를 글로만 배워왔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여행이라는 좋은 매개체를 통해 오감으로 역사를 느끼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비영리단체입니다. 4.3 유적지 기행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유적지 기록, 육지에서의 4.3 강연 개최, 그리고 국제연대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을 받아 망설임 없이 시작한 지 이제 벌써 1년이 넘게 지났네요. 작년 여름, 아름다운재단에 가서 공모사업 심사를 받을 때는 혹시 선정이 안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심사위원 분들의 질문에 선정에서 떨어져도 그래도 어떻게든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렸던 게 종종 떠오르곤 해요. 왜냐면 돌이켜 생각해볼 때마다 참 턱도 없는 배짱이었구나 싶거든요. 인큐베이팅 지원이 없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서늘해지곤 합니다.
2018년은 제주4.3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4.3 70주년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제주를 찾아왔고 언론들에서도 70주년 기획 보도를 많이 하면서 좋은 콘텐츠들도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는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국제팀과 홍보팀에 결합해 함께 했고, 기념사업위 내 평화기행위원회의 간사단체를 맡아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평화기행위원회의 기행 사업을 통해 2018년 상반기에는 국내외 총 40여 개 단체, 1,500여 명의 참가자들이 4.3 평화기행에 참여했습니다. 특히 제주다크투어는 국내 외신 특파원 및 영자신문 기자 초청 프레스 투어, 해외 한국학 학자 대상 평화기행 등을 진행하면서 4.3을 국외에 알리는 일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와 함께 4.3을 알리는 영문 소책자와 4.3 유적지 지도를 발행하는 일도 같이하고 유족회 국제팀에서도 함께 활동하며 4.3 미국 책임을 묻는 일들을 진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주도 청소년활동진흥센터의 4.3청소년 프로그램 개발팀에도 함께해 청소년들을 위한 4.3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나가고 있어요. 개별적으로 제주다크투어를 찾아준 학교나 청소년 단체들과도 몇 차례 4.3 기행을 진행했습니다.
4.3 생존자이신 북촌 고완순 노인회장님이 청소년들이 정성껏 써서 준비해온 롤링페이퍼를 받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 4.3 당시 증언을 듣고 하나, 둘 눈물이 터져 다 같이 한바탕 울었던 시간, 육지의 집에서부터 챙겨온 ‘순이삼촌’ 책을 펼쳐서 바닷가에서 사진 찍던 모습들 모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생존자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세상 만들기
시민사회가 모여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범국민위원회 등을 꾸리며 4.3 70주년을 더 각별하고 크게 기리려고 했던 데에는, 10년 단위의 큰 주기 중에서는 올해 70주년이 생존희생자 분들에게는 사실상 마지막 주기일 수 있다는 점도 컸습니다.
어쩌면 그런 조바심이 섞여서 되도록 많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나누고 기록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최근 ‘4.3과 국가폭력’을 주제로 열렸던 포럼에서 오랫동안 ‘4.3과 여성- 제주의 홀어멍’을 주제로 연구해온 한 학자분은 그런 이야기를 나눠주셨어요. “듣는다는 것은 권력행위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말하기에 안전한 상황인지 아닌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이들이 충분히 말할 수 있게 하려면 우리 사회가 들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말해달라고 하기 전에 들을 준비가 먼저 되어있는가, 들을 만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기행에서 만났던 청소년들이 떠올랐습니다. 제주다크투어가 프로그램을 통해 생존희생자 분과의 자리를 만들어서 증언을 듣게 해준 것 같지만, 생각해보니 귀를 열고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이들은 그 청소년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많이 진행하고 있는 ‘4.3 첫발딛기’ 기행이나, ‘4.3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한 기행 외에도 ‘4.3과 예술’, ‘제주여성의 역사’ 등을 테마로 한 기행을 개발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제주와 비슷한 아픔의 역사를 가진 곳들을 잇는 아시아 지역 평화기행을 개발하기 위한 시작으로 2018년 7월, 광주 오월여성회와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으며 휘리릭 지난 반년. 속암쪄! (수고했어!)
첫 1년 동안 단체를 꾸리고 운영해가며 두 명이서 분주하게 동동거리고 지냈구나 싶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둘만으로는 실제로 할 수 없는 일들이었어요.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해주시는 운영위원, 자문위원, 고문단, 그리고 140여 명의 후원회원 분들! 그리고 지역에서 도와주시는 많은 분들이 없었으면 제주다크투어가 이만큼 해낼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딱히 뭘 살뜰히 해드리는 것도 없는데 같이 일해주시고, 홍보해주고, 후원해주시는 건 역사를 잘 알리고 의미를 살려내겠다는 가치에 함께 하고 지지해주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년 동안 큰 탈 없이, 또 정신없이 제법 많은 일을 하며 지냈습니다. 앞으로도 더 부지런히 답사를 다니면서 유적지들을 기록해 누구나 4.3 유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난개발 광풍이 여전한 제주도에서 미약하지만 유적지 기록이 유적지를 난개발로부터 조금이라도 지켜나가는 한 방법이기도 하고요.
일 잘 하는 방법보다 어려운, 행복하게 활동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앞으로는 더 고민하고 찾아보려고 해요. 제주다크투어를 다크하지 않게 운영해가는 방법이랄까요. 저희의 이러한 고민과 노력을 지켜봐주세요. 우선 저희도 저희를 응원하려고요. 아직은 낯선 셀프 토닥이지만 자꾸 해보렵니다. 토닥토닥, 잘 햄쪄! (잘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