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어른을 아시나요?
만 18세,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육원을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보호종료아동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는 ‘열여덟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열여덟 어른 캠페인> 당사자 프로젝트 ‘신선 프로젝트’
안녕하세요. 저는 열여덟 어른 ‘신선’입니다. 저는 이번에 <열여덟 어른 캠페인>의 캠페이너로 참여하면서 다른 열여덟 어른들을 직접 만나 보았는데요. 열여덟 어른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이 자립하면서 겪었던 사회 편견부터 정책의 문제까지, 당사자의 시선으로 당사자의 목소리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
Q. 신선: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손자영: 안녕하세요. 손자영이라고 합니다. 저는 첫돌이 갓 지났을 때 보육원에 입소해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19년을 아동양육시설에서 생활했습니다. 현재는 자립한 지 5년 차네요. 저희 시설은 규모가 꽤나 큰 편이라 시설 내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 3학년 졸업 전에 취업을 시작하며 자립하게 됐습니다. 첫 자립은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면서, 19살이 만지기에는 좀 큰돈인 250만 원 정도를 받으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문득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제 자신도 입력된 행동만 하는 공장 속 기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게다가 주야간 교대로 몸도 성치 않았고, 사회생활에서의 기본적인 규율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쳐 결국 1년 4개월 만에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퇴사를 결정하고, 저의 삶과 다른 시설 친구들의 삶을 돌아보다 문득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되어 현재는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Q. 신선: 소개를 들으면서 궁금한 부분들이 많은데요. 먼저, 저는 15년을 보육 시설에서 생활했는데, 저보다도 더 오래 지내셨네요. 혹시 학창시절 중에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을까요??
손자영: 어릴 때다 보니 다른 친구들이 보육원에 산다는 이유만으로도 많이 놀렸었어요. 그래서 학원이 끝나고 귀가할 때도 한참을 돌아서 들어가거나 주변을 살펴야만 했어요. 시설이 워낙 크다 보니 그 주변에서는 이미 저희 보육원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거든요. 시설 내에 초중고가 다 있어서, 학교 이름만 대면 다들 보육원 출신인 걸 알았죠. 그때는 시설에 사는 게 많이 부끄러웠고, 언제 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학원을 다니기가 싫었어요.
그리고 학원을 다닐 때는 시설에서 학원을 다니는 친구들을 위해 도시락을 싸주셨어요. 그런데 다 똑같은 도시락 가방을 가지고 다니니까 제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들킬 것만 같아 차라리 굶을 때가 많았어요. 나중에야 학원이 끝나고 밤에 화장실에서 다 식은 밥을 허겁지겁 먹어 치우곤 했어요. 배고픔은 나중에라도 채울 수 있지만 한번 무너진 자존심은 다시 세울 수가 없었으니까요.
Q. 신선: 저도 학창시절에 보육원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친구들을 배웅해주고 집에 가야만 했던 기억이 있어서 공감이 가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도 학창 시절에는 제 배경을 숨기기 위해 무지 애를 썼던 것 같아요.그럼 고등학생일 때부터 취업을 나가 돈을 벌었다고 했는데, 돈 관리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손자영: 일단 돈 관리에 있어서는 퇴소하기 전까지는 시설에서 급여의 70%는 적금을 하라는 규칙이 있었어요. 저는 퇴소 후에도 습관이 들어서 100만 원씩은 적금을 했던 것 같아요. 자칫하면 쉽게 돈을 낭비했을 수도 있었는데, 좋은 습관을 들인 것 같아요. 그 당시 지출은 대부분이 식비와 여행으로 나갔던 것 같아요. 여느 20대들과 같이.
Q. 신선: 시설 내의 초중고를 졸업하다보니 시설 생활에만 익숙해져 사회생활이라는 게 낯설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회사생활은 어땠나요?
손자영: 19살에 시작한 사회생활이 쉽지는 않았어요. 일을 하면서 제가 크고 작은 실수들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 회사에서 연락이 오는데 제 잘못을 시인을 하지 않고, “왜 저한테만 그러냐고 저 아닌데요”라고 시치미를 땠어요. 하지만 공정 과정을 다시 추적해보면 결국 제 실수인 게 밝혀졌어요.
제가 실수를 많이 하다 보니 회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 먼저 연락이 오는 것도 그렇고, 상사분들이 저를 꾸짖는 것도 저는 더 꾸겨서 들었던 것 같아요. ‘왜 나한테만 그렇지? 내가 부모가 없다고 그러는 건가’ 자존심이 세서 죄송하다는 말도 안 하고, 피해 의식만 강했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긴 해요. 다시 돌아간다면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정도로요.
Q. 신선: 그 당시에 왜 고집스러운 행동들을 했던 것 같아요?
손자영: 그 당시에는 시설 퇴소 직후이기도 하고, 사회적 지지체계도 부족하니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갑자기 증폭되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매일 출근할 때나 샤워를 할 땜 거울을 보면서 “나는 강해져야 한다”라고 외쳤어요. 제 성격일 수도 있는데 저는 늘 씩씩해야 하고, 실수 없이 잘해야 한다고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서 힘들어지니까 스스로한테 그런 말을 해주며 버텼어요.
Q. 신선: 회사생활에서도 본인이 보호종료아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는데, 회사에서는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죠?
손자영: 인사과에서 상담을 한다거나 부서 배치를 받을 때마다, 상사분들이 꼭 “부모님은 뭐 하시는데?”라는 질문을 하셨어요. 저는 그때마다 “부모님이 안 계셔서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랐어요”라고 해야 되는 게 너무 싫었어요. 게다가 상사분이 저를 걱정해신다고, 저랑 친한 동료들에게 제 사정을 말하며 잘 챙겨주라는 쓸데없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지나친 충고나 걱정이 도리어 상처가 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데. 알렸을 때 오는 편견이나 시선이 어떨지 아니까. 저희는 어려서부터 그런 것들을 경험해오잖아요. 그래서 말하지 않은 선택을 하는 건데, 타의적으로 제 사정이 까발려졌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Q. 신선: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다른 보호종료아동들을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요? 자영씨의 입장에서는 어떤 말이 와닿을까요?
손자영: 저는 “그래도 진짜 잘 자랐다”라는 말이 듣기 싫었어요. 그 말속에 우리 같은 애들은 못 자랄 거라는 인식이 들어있는 거잖아요. 그런 말을 들으면 한편으로는 ‘내가 잘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에 대한 편견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워요. “잘 자랐다”라는 말은 위로의 말 안에 편견과 차별이 들어 있는 거 같아요.
그냥 어떤 환경이든 똑같이 대해줬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최근에 힘이 된 말이 있는데 “가정이 있어도 쉽지 않은 환경이 있어요. 그런 부분들도 바라봤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이었어요. 우리는 우리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말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Q. 신선: 갑작스럽게 시작하게 된 사회생활이다 보니 자영 씨와 같은 실수를 경험하는 친구들이 많을 것 같은데, 친구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손자영: 저희들은 늘 시설 규칙 속에 살아오다 보니 수동적이면서, 규칙에 대해 환멸이 나있기도 해요. 그런데 회사생활을 시작하면 또다시 규율과 규칙의 연속이었고, 이를 어겼을 때의 책임감을 물으니 덜컥 겁이 나서 회사를 무단 퇴사하는 친구들이 정말 많았어요. 회사 측에서도 저희에 대한 편견이 생겨 시설 출신 아동들을 점점 안 뽑으려 했고요.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일을 이어나가지 못해요. 그런 친구들은 조금씩 일하고 그만두고 조금씩 일하고 그만두고를 반복하더라고요.
근무시간을 지키는 것이나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정말 기본적인 건데 우리한테는 잘 안 되는 거잖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만 단기적으로 자립 교육을 하는 게 아니라 어려서부터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지속적인 훈련이 꾸준하게 연습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설에서는 개인이 개인 자체로 존재하지 않다 보니 무기력하고, 꿈이 없는 것도 연결이 된다고 생각해요. 내 존재 자체로 인정받은 적이 많이 없다 보니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면 행복한지에 대해 접근할 수가 없어요. 저도 제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몰라서 고등학교 3학년 때 바로 취업을 나간 거였어요. 갑자기 밤새 고민한다고 해서 하루 만에 답이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 당시에는 진짜 답이 없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을 나가 주야간을 도는 게 쉽지가 않아서 회사를 그만두고 시설로 돌아오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 시설에서는 취업 나갔다가 그만둔 친구들만 모아놓은 반이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회사를 그만둔 친구들은 바로 실패했다는 낙인이 찍혀버린 거죠. 몇몇 친구들은 거기서 못 벗어나고, 나와서 뭘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취업 실패 한 친구는 자기는 성실하지도 않고 지구력도 없다고 스스로를 가두며 몇 년 동안 알바만 전전하고 있어요.
Q. 신선: 갑작스럽게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하셨는데 자세하게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손자영: 어느 날 보육원을 퇴소한 선배들이 연달아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시설 선생님들은 한 때는 가족이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지, 도움을 요청할 곳은 없었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저 개인의 성실성이나 성격의 결함으로 치부해버렸거든요. 그때 ‘왜 우리들의 삶은 우울하게 한정되어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많은 회의감을 느꼈어요. 벼랑 끝에 몰려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 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양육방식에서부터 시작되어 퇴소 후의 삶에 대한 무관심까지 연결되는 아동복지 구조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만 18세가 되면 또다시 버려지는 보호종료아동의 처우에 대해 누군가 개선의 목소리를 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 사회복지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싶었고,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으로 대학에 진학했어요.
Q. 신선: 그럼 자립의 시작은 언제라고 말할 수 있나요?
손자영: 시설을 딱 나왔을 때가 자립의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19년 평생을 살았는데도 짐이 큰 캐리어와 이불 하나가 끝이라는 사실에 되게 허전했던 기억이 있어요. 평생을 집으로 생각하던 곳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니까 공허함이 크게 느껴졌어요. 갑작스럽게 스스로 밥도 해먹어야 하고, 공과금도 내야하고. 같이 지내던 친구들도 없고요..
Q. 신선: 자영씨에게 ‘자립’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손자영: 시설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아직까지도 도움 받고 사냐, 언제까지 도움을 받을 거냐”며 안 좋은 시선으로 말하는 친구들도 있어요….지원을 받는 게 나쁜 게 아닌데. 자립이라면 다들 스스로 해야 할 것 같고, 책임져야 할 거 라고 생각하는데.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게 많아서 주어진 자원들을 잘 활용하는 게 자립 능력이라고 생각을 해요.
“나는 강해져야 한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아침을 시작했어요.벌써 4번째 인터뷰이인 손자영 친구를 만나고 왔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남들보다도 더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외롭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은 채 매일 매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고 한다. “나는 강해져야 한다” 주변의 많은 보호종료아동들은 당장의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업을 선택한다. 하지만 18살이 감당하기에 사회생활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회사는 늦어도 기다려주고, 실수를 너그러이 받아들여주는 학교나, 시설이 아니기에 그에 맞는 책임을 원한다. 그러기에 어른을 대하는 법도, 회사에서 힘든 일을 참아내는 법도 우리는 단기간에 터득해야만 한다.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번다고 해서 누울 수 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다 자립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
글ㅣ사진 신선 (열여덟 어른 캠페인 캠페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