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은 <2019 아동 안전권 보장을 위한 지원사업>을 통해 아동 안전을 위한 주민활동과 아동·청소년을 지원하는 복지단체 활동의 연결을 지원합니다. 아동을 위한 정책이 발전한 나라에서는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지자체 커뮤니티와 사회복지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점검한다고 합니다. 개인의 책임보다 아동을 둘러싼 지역사회와 공동체의 책임을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지역 활동가들은 아동에게 ‘안전’이란 곧 ‘인권’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입모아 말했습니다. 아동에게 직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가 아동 인권에 집중하고 힘을 모을 때 어떠한 작은변화가 일어나는지 계속 살피고 공유하겠습니다. |
온 마을이 함께 아동 안전 지킨다 “중랑구의 네트워크 실험”
흔히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한다. 가장 약한 존재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지역사회의 역할을 강조한 말이다. 아동 인권이 가장 끔찍하게 유린되는 아동학대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마을 주민들이 울타리가 된 경우가 많다. 이웃이 학대의 낌새를 먼저 알아채기도 하고, 때로는 학대를 말리기도 하며, 경찰에 신고를 하기도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 사회에 아동학대 사건이 끊이지 않는 것은 마을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끔찍한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혼자 괴물처럼 튀어나오지 않는다. 마을 안에서 작은 폭력들이 조금씩 쌓일 때, 사람들이 이러한 폭력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모른 척 할 때, 비로소 학대는 아이를 집어삼킨다.
다 함께 아동을 키우는 마을이 될 것인가, 다 함께 아동을 방치하는 마을이 될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서울 중랑구 마을 주민들은 “모두가 우리의 아이들이다. 안전하게 자라나도록 다 함께 손잡자”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 풀뿌리단체들은 물론 복지기관, 아동∙청소년 전문기관이 함께 나섰다. 이들은 올해부터 아름다운재단 지원을 통해 2년간 ‘아동의 안전할 권리를 위한 마을-복지 네트워크’ 사업을 벌인다.
이웃을 만드는 네트워크의 힘
마을-복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공식적으로만 18곳이다. 인터뷰를 하는 날에도 무려 7명의 활동가들이 옹기종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허병란 중랑마을넷 대표는 아동 안전에 대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은 좋게 보면 ‘보호’지만 어찌 보면 ‘격리’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제대로 아동 안전을 보장하려면 ‘보호’를 명목으로 아동을 분리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싹트기 전에 ‘아동이 살기에 안전한 마을’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업의 가짓수가 많다.
일단 부모 외에도 아동이 의지하고 신뢰할 만한 어른들이 주변에 많아야 한다. 이를 위해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아동 인권 강좌를 열고 ‘아동 인권 놀이터 활동가’를 양성하기로 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사회 아동 인권 옹호를 위한 온·오프라인 지역사회 인식개선 캠페인도 진행한다. 마을 아동들을 직접 만나는 ‘인권 놀이터’ 활동도 벌인다.
또한 빈틈없이 촘촘하게 아동들을 돌보기 위해서 풀뿌리단체와 복지기관이 힘을 합쳐 ‘마을-복지 네트워크’도 조성한다. 네트워크는 아동 인권포럼을 열어 중랑 지역 아동·청소년 인권 현황과 과제를 공유할 예정이다. 아동 학대 예방을 위해 아동보호 전문기관뿐만 아니라 지역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이렇게 아동 인권 옹호에 중랑구 단체들이 발 벗고 나선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안타깝게도 중랑구는 아동학대 신고율이 굉장히 높은 지역이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는 저소득 한부모 가정 등 돌봄 지원이 필요한 가정 비율도 높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중랑 지역의 든든한 마을 네트워크다.
안순화 생각나무BB센터장은 “교육복지 네트워크는 다른 지역에도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단위들과 주민을 아우르는 마을 네트워크는 정말 드물다”고 말했다. 활동가들은 “기존의 마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지역 아동의 안전을 위한 활동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풀뿌리단체와 복지기관, 협업의 비결은?
이번 사업에서 복지기관과 풀뿌리단체들이 손을 잡은 것 역시 이처럼 오랫동안 쌓아온 네트워크 역량 덕분이다. 아동 지원에 전문성을 갖춘 복지기관 및 아동·청소년 전문기관과 바로 곁에서 이웃을 꼼꼼히 돌볼 수 있는 풀뿌리단체는 서로 크게 시너지를 낼 수 있지만, 문화가 워낙 달라서 때때로 협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기관은 풀뿌리 단체들에 비해 경직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상대적으로 소소한 변동사항을 잘 수용하지 못하고, 거쳐야 하는 내부 절차도 더 많다. 반대로 풀뿌리 단체는 유연성이 높고 진행 속도가 빠른 편이다. 이런 방식이 기관의 속도와는 잘 맞지 않는다.
다행히 중랑 지역에서는 단체와 기관을 모두 잘 아는 활동가들이 많다. 이들이 서로의 언어를 해석해주고 입장도 조정하면서 네트워크의 방향을 고민한다. 덕분에 기관과 단체도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공주영 시립중랑청소년성문화센터 활동가는 “협업이 쉽지는 않지만, 함께 일해 보면 사업이 풍성해지고 대상도 다양해지더라”고 전했다. 이것이 네트워크의 힘이다.
이렇게 시작한 사업들은 벌써 반응이 뜨겁다. ‘아동 인권 놀이터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 기본코스(6주 과정)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신청했다. 20명 정원으로 기획한 프로그램에 40명 넘게 신청해 장소도 더 넓은 곳으로 바꿨다. 참가자 중에서는 저 멀리 경기도 성남에서 1시간 반을 달려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임지연 중랑마을넷 활동가는 “이전에 마을 활동에 참여하지 않던 분들도 새로 많이 왔다”면서 “이런 프로그램에 목말라 했던 사람들”이라고 전했다. 마을 안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물론, 자녀를 보다 인권적으로 키우고 싶은 부모도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이렇게 ‘아동 인권’에 집중하고, 마을 활동으로 이어지는 장기 강좌가 드물기 때문이다.
‘아동이 살기 안전한 마을’을 만드는 데는 온 사회가 필요하다
이 사업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 과연 지역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인터뷰 참가자들에게 꿈을 물었다.
동부교육지원청에서 일하는 이남희 조정자는 “미국에서는 마을의 커뮤니티위원회가 학교 교사를 심사한다”면서 공동체를 강조했다. 한국에서도 지역을 제대로 알고 그에 따른 아동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교사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이런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동 인권을 옹호하는 마을의 역량이 커져야 한다.
한효원 중랑교육복지센터장은 “중랑구가 타 자치구보다 발 빠르게 아동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사업을 지원하면서 함께 하면 좋겠다”면서 민관 협업의 확장을 이야기했다.
활동가들은 “단 시간 안에 확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이를 돌보는 데는 꾸준한 노력도 치열한 고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좌충우돌의 과정을 지켜보는 묵묵한 기다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 마을을 ‘아동이 살기에 안전한 마을’로 만드는 데에도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중랑구 아동들은 물론 마을도 함께 자랄 것이다. 중랑구의 실험이 확산된다면 우리 사회도 더불어 변화할 것이다. 열매 맺는 날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나무는 이미 뿌리를 내렸다. 우리가 정성들여 기른다면 푸르게 자랄 것이고, 우리가 모른 척 한다면 말라죽을 것이다.
아동을 키우는 마을을 만들 것인가, 아동을 방치하는 마을을 만들 것인가. 지금에 머물 것인가, 함께 변할 것인가. 중랑구를 지켜보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질문이다.
글 박효원 ㅣ 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