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이 <밀어주기 캠페인>을 시작합니다. 한 달에 한 번, 작은변화를 만드는 시민단체를 소개하고, 시민들의 기운을 팍팍 모아 이들의 활동을 밀어줍니다. 아름다운재단의 <2019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사업>에 선정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은 전국에 있는 토종씨앗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합니다. 단체들이 외로운 싸움을 하지 않도록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을 밀어주세요! |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농부’라는 단어를 듣고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아마도 십중팔구 뜨거운 태양 아래 땀 흘려 논을 일구는 구릿빛 얼굴의 남성을 생각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인식과 제도도 다르지 않다. 지난해 한 회사는 농기계를 여성으로 비유하고 기계 사용을 성관계처럼 묘사한 광고를 냈다. 농부는 당연히 모두 남성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현재 ‘농민’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는 방법 중에는 ‘농지 300평 이상’을 가진 자라는 조건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 땅은 남성 명의라서 여성은 농민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출하도 대부분 남성명의로 하므로 연 120만원 이상 농산물 판매 조건을 만족하는 여성농민은 많지 않다. 농사는 지었지만, 출하, 토지주가 모두 남성명의라 “농민”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농사의 절반 이상은 여성의 몫이라는 사실 말이다. 여성들은 집 가까운 곳에 텃밭을 만들어서 다양한 작물을 심어놓고 가족들의 먹을거리를 챙기는데, 이러한 텃밭 농사야말로 토양에도 좋고 식물 종 다양성에도 좋은 친환경적 방식이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이 농생태운동과 토종씨앗 지키기 활동에 나선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렇게나 훌륭한 여성들의 농사 방식을 널리 전파하고 싶어서. 여성 농민들이 당당히 어깨 펼 수 있도록 기운을 불어넣고 싶어서.
사실 전여농은 이미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고, 더 일을 벌일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유화영 사무총장은 논산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서울로 출근을 했고, 윤정원 조직국장은 교육 사업부터 국제연대 사업까지 맡았다. 꽉 들어찬 사업에 올해는 하나를 더 얹었다. 아름다운재단 지원을 받아 ‘토종농사 전문가 양성과정’을 만든 것이다.
논부터 텃밭까지, 논밭부터 부엌까지
이번 프로그램은 농사법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 진행이 가능한 전문가들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15명을 목표로 했는데 총 25명이 참여했고 16명이 과정을 수료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여성 농민들이 이렇게 많이 참여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윤정원 국장은 “작물 사진도 정리하면서 처음 PPT 자료를 만들고, 남들 앞에서 시강을 하면서 여성 농민들이 자신감을 얻었다”고 전했다. 한 여성 농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시강을 하고서 “그 동안 농사를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을에 돌아가서도 내 농사법을 강의해보겠다”고 말했다.
이러한 반응은 그 동안 여성 농민들이 자신의 농사법에 자긍심을 갖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여성 농민들의 농사 지식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했고 사회적 인정을 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내려온 이러한 지식들은 오랜 세월 농민의 실험과 도전이 낳은 과학적 결과물이다.
여성 농민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먹거리를 책임지느라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다양한 작물을 가꾼다. 그 작물들의 씨앗을 모으고 나누고 물려주는 것도 여성들의 일이다. 이렇게 여러 품종을 다루기 때문에 농사 지식도 넓다. 게다가 직접 요리를 하기 때문에 작물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각각 어떤 맛과 영양이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농사를 짓다 보니 친환경적인 방법으로도 농사가 가능하다. 여성 농민들은 천적을 이용해서 병충해를 예방한다. 섞어짓기∙돌려짓기 등으로 땅을 보호한다. 유화영 총장은 “한 땅에 대파∙고추∙수수∙들깨를 돌려가면서 심으면 땅이 좋아지고 작물들이 잘 자란다”면서 “이 작물들을 보통 ‘4형제’라고들 하는데 우리끼리는 ‘4자매’라고 부른다”고 알려주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농사는 생태계의 에너지와 농민의 지혜가 함께 하는 농사이다. 거대 기업의 종자나 화학 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농사이다. 풍요로운 땅에서 다양한 품종의 식물들이 자라나는 농사이다. 전여농은 이러한 농사를 ‘농생태 운동’이라고 표현했다.
생태계 에너지와 농민의 지혜만으로 짓는 농사
이미 유기농이 확산되고 관련 시장도 커졌는데, 왜 ‘농생태 운동’이 필요할까? 유화영 총장은 “지금의 유기농 관행은 인증(유기농 마크) 중심인데 소규모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이런 인증을 따기는 매우 어렵다”고 전했다. 게다가 가격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비싼 유기농 자재를 쓰는 것도 농민들에게는 무리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은 감히 유기농을 시도하지 못한다. 친환경 유기농이 ‘친농민’은 아닌 것이다. 땅과 농산물, 사람의 유기적 관계를 회복하려고 한 유기농의 취지와는 많이 멀어진 셈이다.
그에 대한 대안이 대기업의 유기농 자재 대신 자연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는 농생태 방식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토종씨앗’이 등장한다. 기업의 종자 판매에 의존하지 않고 농민들 스스로 작물을 심고 기르기 위해서는 일단 농민들이 씨앗이 갖고 있어야 한다.
기업에서는 돈이 될 만한 품종 위주로 종자를 개량해 판매한다. 얼핏 들으면 생산성이 높은 개량종이라 농민들에게도 좋은 일 같아 보이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기업들은 종자와 함께 그 품종에 맞는 비료까지 묶어 판다. 이런 종자들은 대를 잇지 못하는 ‘터미네이터(종결자)’ 씨앗이라서 농부들은 매년 기업으로부터 종자와 비료를 사야 한다. 빚을 정산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단지 농가 수익만의 문제는 아니다. 종자가 줄어들면 생물 다양성이나 식량 주권의 측면에서도 매우 위험하다. 대량 생산되는 농작물에 치명적 병충해가 발생하면 우리의 논밭과 식탁은 당장 황폐해질 것이다.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들이 쉽게 같은 병에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윤정원 국장은 “예전에는 3~4가지의 벼를 같이 심었는데, 그러면 문제가 생겨도 1~2종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기후에 적응하면서 내려온 것이 토종 씨앗”이라고 설명했다. 한 때 토종 벼의 품종은 1천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지금은 130여 종만 보존된다.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2배의 속도로 종자를 잃어가고 있다.
여성 농민의 자부심… “이제 소비자들도 같이 합시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생태적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사람, 토종씨앗을 간직하는 사람은 바로 여성 농민이다. 특히 할머니들은 토종씨앗의 보고이다. 전여농은 할머니들을 찾아가서 씨앗을 받아오고 이를 밭에 뿌려 더 많은 씨앗을 거둔다. 그리고 여러 농민들에게 이 씨앗을 나눈다.
윤정원 국장은 “토종 작물은 각자 개성이 강하고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전여농은 체험 프로그램을 할 때 제주도 구억리 마을에서 자라는 ‘구억배추’로 전을 부친다. 구억배추는 달달하면서도 살짝 알싸한 맛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배추와 갓의 중간 느낌이라고 했다.
유화영 총장은 “저희는 자부심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2006년 토종씨앗 지키기 활동을 가장 먼저 시작한 단체가 전여농이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윤정원 국장은 “씨앗 얘기를 하니까 우리 회원들 눈이 반짝였다”고 전했다. ‘내가 지킨 씨앗이 이런 거였구나’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자부심이야말로 여성 농민을 지탱하는 힘이다. 전여농은 자부심과 긍지가 넘친다. 그래서 힘도 세고 욕심도 많다. 앞으로 토종 씨앗과 작물들로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고 싶다. 여성 농민들의 농사 노하우를 모아서 ‘농사비법 대회’도 열고 싶다. 당장 내년에는 농생태적으로 농사를 지어온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구술하고 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아무리 활동가들이 욕심을 낸다고 해도 농업이 점점 힘을 잃어가는 시대, 여성 차별이 아직 강력한 이 시대에 여성들이 농민 운동을 한다는 것은 분명 가시밭길일 것이다. 여성 농민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그래서 전여농의 두 베테랑 활동가는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같이 하자”고 손을 내민다.
“여성 농민들은 가치를 정말 많이 생각해요. 지구도 지키고 종자도 지키고 국민의 건강도 지키고 싶어요. 다른 분들도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어요. 내년에 저희가 ‘토종이 있는 추수한마당’을 크게 하는데 이 자리에 많이 오시라고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유화영 사무총장)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하루를 가든 일주일을 가든 기회를 잡아서 일단 농촌에 가봐야 해요. 잠깐 체험해보고 학을 떼더라도, 그래야 농사가 힘든 것도 알고 내 몸에 좋은 먹을거리가 뭔지도 알잖아요. 조금 어렵더라도 한 번씩 휴가에 농사하러 가면 어떨까요?” (윤정원 조직국장)
글 |박효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