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는 지속가능한 사회발전을 위한 주요한 동력으로, 사회의 다양한 문제해결, 정부의 공공재 공급의 보충적 역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권리의 옹호, 공론장과 사회적 자본 창출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대부분 비영리기반의 공익활동가들은 사회의 발달에 따른 시장과 정부의 대응에 비해 심각한 정보 격차의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공익활동가 해외연수 지원사업은 이들의 활동역량을 강화하고 한국시민사회에 해외시민사회운동관련 지식과 정보를 축적하여 지속가능한 공익활동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지원사업입니다. 이 글은 2019 공익활동가해외연수지원사업에 선정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WRI) 국제컨퍼런스 참가 프로젝트팀]에서 활동한 전쟁없는세상 이용석님의 후기입니다. |
평화에게 기회를
“라, 안티, 안티밀리타리스타” – 국제컨퍼런스 〈사회운동에서의 반군사주의〉 참가 후기
아뿔싸. 콜롬비아 보고타가 적도 근처인 줄만 알았지 해발 2700미터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나는 반바지와 반팔, 그리고 맨발에 샌들을 신고 보고타 국제공항에 내리자마자 추위에 몸을 떨었다. 하기사 학교에서 남미에 대해 배운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남미 대륙의 입구에 위치한 콜롬비아의 역사와 문화, 기후 등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그나마 학교 밖에서 주워들은 것들도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자살골을 넣은 에스코바르라는 선수가 나중에 술집에서 총 맞아 죽었다는 것, 아니면 또 다른 에스코바르가 마약왕이고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콜롬비아에서 행사했다는 이야기, 대체로 조금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었다.
추운지 더운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무서운 곳이라 생각만 했으니 역시 두려움은 무지에서 잉태되는가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니 알려고 노력조차 해보지 않은 낯선 땅 남미 대륙,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이하 WRI)의 국제 컨퍼런스 <사회운동에서의 반군사주의 Antimilitarism in Movement>가 열렸고 전쟁없는세상 사무국과 함께 다녀왔다.
패널 토론: 군사주의의 다양한 모습과 마주하기
2박 3일로 진행된 컨퍼런스는 군사주의가 각각 지역, 대륙, 세계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고 그에 맞선 반군사주의 운동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굵직한 축이었다. 패널 토론 첫날엔 팔레스타인과 콜롬비아의 활동가들이 각각 국가적, 지역(대륙)적, 세계적 차원에서 군사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야기했고, 둘째날에는 스페인령의 카나리제도, 남미의 멕시코와 볼리비아와 콜롬비아, 아프리카의 남수단의 활동가들이 군사주의에 맞서 어떻게 저항하는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짧은 영어 실력과 남미에 대한 부족한 역사, 문화적 지식으로는 콜롬비아와 남미 지역에서 군사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한국과는 무척이나 다른 방식으로 군사주의가 작동하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예컨대 징병제만 보더라도, 한국은 징병제가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근간에 국가안보이데올로기가 크게 작동한다. 반면 남미 여러 나라의 징병제는 국가안보이데올로기보다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중요한 축처럼 보였다. 병역거부를 법률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들은 심한 경제적 차별을 겪는다든지(베네주엘라) 혹은 군대 징병제가 아니지만 군대 다녀온 사람들에게 큰 경제적 이득을 준다든지(페루) 하는 식으로 군대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미 대륙 전체적으로 보자면 중산계층의 징집률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고, 하층계급이 군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하층계급은 병역거부에 대한 정보를 접근하기 어려워서 대부분 병역거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고 한다. 병역거부는 결국 남미의 많은 나라들에서 이론적으로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사회경제적 차별이 심각하거나 군에 주로 입대하는 하층계급의 경우엔 병역거부의 권리 자체를 알 수 없어 못하는 등 병역거부권이 온전히 보장된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 핵심 고리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
군사주의가 자본주의와 만나는 최전선에는 군수산업체들이 있다. 록히드마틴, 보잉, BAE처럼 1세계 국가들에 위치한 무기 회사들과 한국의 한화, 풍산 같은 무기 회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군수산업체들의 활동과 이에 맞서는 평화활동가들의 저항 또한 한국과 남미는 큰 차이를 보였다. 군수산업체의 최첨단을 달리는 유럽과 미국의 평화활동가들은 자국 군수산업체들의 무기 생산과 수출에 저항한다. 한국에서도 확산탄 저지 캠페인, 최루탄 수출 반대 캠페인, 무기 박람회 아덱스 저항행동 등 무기 산업에 맞선 평화운동이 존재한다. 반면 남미 여러 국가들에서 군수산업체들은 무기 생산보다는 지하 자원의 채굴에 힘을 쏟았다. 이 채굴 과정은 지역민들의 삶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평화활동가들은 지역민들의 생존권 투쟁에 적극 함께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평화운동 이슈에서 지역민들과 함께 싸우는 경우는 평택 대추리나 제주 강정마을처럼 국가안보를 핑계로 군사기지가 드러서는 곳으로, 국가안보를 위해 지역민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주된 논리구조라면 남미에서는 지역민의 삶을 착취하는 논리의 근간에 자본주의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었다.
테마 그룹과 워크숍: 교류와 배움의 장
활발한 교류는 패널 토론보다는 테마 그룹 활동과 워크숍에서 이루어졌다. 참가자들은 크게 세 가지의 평화-정의로운 평화, 지속가능한 평화, 다양한 평화로 그룹을 나누고 그 안에서 또 주제별, 이슈별로 그룹을 나누어 토론을 이어갔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정의로운 평화-억압적 모델에 대한 저항(병역거부)’ 그룹과 ‘지속가능한 평화-개발(무기 거래)’ 그룹으로 나뉘어서 참여했다. 각 그룹별로 서로의 활동을 소개하고 공통의 이슈를 찾고, 이슈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을 모색했다. 각 대륙에서 다양한 언어를 쓰는 활동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인데, 논의를 돕는 재미있는 툴과 프로그램으로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토론을 이어갈 수 있었다. 내가 참여한 ‘정의로운 평화-억압적 모델에 대한 저항(병역거부)’ 그룹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활동과 생각을 확인하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지만, 다른 두 활동가들이 참여한 ‘지속가능한 평화-개발(무기 거래)’ 그룹에서는 함께 슬로건을 뽑고 각 지역에서 무기박람회가 열릴 때 공동 행동을 조직하는 것까지 이야기되는 성과를 거뒀다.
저녁 시간은 주로 참가자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워크숍이 배치되었다. 다양한 활동에서의 고민과 경험을 나누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는 워크숍들이었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은 첫날에는 콜롬비아 활동가들과 함께 ‘병역거부를 위한 캠페인: 한국과 콜롬비아의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워크숍을 진행했다. 한국과 콜롬비아 두 나라의 병역거부 운동이 걸어온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살펴보며, 각 나라의 병역거부 운동이 거둔 성과와 여전히 남아있는 과제를 살펴보았다.
둘째 날에는 전없세 활동가 오리가 WRI의 비폭력 워킹그룹의 일원으로 준비한 ‘건설적 프로그램 트레이닝’에 참여했다. ‘건설적 프로그램 트레이닝’은 한국에서도 전없세 활동가들이 트레이너로 여러 번 진행한 주제인데, 특히 다른 주제에 비해 진행이 어렵다고 느끼는 주제였다. 트레이닝 자체는 재미있는데 끝나고 나면 추상적인 이야기들만 둥둥 떠 다니고 구체적으로 남는 것은 없는 느낌이 들어서 그랬다. 이번 워크숍 참여를 통해 추상적인 아이디어들을 현실적으로 이어줄 논리 구조를 찾아보는 방법을 배웠으니 커다란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 행동과 그 밖의 것들
컨퍼런스의 마지막은 참가자들이 함께 직접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연극 형식의 퍼포먼스를 콜롬비아의 활동가들이 준비했다. 두 달 동안 시나리오를 쓰고 메세지를 다듬었다고 한다. 콜롬비아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인데, 경찰 폭력으로 죽은 활동가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연극이었다.
유난히 파란 하늘과 낮은 구름, 벽마다 색색의 그래피티가 넘치는 보고타 시내 한복판 도로에서 100여명이 넘는 각 대륙의 참가자들이 퍼포먼스형 시위를 함께 했고,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들도 적극 참여했다. 퍼포먼스형 시위는 우리 또한 많이 활용하는 방식이어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활동가들과 함께 시위에 참여한다는 사실이 묘한 긴장감과 설레임을 안겨주었다.
고백하자면 마치 대학 신입생 시절 처음 집회에 참여할 때처럼 들뜨고, 살짝 두렵고, 무척 두근거렸다. 컨퍼런스 공식 프로그램 외에도 활동가들은 부지런히 미팅을 조직하고, 액션을 논의했다. 전쟁없는세상 또한 한국 병역거부 운동을 위한 이야기를 여러 활동가들과 나눌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 WRI가 함께 대응하기로 했고, 병역거부 운동의 새로운 도전에 대해 살펴보는 국제 컨퍼런스를 한국에서 개최할 것을 논의했다.
짧은 일정과 부족한 언어 실력, 더 부족한 배경 지식 때문에 깊이 있는 이해는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군사주의는 단일한 얼굴이 아니며 다양한 사회모순과 만나서 여러 형태로 우리의 삶을 착취한다는 감각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동안 한반도의 특수한 역사에서 기인한 국가안보이데올로기 중심적인 군사주의만 보고 살아왔던지라 군사주의의 여러 얼굴에 대해 체감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매우 신선한 자극이 되는 경험이었다. 또한 군사주의에 맞서는 여러 지역의 평화활동가들과 만나고 그들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낀 것도 내게는 커다란 자극이 됐다.
어떤 이슈들은 지구적 차원과 지역적 차원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데, 반군사주의 평화운동의 이슈가 딱 그렇다고 생각한다. 넓은 시선과 구체적인 실천, 새로운 경험들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국제컨퍼런스 참가는 의미 있는 일이다. 거기에 더해 구체적인 액션 계획까지 세워왔으니, 이만하면 이번 국제컨퍼런스 참가는 전쟁없는세상에게 무척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글, 사진 ㅣ 전쟁없는세상(www.withoutwar.org) 이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