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은 공익활동을 하고자 하는 시민모임, 풀뿌리단체,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합니다. 특히 성패를 넘어 시범적이고 도전적인 프로젝트를 지원함으로써 공익활동의 다양성 확대를 꾀합니다. ‘2019 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에서 어떤 활동들이 진행되는지 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기록이란 무엇일까요?
인권기록센터 ‘사이’의 세 사람은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활동을 통해 ‘기록’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해나갔습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 사회에 기억, 기록이라는 말의 중요성이 새롭게 주목받았습니다. ‘기록’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떠한 사실을 적어두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록을 책이나 디지털화된 문서 등의 어떠한 ‘기록물’을 만드는 행위, 다시 말해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것에 국한해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월호참사 이후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기록’의 의미는 이러한 의미를 넘어서는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상규명을 위한 운동이 전개된 초기부터 시민들 사이에 기록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사건의 실체가 충실히 기록되어야만, 이를 토대로 세월호참사의 진상규명과 유사한 사건의 재발 방지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기록이란 크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증거’를 남겨두는 행위입니다. 두 번째는 세월호참사를 우리 사회가 어떠한 사건으로 기억할 것인지, 즉, 참사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만드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앞선 두 가지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애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초점은 바로 ‘사회적 기억’이라는 말에 맞춰집니다.
사회적 기억에 관한 연구를 처음 제기한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기억을 하는 것은 사건을 재구성하는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과거의 사건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형성은 현재의 정치적 요구와 권력 관계 속에서 해석과 선택을 거치면서 이루어집니다. 사회적 기억은 단순히 개개인의 기억 총합이 아니며, 대개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부합하고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데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무엇이 사회의 지배적 기억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이 투쟁에서 우리가 어떤 역동을 이루어낼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기록활동에 함께하며 늘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키는 목소리들
우리는 2019년 한해 동안 아름다운재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사회의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를 기록했습니다. 참사 피해자, 국가폭력의 피해자, 중증화상 경험자, 탈북여성, 장애를 가지고 아이를 양육하는 여성, 탈가정 청소년, 조현병을 가진 여성, 이혼한 싱글맘, 70세 홈리스여성, 스쿨미투운동을 하는 청소년 등으로 사회가 그들의 정체성을 납작하게 호명하지만, 결코 그렇게만 호명될 수 없는 삶의 복잡성을 지닌 이들의 목소리입니다.
한국사회가 차별과 혐오의 정치로 들끓고 있습니다. 차별과 혐오가 한국사회에서 사라진 적은 없지요. 그러나 이 시대의 혐오정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위기와 한국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특별한 현상이며,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변화라는 점에서 심각합니다. ‘헬조선’으로 표현되는 희망 없는 삶에 대한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약자를 출구로 삼았다고 이야기됩니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는 자기보호의 공포가 강하게 작동합니다. 정체성은 저항의 출발점이 아니라, 타자를 배제하기 위한 선긋기가 되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소수자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소수자의 삶이란 이렇듯 고통스럽다거나, 반대로 이렇게 희망적인 삶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두 관점의 이야기 모두 소수자의 삶은 ‘문제’로만 남습니다. 소수자는 타자화된 존재입니다. 그의 삶을 구성한 맥락이 지워진 채 사회적 통념과 편견으로 재단된 평면적 존재로 인식됩니다. 타자화를 경계한다는 것은 내가 얼굴을 마주한 상대가 고유한 역사와 감정과 사고 체계를 가진 한 사람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고 동일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조건 속에 놓여 있으며, 세상과 어떤 상호작용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를 이해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이 겪는 억압은 그 사람이 놓인 다양한 조건들을 섬세하게 고려해 분석되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억압이란 복잡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늘 삭제된(숨겨진) 맥락의 가능성을 질문해야 합니다. 새롭게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차별의 양상과 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고 재구성할 통찰력과 언어를 새롭게 채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서 차별과 고통을 앎의 자원으로 활용해, 세상에 저항하거나 균열을 일으키고,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간 이들이 우리 인식의 지평을 넓혀왔습니다. 그러한 이들의 목소리를 읽어주시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새로운 질문을 함께 찾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 사진 |사이 시민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