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이하 지리산 센터)가 생긴 지는 2년이 되었지만 사실 지리산권 안에서도 시민사회 안에서도 아직 지리산 센터를 아는 이가 많지 않다. 긴 이름 탓일까, 아니면 지역이라는 특성 때문일까. 지리산 센터의 이름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게 쉽지가 않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콘텐츠를 만들어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을 맡고 있는 이가 바로 ‘누리’다. 감각 있고 따뜻한 콘텐츠로 지리산 센터 SNS, 홈페이지 때로는 현수막과 포스터 등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누리. 2년 전 지리산 센터와 함께 일을 시작했을 때, 지리산 센터를 “지리산을 들썩이게 할 작은변화의 시작점!” 으로 소개했던 그에게 2년이 지난 지금, 지리산 센터와 지리산은 어떤 의미로 변했을까?
누리입니다.
지리산 센터에서 홍보와 모금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누리입니다. 지리산 센터가 처음 공식적으로 오픈한 2018년부터 함께 일했어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페이스북 페이지과 홈페이지에 각종 소식과 카드뉴스 등의 콘텐츠를 올리는 일로 여러분(?)을 가장 많이 만나고 있습니다. 홍보물을 디자인하거나 홈페이지를 사용하기 편하게 고치는 일처럼 집중해서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나 있는 일들을 할 때 가장 좋아요. 퇴근 후에는 보통 두문불출하고 책을 읽으면서 혼자 여가시간을 보낼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체크리스트를 줄줄이 써놓고 도장깨기 하듯이 이런저런 콘텐츠를 소비하는 편이에요.
지리산 센터 활동가들은 각자 산내, 지리산 센터와 인연 맺은 경로가 다 다르더라고요. 누리는 어떤 인연으로 지리산 센터와 함께 하게 되었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 가족 단위로 귀촌했어요. 지금 지리산 센터가 있는 남원시 산내면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다가 대학 때 서울 유학을 가면서 상경했고, 몇 해 전에 다시 내려오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지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백수가 되어 내려와 있지만 곧 다시 올라갈 거야’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산내가 의외로 심심하고 안락한 게 살기 편했고요. 지금도 지리산이음이 운영하고 있는 마을카페 토닥에서 당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었는데요. 생각보다 마을의 분위기도 열려있고, 안 좋은 문화가 있다면 바꿔가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의외로 문화적 자본이 풍요롭고, 더 있어도 좋을 만한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리산권이 저 같은 청년들이 보기에 ‘고향도 지낼 만하다’, 나아가서는 ‘여기 있으니까 좋다’고 여길만한 지역이 되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고향으로 여기고 살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그렇다면 누리에게는 지리산이 좀 남다른 의미이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지리산권이라고 묶어서 말하지만 사실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이 모두 다르다는 걸 점점 실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남원은 다른 지역보다 추운 편이에요. 특히 산내는 남원 시내보다 보통 기온이 3도 정도 더 낮거든요. 구례나 하동에 가는 길에는 터널 하나만 지났는데 봄꽃이 피어있다거나… 그런 광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동에는 심지어 바다가 있다구요. 지리산을 둘러서 가야 하니까 이동 거리도 생각보다 멀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웃처럼 느껴진다는 점이 신기해요. 얼마 전에 기차를 탈 일이 있었는데 KTX 매거진 커버 사진이 하동 차밭이더라고요. 다른 코너에는 구례랑 남원도 실려있었고. 우리가 세트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말한 것처럼 지리산권이라고 해도 5개 시군이 각기 다르고, 그 안에 있는 면단위의 성향도 다 다르죠. 일하면서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홍보 방식에 대한 고민이 있어요. 60여 개의 면이 합해져서 5개 시군이 되는데, 그 60개의 면 중에는 시민사회의 움직임이 이미 활발하게 관찰되는 지역-이를테면 공모사업을 열었을 때 모임이 몇 개씩 지원하는 지역-들이 있고, 어떻게 뚫고 들어가면 좋을지 생각만 해봐도 아득한 지역들이 있어요. 이 격차를 어떻게 좁혀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 됩니다. 행사나 사업 홍보가 끝나고 버려지는 포스터, 현수막 문제에 어떻게 적절한 타협점을 찾고 해결하면 좋을지도요.
활동을 하면 할수록 고민도 많아지지만 또 기억에 많이 남는 장면들도 많을 것 같아요. 누리에게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에요?
구례 지역의 도서관 이슈를 둘러싼 흐름이 기억에 남아요. 군 행정과 예산을 공부하는 모임에서 넓지 않은 부지 한 곳에 각각 운영주체가 다른 두 개의 도서관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서 군과 대화에 나섰습니다. 간담회, 문화제 등 여러 방식의 대응을 시도한 결과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좋은 도서관은 무엇인지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 보여주자’는 결론으로 이어지면서 올해 초에는 마침내 ‘산보고책보고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고요. 이 싸움의 과정 중에 구례 시민사회의 물밑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리산 센터에서는 자세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지난 2년과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분들이 2020년 상반기 공모사업에 지원했습니다. 작은 움직임들이 지속적으로 연결되는 흐름 속에서 지역의 활력을 낳는다는 걸 실감했어요.
누리는 지금까지 정말 많은 작업물을 만들어 냈는데 (몇 가지나 될까요?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예요?
아직 오픈되지 않은 작업인데, 말해도 될까요? 후원회원 확대를 위해 만든 종이 마스킹테이프가 있는데, 지리산에 터전을 잡고 자라는 히어리·지리산하늘말나리·반달가슴곰 같은 친구들을 일러스트로 그려넣었어요. 손이 많이 갔고 예쁘게 완성된 작업인데 여러 일정 상 공개가 늦어져서 아쉬워요. 빨리 보여드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새로운 연도의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전년도에 무슨 일을 해왔는지 사업분야별로 총정리하는 ’20** 활동돋보기’ 카드뉴스가 있는데요. 한 번에 몇십 페이지씩 만들다보니까 고생하지만, 그 과정 중에서 저나 보시는 분들이나 지리산 센터의 지난 한해를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어서 해놓고 보면 뿌듯한 작업입니다.
저도 누리가 작업한 카드뉴스 좋았어요. 깔끔하게 정리가 딱딱 되는 게 진짜 좋더라고요. 그런 많은 작업을 할 때, 누리가 가장 세심하게 신경쓰는 건 뭐예요?
글쎄요, 예쁜지? 색 조합이 좋으면 일단 눈에 잘 들어오기도 하고요. 공모사업 같은 경우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의 양이 많아서 자유도가 낮은 편인데 그런 정보들을 빠뜨리지 않고 넣으면서 제 능력이 닿는 한 보기 좋게, 그러면서도 사업이 지향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밖에 신경 쓰는 부분은 가능하면 친환경 재생지를 사용하는 것,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아이콘 등의 사용을 지양하는 것, 화장실을 표현하는 아이콘을 써야 할 때는 치마 입은 여자, 바지 입은 남자가 나란히 서있는 모양보다는 가치중립적인 변기 모양을 고른다거나, 그런 식으로요.
평소에 누리의 작업물로만 만나다가 오늘 이렇게 깊이 있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마무리하면서 누리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묻고 싶어요.
더 공부해서 나중에는 농촌 특화형 디자인 사무소를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해요. 단체나 모임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이 있으면 포스터도 만들고, 평소에는 사과박스 디자인 같은 것도 하고, 게스트하우스마다 특징을 살린 명함도 만들고. 디자인뿐만 아니라, 고민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나누고 해결해나갈 컨설팅을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누리의 지리산 하동에 포스터 붙이러 갔다가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에 붙어있던 그림을 찍었습니다. 일단 할머니의 뿌듯함이 보는 사람한테까지 전해지고요. 그리고 이면지에 그렸다는 점이 재밌지 않나요? 할머니를 사랑하고 지구도 사랑하는 어린이인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