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경인일보)


한국에서 아시아계 이주민으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일민족 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은 못 사는 나라에 대한 편견을 가진 경우가 많다. 처음 보는 이주노동자에게도 무턱대고 반말을 한다거나, 결혼이주 여성은 가족들이 반대로 아이에게 엄마나라 말을 가르치지 못한다. 이는 같은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다. 미국이나 일본에 살면 교포라고 하지만, 중국에 살면 곧잘 조선족이라 부른다.   

이주민에 대한 제도적 장치 역시 차별적이다. 이주민들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가도 인정사정없이 잡혀간다. 여느 한국 아이들과 다름없이 태어나고 자란의 불법체류 이주민의 2세에게는 영주권과 교육권이 없다. 이주민들은 은행계좌를 하나 개설하려해도 힘들고,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것도 쉽지 않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노동자 하킴씨의 원래 직업은 시인이다. 필리핀 이주여성의 상당수가 교사출신이다. 그들이 일만하고 애만 낳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은 차별적 인식이다. 상당수이주노동자가 휴대전화를 갖거나 휴일에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어떤 한국인들은 불성실하다고 욕한다. 하지만 역지사지의 입장으로, 일본이나 미국의 불법체류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비슷한 처우를 받는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주민들이 위험한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고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혐오현상(Xenophobia)이다. 언론에서는 이주민에 의해 일어난 잔혹한 사건만 부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절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의식이 남아있는 한국에서 국내여성에 대한 외국인의 성범죄 보도는 적절한 수준이상의 과잉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오히려 아시아 출신 이주민의 범죄율은 한국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의 범죄율보다 낮으며, 한국인이 저지르는 범죄율보다도 현저히 낮다. 그에 반해 이주민의 범죄피해율은 한국인의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높게 나타난다.
 
한국인들은 외국에 사는 교포3,4세가 우리문화를 지키고, 한국말을 배우는 것에 감동한다. 하지만 한국에 사는 이주민에게는 한국말을 빨리 배우거나, 한국식으로 육아를 하라고 강요한다. 한국어에 왔으니 한국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동화주의적 입장이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저의 작은 소망은 우리 아이에게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을 베트남어로 들을 수 있고, 밤마다 같이 베트남의 시와 동화를 아이에게 읽어 주고 베트남 자장가를 불러주고, 베트남어로 속삭이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일까요? ” 베트남 결혼이주민 10년차 원옥금씨.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여성결혼이민자 사례 中)

이제 한국은 100만 명의 외국인이 이웃으로 살아가는 명실공이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달라진 사회에 맞춰 교육, 공공기반, 사회적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뜬구름 잡는 먼 얘기가 아니라 오늘 당장의 현실을 살기위한 문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다문화 기반이 잘되어 있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에서도 이민자 2세 폭동이 일어났다. 이제 프랑스의 일이 남의 일이 아닐 수 있다.

다행히 중앙정부와 자치단체는 이주민을 위한 제도적 지원방안을 만드는 초기단계에 들어서 있다. 하지만 많은 지원방안들이 한국 적응만을 강조하는 동화주의적 정책인 것이 아쉽다. 이처럼 공공영역의 다문화 정책이 실제 변화추세에 뒤쳐져 있다면, 사회와 민간의 역할과 책임이 그만큼 커진다.

이주민이나 한국인이나 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적용되는 기본적 인권이 있다. 생명권, 자유권, 노동권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기본적 인권이 불완전하게 보장되고 있다. 온전한 노동자의 지위를 제약하는 노동관계법이라든지, 출입국 행정에서 신체적 자유권에 부당하게 집행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소수자나 약자의 보편적 인권은 결국 적극적 차별철폐 조치(Affirmative Action, ex. 장애인 의무고용제)로써만이 보장이 가능하다.

기본적 인권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있다. 2차적 인권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인권이다. 이는 다름을 차별 없이 존중해주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지금까지는 다르다는 것은 전체의 조화를 깨는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학교에서는 한 명이 잘못해도 단체로 벌을 준다. 이는 전체를 위한다지만 거꾸로 전체를 힘들게 하는 비민주적인 독재와도 같다. 오히려 다르다는 것은 사회적 조화를 깨기보다는 오히려 더 풍요롭고 다양하게 만드는 재산이 된다. 다름을 존중하는 것은 전체의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는 민주주의적 규칙이 된다.

문화적 인권은 보호와 지원을 그 내용으로 한다. 소수자의 교육, 문화, 경제활동에 다수자에게는 주지 않는 가산점이나 혜택을 주는 것이다. 이를 두고 특혜적 조치(Privilege)로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다수자와 강자들이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강하고 특혜적인 기득권을 가지고 사는 것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평등적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다문화 감수성이란 다름을 존중하는 한국사회 구성원들이 얼마나 그 정당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문화 캠페인의 현장에서 만나는 시민들이나, 이주민을 위한 온라인 서명에 나타나는 네티즌들의 이주민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好不好)가 극명하게 나뉘는 양상이다. 어떤 이들은 힘내라고 격려하고, 어떤 이는 이 땅을 당장 떠나라 위협한다. 이는 한국사회의 한국인들의 다문화 감수성의 수준편차가 심하고, 이 감수성의 습득이 사회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이루어 졌음을 의미한다. 다문화 감수성이 순작용을 하려면 개인적 차원보다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작용해야하는 데 말이다.

다문화 감수성은 다수자의 예의이자 공존의 방안이다. 다수자는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당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소수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감수성이 약하다. 이러한 약한 감수성은 소수자들에게 작위·부작위, 의식·무의식적으로 침해와 차별을 가하게 될 수 있다. 감수성이 약한 사회에서 소수자는 평화롭게 공존하지 못하며, 어쩔 수 없이 점차 불만적이고 반사회적 입장을 가지게 되고,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면 큰 사태로 번지기까지 한다. 미국의 히스패닉 폭동이나 흑인폭동이 그 예가 된다. 다문화 감수성은 현대사회의 기본적인 상식과도 같이 모두가 가지고 있어야 할 인식이다.

이러한 다문화 감수성은 사회가 제공하는 일상적 경험을 통해 습득되고 강화된다. 감수성을 높이자고 날을 잡아 특별교육을 실시한다거나, 제도적 강제를 가할 수는 없다. 이주민들의 생활을 왜곡 없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감수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학교를 통한 다문화교육이나 이웃으로서 이주민이 등장하는 방송프로그램이 있겠다. 또한 지식과 문화를 접하는 도서관에 이주민들을 위한 아시아 서적이 비치되어 있는 것도 한국인들의 다문화 경험의 중요한 기회가 된다.

(사진: 아름다운재단)

 

“도서관에 비치된 외국서적이라고 함은 영어와 일본어 책만을 말한다.”
“적어도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에는 아시아계 책이 있어야 한다.”
“이주민이 많은 지역 도서관에는 그들의 언어로 된 책이 있어야 한다.”
– 아름다운재단 <책 날개를 단 아시아> 캠페인 페이지

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이주민에 대한 정치, 경제, 사회적 인권은 늘 이슈의 중심에 있지만, 이에 비해 다소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다문화 인권은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다문화 감수성은 보편적 인권보다는 다문화 인권을 강조할 때 높아진다. 왜냐하면 보편성 인권은 누구나 똑같이 평등함을 강조하지만, 다문화 인권은 다름을 존중하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문화는 말과 글을 담은 책으로 전승되고 향유된다. 따라서 책은 문화의 기본이 되는 요소이다. 문화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책과 같은 문화 컨텐츠를 공급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위해 민간이 운영하는 이주민 도서관에 이주민 언어의 책으로 공급하고, 공공도서관에서는 이주민이 읽을 수 있는 각국의 책을 비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책은 이주민에게 현실적으로 유일한 문화활동이다. 이주노동자들은 노동 후 별다른 여가활동을 즐길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들에게 자국어 책은 거의 유일할 문화 컨텐츠다.  

“국내 거주 네팔인 라미차네씨의 2007년 독서량 1권, 그마나 떠나올 때 가져온 책을 다시 읽은 것이다.”
      
– 아름다운재단 <책 날개를 단 아시아> 캠페인 페이지

전국에는 600여 개의 민간 이주민 도서관이 있으나, 이중에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규모는 20개 안팎으로, 대부분 사랑방 문고 수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주민 도서관은 귀국자가 남기고 간 책이나 알음알음으로 부처온 책에 의존해 책장을 채우고 있다. 이 도서관들은 열악한 시민단체가 운영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새로운 책을 구비할 비용이 없다. 

아름다운재단의 <책 날개를 단 아시아>는,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아시아를 여행하고 돌아온다면 현지에서 책을 사서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라는 캠페인이다. 혹은 여행을 떠나지 않는다면 가진 아시아 책이나 책값을 기부해달라는 권한다. 이렇게 모아진 책과 기부금으로 구매한 아시아 책은 공모를 통해 선정된 이주민 도서관에 지원된다.

“5천원 이면 라오스에서 온 엄마가 아이에게 엄마나라 동화책 1권을 읽어 줄 수 있습니다.”
“1만원 이면 베트남에서 온 나이어린 엄마에게 모국어 육아책 1권을 보내줄 수 있습니다.”
“5만원 이면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들 사랑방의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워줄 수 있습니다.”
     
– 아름다운재단 <책 날개를 단 아시아> 캠페인 페이지

아름다운재단과 같은 민간단체에서 이주민 도서관 지원하는 것과 별개로, 공공 도서관과 같은 공공영역에서도 이주민에게 책과 같은 문화 컨텐츠를 제공해주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동네마다 있는 공공 도서관에는 국내 외국인 거주비율의 증가에 맞춰, 이주민을 위한 외국서적 비치를 확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해당 국가의 공립도서관과 결연을 맺어 상호 책 교환 사업을 진행하는 것도 좋다. 특히 이주민의 거주비율이 높은 곳에 지역에는 이주민을 위한 공공 도서관 건립할 필요도 있다. 그리고 육아 서적이나 노동관계 서적을 각국어로 번역한다든지, 이주민들의 문화적 모임을 지원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들은 이미 일부 공공 도서관이나 정부에서 추진하거나 계획 중에 있다. 그러나 한국기업의 진출이 많은 베트남에 편중되는 현상이 심하다.

그리고 정부와 공공 도서관들의 노력에 더불어 시민단체와 언론과 같은 사회적 노력도 중요하다. 언론은 이주민에 대한 배타주의, 동화주의적 보도를 자제해야 하고, 시민단체는 이를 모니터링 해야 한다. 아름다운재단 <책 날개를 단 아시아>류의 캠페인이 더 많아져야 한다. 기업들은 사회공헌활동의 한 방향으로 다문화 인식 캠페인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경로의존성이 굳어진 기성사회의 인식을 변화 하는 것은 정말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정부의 책임만 따지고 있을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문화 시대는 현재형이기도 하지만, 미래형의 성격이 크다.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다문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일부 학교에서는 이미 이주민이 진행하는 특별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영어구사가 가능한 이주민의 영어교사 채용도 늘고 있다. 정부가 이러한 사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각급 학교에 다문화 교육을 정규 커리큘럼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또한 민간단체에서 진행하는 다문화 교육캠프를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다문화 교육은 아이들에게 영어몰입의 편협한 국제적 시각을 개방적으로 조정해줄 대안적 교육방안으로 작용할 수 있다.

끝으로 현재 운영중인 민간 이주민 도서관들은 서로 연대하고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정부의 지원을 강제하고, 열악한 책구비 상황을 상호 책교환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네트워크에 이주민 자원봉사인력, 한국의 각국 언어전공자와 학자 등이 참여한다면, 책뿐만 아니라 인적자원의 교류도 가능할 것이다. 

글의 원본 http://romaroo.blog.me/50046269237 (널널한 오윤씨의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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