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료수 한잔 드시고 가세요. 어르신들을 위한 모금 활동에 함께 해주세요!”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8월 어느 날, 의정부시 최대 번화가인 중앙로 한복판에 쩌렁쩌렁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인공은 바로 의정부 무지개지역아동센터 청소년들. 난생처음 거리 모금을 해본 아이들은 처음엔 쭈뼛거리며 구석으로 숨기 바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낯선 어른들에게 먼저 다가가 음료를 권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목이 터져라 거리 모금을 진행하며 몸은 녹초가 됐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엔 반짝이는 단어 하나가 깊게 새겨졌다. 바로 ‘나눔’이다. 저 멀리 모르는 누군가가 아니라 우리 동네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이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가 아니라 나눔 주제부터 모금 계획까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해낸 경험은 아이들에게 나눔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는 작지만 큰 깨달음을 안겨준 것이다.
아름다운재단의 청소년 나눔교육 프로그램 ‘반디 파트너’로 활약하며 올해 여름을 누구보다 뜨겁게 보낸 의정부 무지개지역아동센터 아이들에게 나눔은 더 이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생애 첫 나눔을 발견하다
“지역아동센터는 저소득 가정의 아이들에게 방과후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에요. 무료로 운영되다 보니 외부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감사한 일이지만 혹시 아이들이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주변과 나누고 베풀 수 있는 활동을 해보자고 계획했는데, 막상 찾아보니 청소 같은 봉사활동이 전부인 거예요. 그러다 우연히 아름다운재단의 반디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이거다 싶었죠. 사실 내 것을 나누자고 하면 아이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이나 상처가 될 수도 있는데, 반디는 모금을 통해 기부하는 거니까 그런 걱정이 없더라고요. 거리에서 모금 활동을 해보는 것도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았고요.”
은효정 사회복지사의 판단은 적중했다. 나눔이라고 하면 당연히 가진 돈을 내어놓는 것이라고 여겨왔던 아이들에게 모금 활동을 전면에 내건 반디 프로그램은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대로 따라가는 대신, 기부하고 싶은 대상과 원하는 모금 방식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도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평소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던 아이가 거리 모금에서 돌연 목청을 높이며 낯선 어른들을 붙잡아 세운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반디 활동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무언가를 해본 첫 경험일지도 모를 일이다.
“모임 전에 아이들에게 우리 동네에 필요한 나눔이 무엇인지 각자 고민해오라고 했거든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별 기대를 안 했어요. 그런데 그날 한 아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동네를 다니고 있는 거예요. 평소 생각 없이 지나쳤을 동네 곳곳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기특한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다음날 나눔 주제를 논의하는데 그렇게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지 정말 상상도 못했어요. 반디 프로그램 덕분에 아이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라 주변을 여유롭게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정말 뿌듯해요.”
낯선 어른에게 인정받고 지지받는 특별한 경험
의정부 무지개지역아동센터의 반디 활동은 ‘100%’팀과 ‘아낌없이 주는 나무’팀으로 나눠 진행됐다. 먼저 ‘100%’ 팀은 동네에 고령의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에 주목해 ‘고령화’를 주제로 잡고, 모금액을 센터 인근의 저소득 어르신을 위한 양로원에 필요한 물품으로 기부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팀도 ‘노인 빈곤’에 초점을 맞춰 경제적으로 어려운 홀로 사는 어르신들에게 전통시장 온누리상품권을 전달했다.
모금 방법은 두 팀이 동일했다. 더운 날씨에 거리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방법을 고민하다 음료 판매로 의견을 모았다. 다만 ‘100%’ 팀은 더 많은 사람들이 동참할 수 있도록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에서 모금을 진행했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팀은 아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센터 주변 버스정류장에서 음료를 판매했다.
“첫 거리 모금이어서 잔뜩 긴장한 상태였는데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니까 많이 속상하더라고요. 다행히 무사히 잘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상처를 받았을까봐 많이 걱정했죠.”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아이들은 어른들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난생처음 맞닥뜨린 냉랭한 분위기에 처음엔 당황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단순히 음료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컵에 ‘OOO 님의 소중한 한잔’이라는 글자를 적어 나눔의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거리에 자기 이름이 적힌 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자 그걸 보고 모금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변 상점에 무료로 음료를 전하기도 했는데, 그 마음에 감동 받아 직원 수대로 음료를 사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 순간 아이들의 마음에도 감동이 일렁였다.
“반디 활동이 끝나고 며칠 지나 중앙로 근처 식당에서 아이들과 뒷풀이 겸 식사를 했어요. 그날 제가 좀 늦게 도착했는데 아이들이 저를 보자마자 대뜸 서명부터 하고 오라는 거예요. 식당 근처에서 어느 단체가 서명을 받고 모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이미 했으니 저만 하면 된다고요. 놀라운 변화죠. 사실 그 전까지는 누가 거리에서 서명이나 모금을 하면 그냥 지나치기 바빴거든요. 아이들이 거리 모금의 절실함과 소중함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값진 성과라고 생각해요.”
은효정 사회복지사는 모금 활동이 끝나고 며칠 뒤에 아이들과 함께 양로원을 찾았다. 자신들이 힘들게 모금한 돈이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직접 보여주고 싶어서다. 단순히 물품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보다 편안하게 생활하실 수 있도록 청소나 빨래 등 봉사활동도 병행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생각지도 못한 힐링의 순간을 경험했다.
“양로원 측에서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아이들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과 반디 활동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자신을 향해 박수를 쳐주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주는 어른들을 만났거든요. 어렵고 낯설기만 하던 어른이란 존재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경험을 처음으로 한 거죠. 어쩌면 아이들이 어르신들을 도운 게 아니라, 오히려 어르신들에게 아이들이 더 큰 사랑을 받은 건지도 몰라요. 이 경험이 앞으로 아이들이 나눔을 계속 실천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글 권지희 | 사진 무지개지역아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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