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은 사업명에 드러나듯이 공익단체의 활동에 ‘스폰서’가 되기위한 지원사업입니다. 시민사회의 시의성있는 단기 프로젝트 지원을 위해 다양한 사업들이 펼쳐지고 있는데요. 2020년 9월 ‘스폰서 지원사업’의 선정단체인 사단법인 청소년 노동인권 노랑에서 활동한 내용을 전해드립니다. |
📢 아래 활동은 코로나19 방역수칙과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을 지키며 진행되었습니다.
👉 사단법인 청소년 노동인권 노랑은 변화의시나리오 스폰서 지원사업을 통해 “비대면 청소년 노동인권교육 동영상과 워크지 개발 제작”을 수행하였습니다. 아래 글은 교안연구를 위한 세미나 중 발제된 발제자의 글로 본 사업의 고민을 전하고자 한다고 전달해주셨습니다.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에 대한 몇 가지 질문
1. 과정
2005년, 『똑똑, 노동인권교육 하실래요?』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지음, 사람생각)가 출간된 이후, 15년여 동안 한국 사회에 청소년노동인권과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장되면서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더불어 교육뿐만 아니라 청소년노동에 대한 실태 조사, 청소년배달노동의 실태와 대책, 특성화고등학교의 교육과정 및 현장실습 문제, 지역별 청소년노동 관련 의제에 대한 대응 그리고 지금은 청년노동에 이르기까지 노동 현장에서의 청소년노동 문제를 직접 다루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각 지역에서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이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사단 양성과정 운영, 교육 교재 및 교안에 대한 재구성, 교육 내용 및 강사 역량 강화를 위한 자체 프로그램 운영 등의 활동이 광범위하게 활발히 진행 중이다.
2. 몇 가지 질문
그러나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지금, 그동안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제도화, 고착화되어 가는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에 대한 성찰과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첫째,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2시간 강의’가 제도권 교육으로 수용되면서, 다른 예방 교육이나 필수 이수 교육처럼 현재 학교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경향성이 고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성은 교육참가자의 필요성에 기초한 교육을 고민하기보다는 2시간에 최적화된 교육 방법을 더욱 고려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관행으로 진행되는 교육은 ‘당사자’의 요구가 아니라 그 당사자들을 ‘조각’하려는 ‘누군가의 권력’에 의해 배정되기 때문이다. 필요성에 근거하지 않았기에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는 ‘아름다운 2시간’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고, 그 노력의 결과는 교육참여자 모두를 성장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결국은 모두가 소외되는 교육 활동으로 전락하게 된다.
둘째, 실제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가 2시간 강의를 책임지는 역할을 넘어 자신의 노동과 삶까지 노동인권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려는 의지가 대체로 부족하다는 점에서 강사라는 역할만 충실하면 된다는 것 역시 고착되는 경향이다. 다소 고리타분한 말일 수도 있지만, ‘교사는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친다.’라는 말이 있다. 자신은 보수적 삶을 살면서 진보적 가치를 가르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본인은 행동하지 않으면서 실천을 가르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2시간 남짓 펼쳐지는 이야기는 강사 자신의 삶과 노동에 대한 이야기이어야 한다. 교육참여자 모두가 성장하는 노동교육이 아니라면 사문화된 법적 권리만 되뇌는 학습이 될 뿐이다.
강사로서의 역량 강화를 넘어 본인의 삶과 노동을 운동으로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한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요즘 임용고시를 통해 교사가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마냥 어렵다고 한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전교 상위권 성적이어야 하며, 대학에서도 오직 임용고시를 위한 준비를 1학년 때부터 해야, 그리고 치열한 경쟁력을 뚫어야만 가능한 ‘교사’라는 문을 통과한 최근의 선생님들은 공부를 ‘못’하는, ‘안’하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면 되는데 개인이 게을러서 혹은 의지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다. 내가 나의 노동을 노동인권으로 바라보지 않거나, 그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변화시키고자 하지 않는다면 ‘교육’은 지식의 모습으로 그저 뇌라는 무덤에 암매장될 뿐이다.
셋째, 교육의 내용이 기존의 ‘노동 개념, 노동자 범위, 근로기준법, 산업재해’ 등에 국한됨으로써 실제 학생(청소년)이 느끼는 삶과 학생 자신의 노동에 기초한 실제 경험과는 그 괴리를 좁히기에 한계가 있다. 물론, 초등학생-중학생-고등학생 / 일반고-특성화고 / 학교 안 청소년-학교 밖 청소년 등의 조건에 따라 그 접근 방법과 내용을 달리하려는 노력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기존 ‘노동 개념, 노동자 범위, 근로기준법’ 등의 제도적, 법적 범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교육참가자 모두가 학교를 더 이상 ‘교육’의 공간이 아니라 학생들의 삶과 노동이 펼쳐지고 있는 ‘생활’의 공간이자 ‘노동의 현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노동인권 교육에서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강사의 노동이 실행되고 있는 현장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2020년이 지나는 지금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학생(청소년)이 노동의 개념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노동자의 범위를 아는 것이 왜 필요한지, 근로기준법이 지금 학생(청소년)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산업재해는 나중의 일이 아니라 지금 학교 안의 이야기는 아닌지 등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일종의 또 다른 교과를 수업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으로부터 노동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노동은 ‘먼 훗날에나 다가올 선택의 문제’일 뿐이기에 – 나와는 상관없는 –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일 뿐이다.
넷째,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는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이 필요하다.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했을까?’라는 주제로 논술 수업을 했을 때, 한 학급당(28명~30명) 2명~3명을 제외하고 다수의 학생들이 ‘피노키오는 사람이 되어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에 찬성했다. 그 이유는 대략 3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나는 ‘사람이 되어 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평생 노동하는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굳이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에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였다.
다른 두 가지 이유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더라도, 두 번째 이유인 ‘평생 노동하는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것은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한다. 즉,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혐오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화이트칼라/블루칼라, 전문직/비전문직, 고소득/저소득 등의 기존 관념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다. ‘하느님 위에 건물주’, ‘성공한 연예인’, ‘1인 방송 혹은 유튜브 개인 방송’, ‘로또 당첨’ 등이 대세인 지금의 대부분 학생(청소년)들의 소망이다. 이 소망 안에는 연예인의 노동이나 개인 방송에서의 노동은 노동이 아니라 그냥 재미이자 놀이일 뿐이다. 노동에 대한 심각한 왜곡과 그에 따른 인식의 단편을 볼 수 있다.
노동(자)이 예전에는 기피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혐오의 대상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외면한 채, 교실에서 2시간 동안 청소년노동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문제풀이를 위한 협동 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노동은 ‘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다섯째, 페미니즘에 기반한 청소년노동인권의 고민을 시작하자.
지금까지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에서의 노동(노동자)은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노동(자)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제 이 범주는 청소년노동인권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개념적으로 ‘청소년’을 이제는 분리해야 하지 않을까에 대한 문제 의식은 위에서 언급했다. 여기서는 ‘노동’, ‘노동자’의 개념을 확장해야 하고, 현재의 노동현장이 대부분 인간 중심의 남성가부장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성/종별 위계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청소년노동인권의 기반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노동인권은 더 이상 ‘고용되어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 대해서만 언급하면 안 된다. 이러한 노동(자)이 가능하게 했던 비가시화 비가치화되어 있는 노동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러한 우리가 알고 있던, 지금까지의 노동이 사실은 인간남성의 노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다른 노동들이 착취되었고 착취되고 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를 통해 지금 현재 학생(청소년)들이 자신이 어떤 노동을 하고 있으며, 어떤 노동 시스템, 자본 시스템, 인간/남성가부장 시스템에 놓여 있는지를 성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노동은 다른 노동을 착취하고 억압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노동에 위계와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노력 없이 청소년노동인권을 이야기한다면 이 자체가 또 다른 위계이자 권력이 될 수밖에 없다.
3. 마무리하며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에 관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 동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질문들 또는 더욱 확장될 수 있는 질문을 통해 기존의 관행과 개념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노동인권 교육이어야 한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청소년노동은 ‘청소년이 하는 노동’일까, ‘노동하는 청소년’일까?”
“‘교육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학교에서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청소년노동인권 교육은 ‘가르치는 자’를 풍요롭게 하는가?”
그러나 교육만으로 변혁은 일어나지 않으며, ‘교육-상담-구제’라는 삼각형의 순환만으로 노동인권교육이 운동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학교 현장에서의 각종 예방/필수 교육 등을 통해 본 일종의 결론은 ‘학생(청소년)들이 교육을 통해 지식은 더 많아졌을지는 몰라도 그 이상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억압과 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의 구조와 권력 위계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희롱 예방 교육은 필수 이수로서 늘 교육받지만 각종 혐오 발언과 성적 위계에 의한 폭력적 차별 행위들은 더 늘어나고 있으며,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개인의 안전과 자신의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육과 실천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위계 속에서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되었던 표적 집단들이 저항의 원천이었으며, 변화와 변혁의 주체였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교육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 무엇을 더 고민해야 할지 그리고 교육에만 머물 수 없는 현실이기에 실천으로 또 다른 도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일 뿐이다.
2020. 12. 09.
글 : 사단법인 청소년 노동인권 노랑 이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