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스포일러 잔뜩 있습니다!!!)
주말에 영화를 한편 보았습니다. 집에서 뚜벅뚜벅 걷다보면 영화관이 나오거든요. 요즘 보기드물게 작고 아기자기한 극장이에요. 극장은 작지만 영화는 푸짐하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부귀영화’지만, 이번에 본 영화는 부귀와는 거리가 멀어요. 이 날 본 다르덴 형제의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참 따뜻하지만 좀 불편한 영화였어요.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게 만들었거든요.
나는 누구일까? 이 곳에 필요한 사람일까?
아주 짧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우울증에 걸려 휴직했던 주인공 산드라가 복직을 하려 하지만, 사장은 회사 사정이 안 좋다면서 직원들에게 “’1천 유로의 보너스’와 ‘동료의 복직’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직원들의 1차 투표 때 ‘1천 유로의 보너스’가 압도적으로 선택됐지만, 반장이 직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월요일에 재투표를 진행하기로 합니다. 영화는 여기서 출발하지요.
산드라는 주말 동안 동료를 하나 하나 만나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위해 투표해달라고 부탁해요. 외롭고 괴롭게, 구걸하는 심정으로 말이지요. 말하자면, 이것은 실존의 문제가 아닐까요?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1천 유로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일까? 괜히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분란만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매일매일 직장에서 나 때문에 1천 유로를 포기한 동료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지난 1년간 내가 없이도 회사는 잘 돌아갔는데, 나는 정말 필요한 사람일까? 내 가족들은 나처럼 불필요한 사람을 사랑해줄까? 그냥 동정하는 것 아닐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지? 그냥 죽어버릴까?
실제로 동료들의 반응도 그렇습니다. “미안하다, 그 돈이 꼭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히려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16명이면 되는데 네가 왜 필요하겠냐”, “이렇게 사람들을 괴롭히니 재미있냐”고…
살아있는 사람이 연루된 이야기는 좀더 구질구질해지기 마련입니다. “저 사람은 우울증에 걸렸으니 예전만큼 일하지는 못할 거다”라고 수근수근하지요. 아마 그 말이 틀리진 않을 겁니다. 실제로 영화 속 여주인공은 완전히 병에서 벗어난 것 같지 않았거든요.
아무 손해가 없을 때-동료도 복직되고 보너스도 받을 수 있을 때-에는 남을 돕기가 참 쉽지요. 하지만, 구체적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할 때는 결국 각자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1천 유로의 보너스는 그냥 숫자가 아니라 1년치의 전기세, 아들의 학비, 집 수리 비용이니까요.
음… 저 같으면 1천 유로 정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 당장 아픈 가족이 있고, 갚아야 할 빚이 밀려있어도 포기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복직하려는 동료와 별로 친하지도 않고, 그 사람이 아니면 결국 다른 누군가(어쩌면 바로 나!!!)가 해고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포기할 수 있을까요?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 나는 네가 아닌데…
얘기가 좀더 거창해지지만, 최근 복지제도나 증세에 대한 논란, 또는 계층-인종-성별에 따른 차별 역시 같은 맥락의 문제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복지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때, 누가 얼마나 지불해야 할까요? 누가 먼저 혜택을 누려야 할까요?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결국은 내게도 이득이 될까요? 비정규직/이주/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해고나 차별은 나에게 이득일까요? 손해일까요? 그저 불쌍한 소수자들의 문제일까요? 결국은 내 문제일까요?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라고 신영복 선생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마 똑같은 입장은 ‘이상(理想)’이 아닐까, 이 불완전한 세상에는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을 서로 단단하게 묶을 수는 있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서로의 관계를 인식할 때 진정한 변화가 만들어질 거예요.
그래야 서로의 권리를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우리 모두의 몫을 함께 외칠 수 있으니까요. 또 때로는 잠시 내 몫을 포기하거나 더 많은 대가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것이 진정한 보편적 복지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더 쉽게 연대할 수 있도록 사회의 제도와 의식을 바꾸는 것이 저희 같은 비영리단체의 역할이겠지요.
끝내 졌지만, 해피엔딩인 까닭
감독은 영화같은 해피엔딩과 현실적인 새드엔딩 둘 중에 가느다란 사잇길을 선택합니다. 스포일러이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인공은 투표에서 아슬아슬하게 패배하지만 사장에게 “다른 계약직 대신 복직시키겠다”는 제안을 받는데요. “다른 사람을 해고시킬 수는 없다”면서 거절하지요.
그리고는 “멋지게 싸웠다, 나는 행복하다”는 대사로 영화는 끝나요. 영화 내내 초췌했던 주인공이 힘차게 또 다른 내일을 향해 걸어나가는 모습이 참 뿌듯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킨 자신감이 행복의 이유였을 거에요.
올 한 해에는 더 많은 기부자님과 많은 지원자들이 이런 행복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관련 글>
[칼럼] 다르덴 형제와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아름다운재단 http://www.beautifulfund.org/
글 | 박효원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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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아요 글도 내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