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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21일
인터넷을 검색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진이 보였습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가 열리는 기사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는 내 역사의식에서 나오는 관심에서가 아니라
이분들을 이제는 내가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올해 4월초 재단에 입사한 이래 이분들이 함께 모여 사시는 ‘나눔의집’을 두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5월 20일 재단의 기금 1호 출연자 이신
‘김군자할머니’ 생신을 맞아 그분들을 처음 찾아뵈었고 추석 즈음인 9월 8일이 두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김군자할머니에 대해 궁금하시면>
열일곱살때 일본군에게 끌려가 스무살까지 중국에서 종군위안부로 살아야했던 김군자할머니. 전쟁이 끝났지만, 부모도, 가족도 없던 할머니는 돌아갈 곳도 마음둘 곳도 없었습니다.
‘종군위안부’였다는 치욕스런 상처, 그렇지만 할머니는 그 상처를 다시 희망으로 만들어냈습니다.
종군위안부피해자 정부지원금과 생계비를 절약해 모은 돈 5천만 원을 모두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것입니다.
그 돈은 할머니의 전 재산이자, 그동안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김군자할머니의 기금은 아름다운재단의 첫번 째 기금이 되었습니다.
이 기금은 보육시설에서 거주하거나 퇴소한 청소년들에게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1년간 교육비를 지원하는 기금입니다.
이 기금으로 200여 명의 청소년들이 교육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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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찾아뵈었을 때 그 복잡했던 감정이 아직 잊혀지지 않습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특별한 문제없이 자란 나같은 젊은이들이 가질 수 있는
역사의식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사실 버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심히 묵묵히 들었던 기억만 있습니다. 남자라는 이유로 죄책감이 들기도 했고요.
그 후, 9월 8일 김군자 할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나눔의집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4개월이란 시간동안 나눔의집은 여전했지만 조금 변한게 있다면
올해 광복절을 맞아 할머니들의 흉상이 기념관 앞에 새롭게 세워져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셨거나 지금 살아계신 분들의 흉상을 보면서
이분들이 이제 곧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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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자 할머니는 지난 방문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내 우리를 계속 기다리시다
‘지금 막 방으로 들어가셨다고’ 간호사 선생님이 안내하시며 말씀해주셨습니다.
“나이 들면 1달을 1년처럼 살아가.”
제 친할머니가 자주 하는 푸념의 말씀입니다.
김군자 할머니를 뵌 지 불과 4개월만인데, 우리 할머니의 말처럼 꼭 4년을 사신 것처럼 지난번과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김군자 할머니는 요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여위셨고 발도 많이 부어 걷기연습을 한밤에 남몰래 해야 할 만큼 힘들어 하시는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 방에 걸려있는 지팡이를 집고 서 계시는 사진액자는 이제 할머니에게 먼 예전의 일이 되버린 듯 했습니다.
‘이제는 나도 기력이 없어 정신대문제로 언론과의 인터뷰를 하기 힘들고
그나마 대외활동이 가능한 몇 명의 할머니들만 정신대 집회에 나가는 정도’ 라고 하시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이제 시간이 없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얼마 후면 더 이상 집회를 하시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볼 수 없을 테고 또 우리의 슬픈 과거를 증언해 줄 것은
그 분들의 목소리가 아닌 이젠 다른 것들이 대신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없지만 억울한 역사의 피해자들을 그냥 이렇게 보낸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인 것 같습니다.
“나는 시간이 없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줄 수가 없습니다. 당신 손에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이제 남은 것은 허약한 몸뚱이 뿐이며 서서히 죽는 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합니다.”
“죽기 전에 잘못했다는 사죄한마디 받아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얼마 전 집회에서 양금덕 할머니가 세상에 외친 말처럼 ‘시간은 그분들을, 그리고 우리들을’ 기다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번째 나눔의집을 방문하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동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세상에 바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와 먼 훗날 우리의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말입니다.
나눔의집을 나서면서 기념관 앞에 새롭게 세워진 김군자 할머니의 흉상을 보며 이분의 과거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아마 할머니가 예전이 아닌 지금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면
공부에 고민하고 사랑에 설레어하는 평범한 소녀로 살았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우리의 모습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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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김군자할머니가 재단에 두번째 기부를 하셨던 때가 기억납니다. 저도 전해들은 이야기지만요.
정말 ‘피같은 돈’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할머니의 전재산.
하지만 할머니는 그 소중한 전재산을 들고 아름다운재단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할머니는 또 다시 5천만 원을 들고 재단을 찾아왔습니다.
“내가 아무래도 마지막인 거 같아서… 장학금을 더 내고 싶어서 가져왔어. 가만 보니까 1년동안
아끼면 1천만 원을 모을 수 있더라고. 돈 많은 양반들이야 쉽겠지만, 나한테는 그렇지 않더라고. 옷이야 냄새나지 않을 정도만 갖추면 되는 거고. 먹고 자는 거야 몸 누일 곳이 있으니 된 거고. 돈이 들어오면 그저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차곡차곡 모은 거야. 모쪼록 부모없이 공부하려고 하는 아이들에게 전해줘요.”
아마도, 할머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이미 예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금 더 부지런히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김군자 할머니의 바람처럼 이 기금으로 어느덧 200여명의 청소년들이
더 나은 미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김군자할머니. 비록 고통으로 얼룩진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당신의 나눔으로 못다 이룬 꿈은
수백배의 결실을 거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이미 역사를 바꾸었고 재단의 머릿돌에 새겨졌으며,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함께 할 것입니다.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오래사세요.
비색푸르미
최근 ‘도가니’붐의 반만큼만 그분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느보산
재단의 기금1호를 만드신 기부자님. 이란 이름으로 수없이 들어왔지만, 김군자 할머니의 기부는 되새길 수록 참 느끼는게 많아지는 사연입니다. 그런 배움만큼 내 자신의 삶도 그렇게 닮아가야 할텐데, 이놈의 소시민 근성 때문인가요? 자신을 비우고, 나누고 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참 쉽지만은 않습니다. 재단의 수많은 기부자님들이 하고 계신 삶일텐데요. 반성..ㅠㅠ..
달리아란
할머니 부디 건강하세요..
반짝이최
정말 강한 것이 무엇인지 인생으로 보여주시는 할머니,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