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우리 사회의 의제들도 다양해집니다. 그에 발맞춰 공익활동 또한 새로운 영역에서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아름다운재단은 신생 공익단체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인큐베이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20년 공익단체 인큐베이팅 지원사업에 선정된 ‘느린학습자시민회’가 지원 1년차 활동을 전해왔습니다. |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풀꽃』, 나태주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도 잘 보이지 않는 꽃이 있습니다. 꽃 중에 연두 빛을 띠는 꽃이 그렇지요. 목백합이 그렇고 화살나무가 그렇습니다. 싱그러움을 뽐내며 한껏 잎사귀에 물이 오르는 초여름의 나무와 달리, 연두 꽃은 보이지도 않고, 찾기도 힘든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들 하나하나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초록잎에 가려져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보지 않게 되지요. 뛰어난 아름다움과 실력을 갖진 못했지만 초록 꽃처럼 한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조용히 계절을 이겨내는 모습은 느린학습자의 모습과도 참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있는 듯 없는 듯한 느린학습자의 상황인데요. 양분과 햇빛과 적절한 물이 있어야 성장해 꽃을 피우는 것처럼 느린학습자에게 맞는 적절한 관심과 맞춤 교육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아직 초록 꽃인 느린학습자에게 관심은 많이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느린학습자시민회는 느린학습자들을 조기에 발굴하고, 적절한 교육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느린학습자 배움터를 운영하고 있구요. 느린학습자 배움터를 운영하면서 서로 때로는 지지고 볶고 서바이벌과 같은 시간을 경험했지만 배움터에서 느린학습자들은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숨죽이고 투명인간과 같이 지냈던 모습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고, 싸우고, 다투고, 화해하며 작은 사회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 안정 이후, 학습 의욕을 보이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싶어요’, ‘선생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싶어요’라고 목소리를 냅니다.
‘나는 원래 못해’, ‘나는 할 수 없어’라며 무기력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가두던 느린학습자 청소년들이 ‘왜 내가 알 수 있게 알려주지 않죠?”,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여러 번 가르쳐주세요.”, “내가 이해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세요.”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시민회는 배움터 운영 외에도 느린학습자의 눈높이에 맞는 학습과 돌봄을 주제로 네 번의 포럼을 진행하면서 느린학습자의 교육적인 욕구를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한 진지한 탐색을 시작했습니다. 일반교육과 특수교육,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던 느린학습자들을 위해 교육 제도는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로 서울대학교 특수교육연구소의 전문가들과 연계해서 느린학습자 문해력 어휘·독해력 향상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사례연구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기존의 느린학습자 교육이 초등중심의 기초 문해 중심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중등교육 문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서 청소년까지 시야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느린학습자 중학생 13명을 대상으로 한 “문해력에 날개달기-어휘, 독해력 향상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 개별 진단검사와 15회의 읽기 중재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사전-사후 검사를 통한 효과성 검증으로 느린학습자들에게 필요한 교육적, 정책적 지원방안을 고민해 본 것입니다. 연구를 통해서 느린학습자의 조기선별 및 진단체계 구축, 효과적인 읽기 프로그램 실시, 다각적인 접근에 기초한 복합지원, 읽기교육을 위한 전문가 양성 등의 정책적 제안의 구체적 내용도 제시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사례연구를 시작으로 공적 교육의 영역에서 느린학습자에게 맞는 교육서비스가 확대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느린학습자시민회는 활동가들의 미래비전을 수립하고 느린학습자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상담활동을 목표로 수립했는데요. 상담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와 기관을 찾아가기도 하고, 강사를 모셔서 상담활동가 양성교육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처음 계획은 느린학습자 자녀를 둔 부모님의 막막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보자는 생각이었는데요, 상담활동을 시작하면서 청년 느린학습자들의 상담요청도 꽤 많이 받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임에도 상담 건수의 절반이 청년 당사자와 가족의 상담이어서, 당초 예상했던 아동·청소년 느린학습자 문제보다 오히려 청년이 더욱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느린학습자를 위한 대표단체가 필요한 이유를 시민회는 상담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2021년 하반기 상담활동의 첫 삽을 뜬 시민회는 올해인 2022년, 상담활동에 좀 더 주력하고자 합니다.
시민회는 2021년, 느린학습자 정책을 직접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느린학습자 관련 정책성과와 향후 과제’라는 주제로 활동보고회에서 지방자치단체 조례를 중심으로 정책을 검토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자리를 가져본 것인데요.
2019년까지 ‘학습부진’이라는 이름에 한정되어있는 조례를 살펴보면 교육청의 일반적인 내용구성 이외에 지역별 특성이나 개별적인 특화방안이 부재하다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교육감의 책무에서 “교육상 필요한 시책을 마련하여 지원하여야 한다.”, 교육지원계획의 수립에서 “교육감은 학습부진아의 학습능력 향상을 위한 체계적인 지원계획을 매년 수립하여야 한다” 등으로 정책추진을 분명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지원계획 안에 학부모 및 지역사회와의 협력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었습니다.
2020년 이후로 보다 포괄적인 지원조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그 신호탄은 2020년 10월 서울특별시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조례 제정에 따른 관련 조례 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평생교육법>, <초중등교육법>, <청년기본법> 등으로 각기 다른 법적근거를 토대로 느린학습자에 대한 조례가 제정되어 대상연령이나 지원 내용 등이 한정되는 부작용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느린학습자에 대해서 향후 평생교육의 맥락으로 갈지, 복지분야와는 어떻게 조우할지 등에 대해서도 중장기적인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례에 기반한 정책연구용역이 추진됨에 따라 향후 지원센터 설립 등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점은 의미가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느린학습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양육자 등의 요구도 높아지고 있기에 정책도 이에 반응할 수 밖에 없을텐데요. 이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좋은 표준조례(안)을 만들고 이를 제·개정하는 운동의 전개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입니다. 중기적으로는 고양시의 사례를 토대로 청년조례를 제정하고, 장기적으로는 전생애주기별 맞춤형 지원에 관한 정책개발 및 정책화 추진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국적 운동의 확산 및 국가단위의 법제화 추진 논의를 통해서 수직적-수평적 조례제정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느린학습자시민회도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함께 하려고 합니다. 시민회의 2022년 활동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 드리겠습니다!
📢 느린학습자시민회가 최근 발간한 자료인 가이드북 배포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
사단법인 느린학습자시민회는 느린학습자의 생애주기별 어려움을 같이 고민하고, 근원적 불평등을 제거하여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느린학습자가 다양성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통합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느린학습자의 부모, 시민활동가, 사회복지사, 연구자들이 모여 느린학습자 당사자가 자신의 권리와 삶을 온전히 누리길 염원하며 느린학습자의 이름으로 사회적 변화를 만들기위해 설립하였습니다.(느린학습자시민회 홈페이지 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