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게우토로지원사업’의 협력기관인 지구촌동포연대의 최상구 국장이, 지난 4월 30일에 열린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에 참여하고 방문기를 써 주셨습니다. 당일 우토로 마을에서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한 번 따라가 볼까요? |
높아진 국경, 사라지지 않은 우리안의 장벽
우토로를 처음 방문했던 건 2016년 6월, 이후 2019년까지 여섯 번을 우토로에 다니며 어느 정도 가는 법은 익숙해졌다. 하지만 코로나19는 그 익숙함을 초기화시켜버렸다.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비자를 받아야 했고, PCR 검사와 자가격리가 필요했다. 또한 입국 정책이 수시로 변했기 때문에 주한일본대사관, 후생성, 외무성 홈페이지들을 찾아다니며 수시로 최신 정보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비자는 추가 서류요구 없이 나왔고, PCR 검사도 음성, 드디어 2년을 넘겨서 우토로를 방문할 수 있었다!
문득, 한국을 방문하려면 노심초사하는 조선적(朝鮮籍 : 1947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외국인으로 등록하면서 조선반도 출신자라는 의미로 부여한 기호) 재일동포들이 생각났다. 재일동포들은 한국과 수교를 하면서 한국국적을 취득하는 이들도 있고, 분단국가의 국민이기를 거부하면서 조선적을 계속 유지하는 동포들이 있다. 이들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이 증명서 발급이 정권에 따라 까다로워지기도 하고 완화되기도 한다. 비자신청과 대기를 이들의 여행증명서 발급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현해탄을 건너는 것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3인의 3일간의 자가격리 속 의기투합
금번 우토로 방문단은 3인. 지구촌동포연대 활동가인 필자 외에 도서출판 품의 정미영 대표(“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 역자 및 편집자)와 김도희 감독(나는 우토로마을을 기억합니다 연출)이었다. 도착 하자마자 3일의 격리 기간 중 “우토로 여기 살아왔고, 여기서 죽으리라”의 저자 나카무라 일성과 한국의 신문사 간의 인터뷰를 하는 등 방문단 3인은 각자의 일로 분주했다. 그러다가도 식사시간에는 모여 이야기하며 나카무라 일성 작가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강연회를 서울, 부산 등에서 열기로 하며 의기투합했다. 자가격리 기간 중인 4월 27일 언론을 상대로 사전 브리핑을 가졌던 터라 한국의 언론에서도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비 내리는 오사카에서 기념식 당일 날씨를 걱정하며 초조하게 격리해제를 기다렸다.
다시 찾은 우토로,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4월 30일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이 열리는 오전, 오사카 숙소를 출발하여 우토로마을에 도착했다. 비오던 오사카 날씨와는 달리 햇살이 강한 맑은 날씨었다. 오랜만에 보는 마을회관 에루화는 그대로였지만, 그 옆의 집은 작년 재일동포를 혐오하는 자의 방화로 인한 화마의 상처가 그대로 보였다.
마을 입구로 가보니 1기 시영주택 앞에는 깨끗한 차도가 생겨 기념관 입구와 연결이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마을을 동서로 가로질렀던 골목길은 이제 막혔다. 남쪽 자위대 앞길을 따라 1기 시영주택을 지나니 2기 시영주택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년에 이 아파트가 완공되어 우토로 주민들이 입주하게 되면 주거권을 지키기 위한 지난했던 투쟁이 마무리 된다.
2005년 2월 지구촌동포연대는 강제퇴거 위기에 처한 우토로마을을 찾아 워크숍을 진행하고 동포들을 면담하며 실태조사를 시작하여 의원모임과 <역사청산! 거주권쟁취! 우토로 국제대책회의>를 조직했다. 우토로를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여 아름다운재단, 민중의 소리, 한겨레21, MBC문화방송이 함께 했다. 그와 병행하여 한국정부가 재일동포들의 문제를 방치한 기민정책 또한 우토로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제기하며 한국정부의 지원을 다각도로 압박했다.
의원모임의 현장방문, 현안 질의와 국감, 대정부질문 등을 이어갔다. 당시 한국정부의 30억 지원 결정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토지매입을 주저하는 등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토지를 매입하고 2014년 우지시가 시영주택건설 계획을 최종확정하여 지금까지 도로와 시영주택건설이 이어지고 있다. 깨끗한 도로, 새로 지은 아파트, 그리고 그 한켠에 들어선 우토로평화기념관. 우토로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우토로평화기념관 360도 영상
다채로운 우토로평화기념관 개관식 풍경
이윽고 도착한 우토로평화기념관은 개관식 준비로 분주했다. 그동안 홈페이지를 통해 모집한 우토로 서포터즈들이 안내 등을 돕고 있었고, 눈이 마주친 김수환(기념관 부관장)과의 반가운 해후의 포옹도 잠시, TV와 노트북 연결을 체크하고, 유튜브 생중계와 페이스북 라이브를 준비하기에 바빴다.
개관식에는 한국과 일본의 각계에서 다양한 인사들이 참석했다. 강창일 대사를 대신하여 주일대사관 영사와 재외동포재단 주재원이 도쿄에서 왔고, 오사카 총영사관과 담당자, 교토 민단, 총련 등 동포단체장들도 참석하였다. 우토로 출신 뮤지컬 배우 정아미의 ‘아리랑’ 제창으로 시작된 개관식은 타가와 아키코 관장의 인사말과 내빈인사, 감사패와 꽃다발 증정으로 이어졌고, 내빈 소개, 개관 테이프 커팅과 기념촬영으로 끝났다.
이날 단연 눈에 띈 분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참석하신 우토로 어머니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한금봉 어머니가 오셔서 반갑게 인사를 나눠주셨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 정말로 고맙습니다. 배지원상(전 지구촌동포연대 운영위원) 생각 많이 납니다.” 일어로 하시는 말씀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큰 눈망울에 담긴 눈길과 내 손을 잡은 손길에서 한국의 시민들과 활동가들에 대해 감사하는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우토로라는 공동체를 지킬 수 있음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이날의 기쁨을 그 동안 고생했던 활동가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배어 있었다.
10시에 열린 개관식이 끝나고 평화기념관은 오후 1시 정식 개관을 했다. 1층 다목적 홀은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이날 160여 명이 방문했고, 이후 5월 5일까지 약 2천 명이 방문했다. 일본의 골든위크(연휴)기간이기도 했지만, 일본 현지의 폭발적인 관심에 사무국과 서포터즈들은 바쁜 날들을 보냈다. 정식 개관 이후 기념관에는 다양한 행사들이 이어졌다. 개관일 저녁에는 우토로평화기념관의 의의에 대한 온라인 심포지움이 있었고, 5월 1일 ‘마당극 우토로’를 시작으로 3일 정아미씨 공연, 4일 안성민씨의 판소리 공연, 5일 히가시구조마당 풍물놀이패, 가와구치 마유미, 교토가무단의 공연이 있었다.
이들 행사 중 백미는 단연코 우토로 농악대의 공연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홍정자씨가 1989년 농악교실을 처음 연 이래로 시위 현장에는 늘 우토로 어머니들이 한복을 입고 풍물을 치며 앞장섰다. 그 농악대가 부활한 것이다. 농악대는 입장하며 사진들을 함께 들고 나왔는데, 농악대에 함께 했으나 이미 고인이 된 분들의 사진이었다.
다양한 만남과 교류가 이어졌고, 농악대가 재결성되는 등 마을의 공동체는 여전했다. 풍경은 바뀌고 있었지만, 우토로 마을이 품고 있었던 정신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기념관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말끔한 3층 건물의 기념관은 단조로우면서도 정갈한 일본 특유의 구조와 인테리어였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채워 넣기 보다는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구성들이 안정감을 주었다. 기념관 설계는 최종본이 나오기까지 여러 시안이 있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총 네 차례의 워크숍, 전문가 자문회의들도 거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의견, 한국측 의견, 일본측 건설추진위의 의견들을 종합하며 하나의 안으로 결정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게다가 코로나19 상황은 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최종 견적은 예산안을 훌쩍 넘었다. 결국 한국정부의 추가 지원으로 건축비를 해결할 수 있었고, 아름다운재단도 추가 지원을 하여 자금부족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선을 넘은 혐오범죄와 다시 외치는 역사청산
지난 5월 16일 우토로 방화사건(21년 8월 30일 발생)의 용의자 아리모토 쇼고의 첫공판이 열렸다. 이날 그는 기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재일동포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나고야 민단 시설에 불을 냈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하자 우토로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혐오범죄는 재일동포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소수자 집단 또한 대상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이다. 따라서 이번 재판에서는 명백한 혐오동기가 판결과 양형에 반영되어 일본사회에 분명한 경고의 신호를 보내야 한다.
방화사건은 기념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해 준 사건이라 본다. 역사에 대한 무지와 역사부정이 혐오와 결합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토로방화사건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토로의 거주권은 지켰으니 다시금 역사 청산 문제를 제기할 때이다. 우리가 주장하는 역사청산은 일본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직시하고, 인정하며 함께 살아갈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다. 방화범이 불태워버린 입간판은 그래서 오늘도 유의미하다.
“우토로를 지키는 싸움은 지금부터 힘내자!”
글, 사진 ㅣ최상구 KIN(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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