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경험과 삶의 방향성을 찾아가는 배움…그 과정을 함께 하는 사람들
“보육원에서 나오고 혼자 생활하는데 아는 게 거의 없는 거예요. 노(櫓)는 주어졌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왜 (살아가는) 방법을 나에게 아무도 안 가르쳐줬지? 나는 왜 이것도 모르고 사회에 나왔을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정이 되게 많이 들었어요.” – 열여덟 어른TV 손자영 씨 인터뷰 中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의 자립 지원 캠페인 <열여덟 어른>을 통해 그간 많은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 우선 자립준비청년을 보는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이 바뀌었고, 제도적 지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례로 자립준비청년이 시설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만 24세까지 연장 가능해졌고, 자립 수당의 지급 기간도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났다. 지자체마다 지급하는 자립지원금도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대부분 경제적인 지원에만 집중되어 있다.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한 것은 맞지만, 자립준비청년들에게는 그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인 손자영 씨가 이야기하듯 퇴소 후 많은 자립준비청년들이 관계망이 끊어지며 방향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을 경험한다. 이런 어려움을 돕기 위해 아름다운재단과 ‘파이(PIE)나다운청년들’은 자립지원금 지원과 더불어 자립의 과정에서 이들이 내면적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배움 활동을 지원하는 <보호경험청년* 배움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업에 참여한 ‘보호경험청년’들은 자립지원금과 함께 개개인의 적성과 강점을 찾는 배움 활동과 개인 상담을 지원받는다. 또 배움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관계망을 쌓도록 또래 활동과 멘토링도 함께 진행된다.
*이 사업의 또다른 특징은 만 18세에 퇴소한 보호‘종료’아동뿐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그 이전에 아동보호시설에서 중도 퇴소했던 ‘보호경험청년’들을 포괄해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업에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보호종료아동’이 아닌 ‘보호경험청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내면을 단단하게 채우는 시간
김혜원 대표(PIE나다운청년들)는 그간 만나온 많은 ‘보호경험청년’들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회구조적으로 도움이나 조언을 얻을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 등의 관계망이 끊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잠을 줄여서라도 알바를 늘리거나 자격증을 더 따려고 애쓰는 청년도 많아요. 무슨 일이 생겨도 의논할 사람이 없거나 해결할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치열하게 매달리는 거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방향을 찾아 선택할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이 사업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보호경험청년들이 자신을 지지해주는 관계를 경험하는 또래 모임과 멘토링이다. 이러한 관계망을 경험할 수 있도록 ‘‘PIE나다운청년들’은 배움의 의미를 보다 확장했다. 특정 지식이나 기술의 습득을 넘어 한 개인이 자기 잠재력과 장점을 발견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모든 과정을 배움으로 본 것이다. 덕분에 참여자들은 자격증을 따거나 돈을 벌기 위한 목적성 강한 배움이 아닌, 또래 친구들과 함께 목공이나 운동, 놀이 활동하며 일상에서 스미듯 자기 내면을 채워가는 배움을 경험하고 있다. 김상민 선생님(PIE나다운청년들)은 보호경험청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역시 또래 모임 활동이라고 말한다.
“한 청년은 신청서에 ‘이 사업을 통해서 경제적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적었어요. 친구들과 놀이공원도 가고 싶고, 기타도 배우고 싶고, 아동보호시설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싶다고요. 퇴소하면서 500만 원을 지원받았는데 부채를 탕감하느라 다 쓰고 여러 알바를 병행하며 살아왔다고 해요. 그래서 한 번도 취미나 여가 생활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지원받으면서 이런 여유를 가져 보고 싶다고 했어요.”
청년들은 함께 모여 목공을 배우기도 했고, 한강유람선을 타거나 레고랜드에 놀러 가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한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얻으려는 것은 “보호경험청년들이 잠시라도 팽팽한 긴장감을 내려놓고, 심리적 안정을 누리는 것”이라고 김혜원 대표는 말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할 때보다 안정감이 들 때, 사람은 자존감이 올라가고 그 자존감을 기반 삼아 자기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PIE나다운청년들’의 그간 활동 경험에 따르면 청년들은 “내면이 단단하게 채워지면 취업이나 진로는 자연스럽게 찾아갔다”.
“<열여덟어른>이란 연극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난 소원이 뭔지 알아? 혼자 라면 끓여 먹는 거야. 내 그릇에 혼자,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밤에 야식으로.’ 누군가는 너무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이 보호경험청년들에게는 한 번도 누려본 적 없는 자유인 거예요. 퇴소 후에는 자유롭게 경험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막상 나와서도 여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그러면 안 될 것만 같은 마음에 자신을 옥죄는 경우가 많아요.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다, 나는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걸 이 지원사업을 통해 보호경험청년들이 느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삶의 전환점을 스스로 찾아가는 청년들
내면을 단단하게 채우는 과정의 하나로 ‘상담’도 지원된다. 상담은 원하는 사람의 신청을 받아 진행됐다. 처음에는 상담 경험이 없는 청년이 많아 상담사가 건네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상담 횟수가 늘어날수록 봇물 터지듯 아픈 경험들이 꺼내졌다. 한 청년은 “한 번도 이런 말을 타인에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말을 하고 있더라. 그동안 내가 생각해왔던 방식과 다르게 생각해도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삶의 전환점이 될 정도로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
관심 분야별로 멘토링도 지원된다.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한 청년은 같은 분야의 선배를 만나 멘토링을 받았다. 배우로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 기획사와 계약을 할 때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등 현실적인 조언과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었다. 멘토링은 각자의 관심에 따라 문화예술이나 데이터베이스, 유통, 재정경제, 심리건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맞춤형으로 진행된다.
하반기에는 서울대공익법률지원센터와 함께 법 특강도 진행한다. 보호경험청년 중에는 사기를 당해 자립지원금을 모두 잃거나 모아둔 돈을 타인에게 빼앗긴 사례가 왕왕 있다. 보호경험청년의 취약성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에 대비할 수 있도록 법률 지식을 배우는 시간을 마련했다. 가을에는 관계를 깊이 쌓을 수 있는 2박 3일 캠프를, 겨울에는 서로의 성장을 축하하는 성과공유회도 계획하고 있다. 김상민 선생님은 느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청년들의 변화가 보인다고 말한다.
“초기에 낸 지출 계획에는 생활비 지출이 대부분이고 배움 활동에 관한 지출은 거의 없었어요. 5개월이 지나면서 점점 배우고 싶어 하는 활동의 종류도 많아지고, 취미 활동에 지출하는 청년들이 많아지더라고요.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구나 싶어요.”
김혜원 대표는 <보호경험청년 배움지원사업>이 하나의 지원 모델이 되길 바란다. 다행히 보호경험청년에 대한 지원금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지원금만 지급하고 마는 방식이 대부분이다. 보호경험청년들에게는 보다 통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보호경험청년 배움지원사업>은 지금의 그런 제도적 빈틈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다.
“의식주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잖아요. 퇴소 후에 겪는 외로움과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도,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 알아가는 배움도, 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하는 것도 보호경험청년에게는 모두 필요한 지원이에요. 지원사업들이 점점 그런 쪽으로 눈을 돌리면 좋겠어요. 변화를 끌어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다려주고 지켜봐 주는 힘으로 청년들이 어떻게 내면을 단단하게 채워갈 수 있는지를 이 사업을 통해 보여주고 싶어요.”
글. 우민정 ㅣ 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