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떠나기 전부터 불길한(?) 조짐이 있었다. 기증할 책을 찾으면서 좀 당황했던 것이다. 내가 베트남, 태국 등 아시아와 관련된 책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읽었던 두어권의 번역서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방송 일 때문에 샀던 책들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 약속은 약속이었다.
새벽길을 달려 아침나절에 도착한 ‘어슬렁 책다락방’은 아담하고 예뻤다. 다락방을 ‘多樂房’으로 써놓은 간판이 인상적이었는데, 벌써부터 동네 아이들이 놀러와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그 아이들에게 말 그대로 행복한 공간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아이들이 정신없이 읽고 있는 책은 예외 없이 만화책이었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책이 아니라 수동 커피 그라인더이긴 했지만…
11시경 시작된 개관식은 작은 축하 공연으로 이어졌고, 곧이어 점심 식사 시간이 됐다. 잔치국수와 태국 출신 이주민들이 직접 만든 똠양꿍은 인기 폭발!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어색하고 불편해졌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지만, 잠시 후 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는 게 무엇인지를 깨닫고 좀 놀랐다. 그들과 나를 분명하게 구분 짓고서 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마음 속 저 밑바닥에 어떤 우월감 같은 게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느꼈다. 기부는 온정주의가 아니라, 어떤 시혜가 아니라, 나누는 거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가슴으로는 미처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도 사진 찍히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기념촬영이 몹시 꺼려졌다. 늘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던 일회성 행사의 인증샷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려면 나는 앞으로 이곳에 어떤 관심과 책임을 가져야 할 것인가?
요즘 한 사회복지단체의 비리 때문에 기부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이 늘어날까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나 또한 평소에 기부단체는 투명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그 단체에 기부하고 있진 않지만 실망스럽다. 내가 낸 기부금이 잘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고픈 마음은 기부자 누구나 같을 것이다. 아름다운 재단이 ‘행복한 동행’을 마련한 취지도 그런 기부자들의 마음을 헤아려서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번 동행에서 확인한 건 기부단체의 투명성 못지않게 내 마음의 투명성(?) 또한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왜 기부를 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지, 혹여 어떤 허영심은 없는지… 등등. 늦가을 소풍 가듯 다녀오려던 길에서 제법 묵직한 질문을 건네받고 난감해하고 있다. 그나저나 지리산 자락의 그 아이들은 지금 뭘 하고 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