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의 <대학생 교육비 지원사업>은 보호종료청년들이 안정적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학업유지 및 자기계발 기회를 제공합니다. 또한 자립준비를 위한 역량강화 및 지지체계가 만들어지는 데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 2022년에도 ‘푸른고래 리커버리센터’(이하 리커버리센터)와 협력사업으로 40명의 장학생을 지원하였습니다. 40명의 장학생들이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매년 장학생과 개별적으로 만나는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는데, 참여했던 장학생의 후기를 공유합니다. |
‘시골 가서 농사 지을까?’
살다 보면 아홉수 같은 시기는 누구에게나 오기 마련이더라고요. 불안정하고 조심스럽고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그런 시기 말이에요. 저에게는 대학교 1학년이 그런 시기였습니다. 스무 살이 되어 자유로움을 느낌과 동시에 사회에 한 발을 내디디며 생긴 막막함을 같이 느꼈죠. 뭘 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이 맞는 것인지 이런 고민을 하면서요.
그러다 보니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게 되었고, 덩달아 자신감을 잃게 됐죠. 장학사업은 신청하는 것마다 탈락했고, 마음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주변 환경도 녹록지 않았고요. 더는 이겨낼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저 스스로가 매우 지쳐있었던 것 같아요.
자퇴도 생각하게 되었고, ‘시골에 내려가서 조부모님을 도와 농사나 지으며 살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조부모님께 연락해 “학교 그만두고 내려가서 같이 살까?”라는 이야기를 넌지시 건넸습니다. 그러자 조부모님은 제 예상과 다르게 크게 호통을 치셨고, 제가 있어야 할 곳은 학교라며 오로지 저 하나만 믿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로 머리를 크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화기를 붙들고 난생처음 조부모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강해야 했고, 누군가에게 내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했던 저는 쉽게 울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조부모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에는 아주 힘들었는지 조부모님의 말 한마디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보기로 했습니다.
새롭게 도전하기
이후 저는 새롭게 다시 도전했습니다. 도전의 시작은 바로 아름다운재단 대학생교육비지원사업에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실망이 크듯, 1차 서류만 합격하는 데 의의를 두자며 스스로 다독이며 준비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장학생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확인 전화를 받고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후 장학생으로서 오리엔테이션에도 참여하고, 난생처음 ‘모니터링’이라는 것도 해보았습니다.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게 쉽지 않았던 저는 ‘모니터링’을 하기 전날까지도 긴장하며 다음 날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때 처음 본 화란 선생님의 이미지는 뭐랄까, 저와는 반대로 밝은 느낌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대화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런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 생각납니다. 화란 선생님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의 과정, 그 안에서 힘들었지만 잘 이겨냈던 이야기 등등. 항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만 했던 저는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나누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말하는 중간중간 어떻게 어떤 말을 전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저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화란 선생님은 저에 대해 먼저 물어봐 주셨습니다.
“단비야, 너는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니?”
저는 대답했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만 했어요.”
“네가 그 의무를 다할 필요는 없어.”
이 대답이 제 어린 시절을 모두 표현해주는 한 문장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한부모 가정이라도 부모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녀보다 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부모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아이가 되었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쯤 아버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고, 언니와 저는 이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겨졌습니다. 그러던 때 조부모님께서 저희를 거두어주셨고 저희는 조부모님과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어 대학에 진학했을 때, 제 인생만을 책임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저에게 고모들이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모들은 제가 조부모님을 외면하고 먼 타지에 있는 대학에 갔다고 오해하셨기 때문입니다. 조부모님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오로지 저에게만 전가하는 것 같은 고모들의 태도가 달가울 리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화란 선생님은 “네가 그 의무를 다할 필요는 없어.”라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그 한 문장으로 저는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화란 선생님이 해주셨던 질문 중엔 학업에 관련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와 전공은 어때?”
저는 대답했습니다.
“어느 것도 확신이 없어요.”
만남이 주는 위로
고등학교 3년 내내 ‘출판편집자’ 혹은 ‘잡지 에디터’라는 길만 바라보고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은 너무나 달랐고 제 안에 점차 괴리가 커졌습니다. 그래서 전과 시도를 했고 이마저도 확신이 들지 않아 전과에 성공했음에도 학과를 옮기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저에게 “대단하다. 잘 컸다.”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또한, 현재 겪고 있는 불안함에 대해 여러모로 해결 방법을 같이 고민해주셨습니다. 한국의 문화와 학문을 전공한다는 것은 충분히 큰 이점이고, 한류가 국외로 활발히 전파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떤 방식으로든 나아갈 길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함께 해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처음으로 전공에 대해 확신을 했으며, 이후에 다양한 분야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난생처음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돈을 벌어 보았고, 이전에 포기했던 공연기획자라는 꿈을 실현해보고자 뮤지컬 서포터즈에 지원하거나 관련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았던 저는 ‘모니터링’이라는 활동으로 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보는 방법을 배워나갔습니다.
진짜 어른이 되길
어릴 적에 저는 스무 살만 되면 모두가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 어려서 모르는 거야.”, “애들은 아직 몰라도 돼.”라는 말을 듣던 아이는 시간이 지나 “네가 애도 아니잖아.”라는 말을 듣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제대로 어른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헤매던 저는 아이도 어른도 아닌 그저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두가 다 ‘어른’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은 스무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어른’이라는 이름 언저리 어디쯤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진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작지만 특별한 소망 하나가 생겼습니다. 별거 아닌 일에 연연하지 않고 실패에 쿨하게 대처하는 게 어른이라고 말하는 ‘가짜 어른’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나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성장통을 견디고 일어서는 ‘진짜 어른’ 말입니다.
글 / 사진 : 장학생 김단비 (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