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은 여성장애인들이 사회활동과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인생 주기에 맞춘 보조기기를 지원합니다. 일률적으로 동일한 보조기기가 아닌, 지원자 개개인의 특성과 상황에 맞춘 보조기기를 지원함으로써 보조기기 사용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여성장애인들이 보다 나은 일상을 경험하며 삶의 선택지를 넓혀갈 수 있기를 희망하며, 2022년 지원사업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전해드립니다. |
“어느 작은 마을에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마을에는 나룻배가 없어 오직 수영으로만 강 건너 아름다운 섬에 오갈 수 있었죠. 그래서 마을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국어사전의 정의를 적용하면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장애인인가요? 세월이 흘렀습니다. 강 위로 교량, 즉 ‘다리’가 건설되었습니다. 마침내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강 건너 아름다운 섬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난관이 해결됐죠. 하지만 노약자를 비롯해 오랫동안 걸을 수 없는 사람은 여전히 그 섬에 방문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을은 오랫동안 걸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버스’가 운행되기 시작했습니다…”
– 오준 전 UN대사의 <강 건너의 세상> 강연 중 –
장애는 인식의 개선이 요구되는 개념이다. <강 건너의 세상> 강연의 ‘다리’나 ‘버스’처럼 도구나 기계를 활용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실제로 현시대 시력 저하는 ‘안경’이라는 보조기기로 극복되고 있다. 이는 상황에 부합하는 보조기기를 통해 수많은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단, 관건은 보조기기의 접근성과 보급성이다. 최근 장애인 실태 조사에도 드러났듯 여성장애인의 경우 일상생활과 사회참여를 위해 신체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보조기기의 중요도가 상당하지만 우리나라의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관련 정책과 제도는 미흡한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을 인지한 아름다운재단은 대책을 강구하고자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욕구 및 실태 조사’ 연구를 진행했다. 본 연구는 LG생활건강이 지원하고 경기도재활공학서비스연구지원센터가 협력한 <2022 여성장애인 맞춤형 보조기기 지원사업> 일환으로 책임연구원으로는 나사렛대학교 재활의료공학과 공진용 교수가 참여했다. 그는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관련 논의와 지원을 확장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고자 체계적인 과정을 수립하며 본 연구에 몰입했다.
장애인 이전에 여성으로, 새로운 지평을 펼치는 출발선
보조공학 전문가로 산학연관 일선에서 활동 중인 공진용 교수. 장애인과 보조기기 관련 정책과 제도 수립에도 관여하는 그는 본 연구에 각별히 신중을 기해 임했다. 무엇보다 본 연구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장애인이 대상이고, 그들의 새로운 지평을 펼치는 출발선인 까닭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욕구 및 실태 조사를 통한 품목 범주화 도출’인데요. 선행연구가 없다 보니 난감하기도 했지만, 연구진의 협력을 통해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연구진으로는 서울시장애인의사소통권리증진센터 김경양 센터장님, 대구대학교 작업치료학과 이선민 교수님, 한서대학교 의료복지공학과 안나연 교수님, 그리고 작업치료 전문가로 연구차 미국에 체류 중인 홍은경 박사님이 함께했습니다.”
그는 연구진과 협의해 본 연구의 과정을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해 실행했다. 국내·외 문헌 조사, 해외 선진국 사례 조사 및 기관 방문, 여성장애인 설문 조사 및 통계 분석, 여성장애인 및 지원 인력 집단심층면접(Focus Group Interview, FGI),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전문가 델파이 조사, 여성장애인 관련 단체 자문회의의 순서였다.
“국내·외 문헌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보건복지부를 비롯한 5개 부처, 9개 사업에서 공적급여를 통해 보조기기를 제공하고 있었는데요. 여성장애인 대상의 지원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해외에는 여성장애인에게 임신과 육아 중심의 다양한 보조기기를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그 외에는 특별한 품목을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실제로 선진국 사례 조사를 위해 미국, 캐나다, 영국의 유관 기관들을 방문하며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관련 현황은 생각보다 열악했다. 공진용 교수는 착잡한 심정을 달래며 다음으로 설문 조사에 돌입했다. 문항은 ‘여성으로서 마주하는 불편’과 ‘그 때문에 요구되는 보조기기’가 주요 내용이었다. 또한 대상은 장애 유형에 따라 뇌병변장애,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장애로 구분했고, 각 50명씩 총 200명이 응답했다. 코로나19로 직접적인 대면이 어려웠고, 청각장애는 난독증을 수반하는 탓에 난항도 많았지만, 공진용 교수는 전심전력을 다해 설문 조사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설문 조사를 통계 분석하니 일상생활, 그러니까 자기관리와 가사활동 관련 답변이 각각 15.6%, 14%의 비중으로 가장 많았고요. 설문 조사만으로는 부족한 부분도 있어 여성장애인 다섯 분과 지원 인력 다섯 분을 모시고 집단심층면접을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층 실질적인 상황과 구체적인 요청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무엇보다 의료‧건강 관련 ‘생리혈 감지기기’의 중요성을 조명할 수 있었습니다.
집단심층면접 이후 여성장애인 보조기기의 품목은 한층 다각화됐다. 이제는 검증이 필요했다. 공진용 교수는 경력 5년 이상의 보조기기 관련 전문가 10명에게 델파이 조사를 요청했다. 2회에 걸친 그들의 답변 속에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품목의 범주가 구체화됐다. 다만, 공진용 교수는 신뢰성과 타당성을 더욱 확보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여성장애인 관련 단체 관계자 6명이 자리한 자문회의를 개최해 최종적으로 그들의 의견도 수렴했다.
복지보다 권리로, 살만한 세상을 세우는 디딤돌
2022년 4월부터 그해 연말까지 본 연구는 계획대로 실행됐다. 공진용 교수를 비롯한 연구진은 심혈을 기울여 집중한 끝에 뜻깊은 결실을 맺었다. 여성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의 품목을 비로소 범주화한 것이다. 여성의 관점에서 도출된 결과인 만큼 기존의 보조기기 범주와는 당연히 구별됐다.
공진용 교수에 따르면 여성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의 품목은 모두 여덟 가지 영역에서 범주화됐다. 다름 아닌 ‘일상생활’, ‘모성권’, ‘노동‧직업’, ‘여가’, ‘학업‧교육‧정보접근’, ‘사회참여’, ‘의료‧건강’, 그리고 ‘인권‧차별’이다. 여기서 인권‧차별은 그동안 범주화된 적이 없는 영역이었지만, 공진용 교수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반드시 거론돼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집단심층면접에서 예상 밖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바로 성추행에 관한 얘기였는데요. 아무래도 ‘호신용 보조기기’의 필요성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느 보조기기처럼 활동 시 문제를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접근했고요. 실제로 여성장애인분들의 관심도도 높았습니다. 세부적인 품목으로는 호신용 스프레이, 장착용 캠, 주거침입 경보기 등이 언급되었습니다.”
공진용 교수는 여성의 입장을 오롯이 헤아렸다. 그 시선으로 그는 모성권의 영역도 빠뜨리지 않고 강조했다. 모성권, 곧 임신과 육아는 자문회의에서 여성장애인이 곤란을 겪는 활동 1순위로 지목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품목으로는 해외에서 통용되고 있는 ‘진동 알림 아기 모니터’와 ‘휠체어 장착형 유모차’가 제시됐다. 물론 휠체어 장착형 유모차는 엘리베이터 탑승을 포함해 유연한 이동성이 확보돼야 한다. 이어 공진용 교수는 접근성과 보급성 차원에서 보다 시급한 품목도 재차 짚어줬다.
“여성장애인분들에게 절실한 보조기기들이 상당합니다. 특히 생리혈 감지기기, 호신용 보조기기, 진동 알림 아기 모니터 등은 너무 중요하고 당장 필요하죠. 하지만 대부분의 보조기기는 비용적인 측면에서 제작이나 수입이 제한되고 있고요. 일부 여성장애인분들은 이와 같은 보조기기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조속히 본 연구의 결과가 논의돼서 공공의 정책과 제도는 물론 선도적인 지원사업에 반영되면 좋겠습니다.”
여성장애인을 위한 공진용 교수의 진심. 지금껏 그는 본 연구로 결론지은 여성장애인 보조기기의 여덟 가지 범주와 주요 품목에 대해 상세하게 풀어줬다. 그뿐 아니라 그는 본 연구를 디딤돌로 삼아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관련 환경이 개선되길 누구보다 희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 연구는 여성장애인 보조기기의 범주를 최초로 제시했고, 동시에 여성장애인 보조기기 관련 논의와 지원을 확장하기 위한 뚜렷한 근거를 마련했다. 이는 본 연구의 크나큰 성과였다. 사실 공진용 교수는 본 연구가 최초라는 이유에서 그간 부담감이 적잖았다. 하지만 여성장애인의 실상을 직면하고, 소망을 마주하는 사이 부담감은 점점 사명감으로 승화했다. 그 사명감으로 그는 본 연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끝맺을 수 있었다.
단지 이제는 본 연구에 대한 세상의 반향을 기대할 차례였다. 그 관점에서 돌아보니 앞서 오준 전 UN대사의 <강 건너의 세상> 강연 속에 등장한 아름다운 섬이 떠오른다. 그 섬의 이름은 ‘마사드 빈야드(Martha’s Vineyard)’인 것 같다.
미국의 보스턴 남부에 위치한 마사드 빈야드에는 특수한 유전자 때문에 선천적으로 청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어릴 적부터 수어를 배워 언어와 함께 사용하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강 건너 어느 작은 마을에 거주하던 한 여성이 ‘버스’ 타고, ‘다리’ 건너 그 섬에 방문했다. 그녀는 그 섬에서 청력을 상실한 사람을 향해 그가 청각장애인이냐고 주위에 물어봤다. 그러자 주민들이 대답했다. “아니오, 그냥 소리가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라고. 어느 작은 마을에 ‘다리’와 ‘버스’가 생겨나며 한 여성을 아름다운 섬, 마사드 빈야드로 인도했다. 그렇듯 여성장애인을 위한 보조기기 또한 모두가 더불어 살만한 행복한 세상을 펼쳐주리라 확신한다.
글 노현덕
사진 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