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로 활동하면서 제일 먼저 했던 일은 그동안 살아온 삶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두렵고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렵고 걱정스러운 감정은 옅어 졌다. 대신 그 자리에 ‘용기’가 들어왔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다. 나의 ‘열여덟, 내 인생’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들 덕분에 더 이상 용기를 내지 않는다. 그저 내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할 뿐이다. 나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들어준 존재들처럼, 이제는 내가 또 다른 자립준비청년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싶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가정위탁에서 보호가 종료된 자립준비청년이자 부자가 되고 싶은 이혁진 님이다. 혁진님은 돈이 없어서 울어 보기도 하고, 중학생 때는 직접 학원비를 벌어 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혁진 님의 꿈에는 내가 받았던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고 싶은 희망도 담겼다. 이번 영상 작업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과 고민을 나누면서 ‘열여덟, 내 인생_이혁진’은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
혁진 님 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열여덟, 내 인생’ 영상을 통해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줄 자립준비청년을 찾던 중, 감사하게도 혁진님과의 인연이 신선 캠페이너를 통해 내게 닿았다. 영상 기획안을 쓰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그간 많이 이야기 되지 않았던 가정위탁 자립준비청년들의 목소리를 많이 담는 것이었다. 실제로 가정위탁에서 보호가 종료된 자립준비청년의 비율이 더 높아지고 있지만 이 친구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고민들이 있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나 또한 보육원에서 자라 자립했기 때문에 주변에서 가정위탁 친구들을 많이 볼 수 없었다.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혁진님을 만나 사전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사전 인터뷰를 위해 혁진 님을 처음 만나는 날, 어쩐지 긴장이 되었다. 올해 영상 작업을 하면서 두 번째 진행하는 사전 인터뷰지만 떨리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혹시나 너무 캐묻는 질문은 아닐지, 불편하지는 않을지 걱정하면서 현재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물었다.
“혁진 님은 주로 어떤 일상을 보내세요?”
“저는 굉장히 바쁘게 살아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싶거든요.”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혁진 님의 말이 솔직하면서도 멋있게 느껴졌다. 솔직한 혁진 님 덕분에 긴장을 뒤로 한 채 편하게 사전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혁진 님이 해주고 싶은 말
평소에 혁진 님은 보육원에 가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전하는 자립 사례 강연을 한다고 했다. 자립한지 3년이 되었지만 그간 살아온 경험과 자립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의 의미를 느끼고 있었다. “모두가 제 이야기를 다 듣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 명이라도 이야기를 잘 들어서 자립하는데 꼭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가정위탁에서 자랐다 보니 가까이에서 이야기 해줄 선배들이 없었거든요.” 그러면서 혁진 님은 강연 자료를 내게 보여주었다. 강연 자료에는 혁진 님이 살아온 지난 삶의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강연을 하는 건 어떠세요?” 라는 질문에 혁진 님은 강연을 하러 갈 때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희미했던 목표들을 친구들에게 전하면서 선명해지기도 하고, 자신이 정한 목표로 잘 걸어가기 위한 힘이 생긴다고. 나 또한 자립 사례 발표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나도 혁진 님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현재의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전하면서 과거의 경험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앞으로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 맨 마지막 장에는 혁진 님의 바라는 삶과 가치관이 담겨있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사랑하자” 라는 문장이 나의 시선을 오래 붙잡아 두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알아가는 중.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나 또한 자립 이후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면서 일을 했지만, 공허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뒤늦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경험을 통해, 사람을 통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통해 서서히 찾아갔다. 혁진 님이 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혁진 님 삶에 대한 철학이기도 했다. 자립하는 과정에서 선택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자자립은 나의 색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해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잘 몰랐던 나를 구석구석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면서 나 다운 선택을 하는 것으로 말이다.
두 번째 인터뷰, 세 번째 만남
혁진 님과 사전 인터뷰를 나누고, 우리는 온라인에서 한 번 더 만났다. 사전 인터뷰에서 잘 알 수 없던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자립준비청년 당사자를 만나고 영상을 만들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당사자를 자주 만나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쌓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인터뷰이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혁진 님의 꿈에는 어릴 적부터 돈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정말 돈이 없어서 힘들었던 적도, 울어본 경험도 많이 있거든요.” 다행히 자립을 하면서 혁진 님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성실하게 일을 해 남들보다 빨리 매니저의 직책을 맡기도 했고, 돈을 벌어 저축을 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이 자기 효능감으로, 더 잘 살고 싶다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혁진 님이 면접을 보러 서울에 왔을 때 세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는 번 아웃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바쁘게 하루를 보내지 않으면 불안했던 혁진 님 에게 어느 날 번아웃이 찾아왔다고 한다. 수업을 듣는데 이유 없이 눈물이 나고 슬퍼지는 생각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때 지도 교수님이 혁진 님의 표정을 보고 알아차려 주었다. 교수님이 던져준 “혁진아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 거니? 너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하니?” 라는 질문을 듣고 혁진 님은 처음으로 내가 왜 그렇게 열심히 사는지, 왜 부자가 되고 싶은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작은 알아차림과 진심 어린 질문은 때때로 그 무엇보다 강하다.
이야기에는 당사자의 관점이 있다
지난 시간 혁진 님이 해준 삶의 이야기를 통해 영상 시나리오를 구성하면서 많은 고민이 들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혁진 님의 꿈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릴까?’ ‘혹여나 너무 돈을 쫓는 사람처럼 그려지면 어떡하지?’ ‘어떤 장면으로 구성하고 인서트 컷을 넣어야 사람들이 더 공감하면서 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혁진 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전달하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더불어 촬영 당일 또 새롭게 나오게 될 이야기들을 환영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촬영 당일, 긴장된 혁진 님이 인터뷰이로 긴장된 나는 인터뷰어로 자리를 잡았다. 긴장하지 않은 것은 포근하고, 따뜻한 스튜디오 뿐이었다. 혁진 님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우리의 이야기가 겹쳐서 들렸다. 나와 혁진 님의 이야기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 음식이 있었다. 그건 바로 짜장면이었다. 어릴 적 할머니와의 추억을 이야기 하면서 혁진 님이 이야기 해준 짜장면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촬영 본 인터뷰에서 처음 듣게 되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는 어린 혁진을 위해 할머니가 아침 버스를 타고 나가서 저녁이 되어서 사온 퉁퉁 불어버린 자장면에 대한 이야기에 내가 보육원을 나와 자립의 순간 먹었던 짜장면이 떠올랐다.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이야기하며 사주었던 짜장면을 생각하면서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실감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혁진 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주 고개를 끄덕였고, 어린 시절의 혁진 님과 나 자신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저의 23년을 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사자가 꺼내는 솔직한 삶은 살아있는 이야기이자 용기이다. 그렇다보니 편집을 할 때 마다 정말 많은 고민이 든다. 전해준 삶의 이야기를 보다 잘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폰트를 쓸지, 어떤 배경음이 더 어울리는지 정말 작은 것도 꼼꼼하게 보게 된다. 그렇다 보니 같은 장면을 수 없이 보는 날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영상의 구성과 순서를 아예 바꾸기도 한다. 완성된 영상을 혁진 님 에게 보여주었을 때 보내준 메시를 잊을 수가 없다. 이 메시지는 여전히 나의 사진첩에 저장 되어있다.
“정말 많은 노력이 담긴 영상이네요. 저의 23년을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자립준비청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상을 담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청춘의 삶이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들어서다. 시간이 지나 가족이 생겼을 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꺼낼 때 두고두고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혁진 님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자신의 열여덟, 내인생 영상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링크가 걸려있다. 이 링크가 걸려있는 프로필을 보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당당하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혁진 님을 열렬히 응원하며, 혁진님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이 퍼지기를 바란다.
글/사진: 손자영 캠페이너
https://youtu.be/PvwAWOmzfiw?si=tSAJia-FUQvKnn6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