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가 죽으러 온 사람도, 공짜노동을 하고 싶은 사람도 없다

15년 전, 캄보디아에서 자원활동으로 모내기를 했었어요. 워낙 더운 나라인 데다 8월이었고, 그늘이 없으니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땀이 비오듯 흐르는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서 ‘시원하게 일할 수 있겠구나’ 하던 찰나, 현지 주민분들이 해준 이야기가 떠올라 바로 피했어요. 소나기가 내리면 번개가 자주 치는데 피뢰침이 없다 보니 자칫하다가는 번개에 즉사하는 경우가 많다고, 꼭 피하라고 신신당부를 했었거든요. 단 하루의 노동이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체감한 날이었어요.

캄보디아에서의 저처럼, 한국에 와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를 떠올려봤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용을 아끼겠다는 이유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에요. 얼마 전 화성 아리셀 공장에서 18명의 이주노동자, 5명의 한국인이 사망하기도 했고요. 화재가 난 공장처럼 위험한 노동현장이 얼마나 많을지, 이주노동자들이 어떤 위험에 처해있는지 아직 파악조차 안 된 상황입니다.

이번 후후레터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현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활동가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이주노동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우춘희 연구활동가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우춘희 연구활동가,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중

우춘희 연구활동가,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 사회학 박사과정 중

우춘희 활동가의 저서 ‘깻잎투쟁기’, 1500일 동안 캄보디아 노동자들과 깻잎을 따며, 노동현실을 직접 보고 기록했다

Q. 우춘희 연구활동가님,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A.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는 우춘희라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는 먹거리를 소비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어요. 먹거리 소비자들은 먹방 유튜버들도 있고, 가시화되어 있지만 생산자들은 잘 보이지 않잖아요. 농민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어떤 식으로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지 구조를 보고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유학을 오게 됐고요. 생산자를 만나다보니 모든 농민들이 ‘이제 외국인 없으면 농사 못 지어’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실제로 제가 가는 곳곳마다, 네팔,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온 노동자들이 비닐하우스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고요. 이 분들이 어떤 노동을 하고 있고,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고 싶어졌어요.

경남 밀양의 깻잎 밭에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가 깻잎을 수확하고 있다. 하루 9~10시간씩 쪼그려 앉은 자세로 깻잎을 딴다. ⓒ우춘희

경남 밀양의 깻잎 밭에서 캄보디아 이주노동자가 깻잎을 수확하고 있다. 하루 9~10시간씩 쪼그려 앉은 자세로 깻잎을 딴다. ⓒ우춘희

우춘희 활동가에게 깻잎따기와 묶음포장을 보여주고 있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1분에 30여장의 깻잎을 따야 목표량을 채운다 ⓒ우춘희

우춘희 활동가에게 깻잎따기와 묶음포장을 보여주고 있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1분에 30여장의 깻잎을 따야 목표량을 채운다 ⓒ우춘희

Q.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실제 깻잎 농사를 지어보셨잖아요. 저서인 ‘깻잎 투쟁기’를 읽다보니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깻잎을 따는데 사실 현실에선 최저임금도 못 받고 약속한 임금도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요.

A. 이주노동자들은 내국인처럼 한국에 머물면서 소송을 할 수가 없고,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임금을 줘야 할 사업주 입장에서는 이주노동자가 출국하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해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미나 씨의 경우 3천만 원을 못 받았는데요. 임신을 한데다 비자도 만료가 되어서 본국에 돌아갈 일만 남은 상황이었어요. 기자, 활동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러더라고요. “3천만 원 받으면 ‘지구인의 정류장’에 기부하겠다, 임금 체불을 당한 노동자를 위해 써달라”고요. 한국 사회는 왜 이걸 해결해 주지 않는가에 대한 분노, 또 사업장을 바꾸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 이 돈을 썼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 저는 그 마음을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겠어요.

Q. 미나 씨는 3천만 원을 받으셨나요?

A. 못 받았어요. 2020년도 6월에 출국했으니 4년이 지났네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노동청도 체불임금을 인정했고, 민·형사 재판 모두 미나 씨가 승소했는데도요.

미나(맨 왼쪽)씨가 JT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이주인권단체인 '지구인의 정류장'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모여, 사업주의 임금체불, 최저임금을 못받는 상황, 열악한 주거환경 등을 토로했다. ⓒ우춘희

미나(맨 왼쪽)씨가 JT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의 이주인권단체인 ‘지구인의 정류장’에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모여, 사업주의 임금체불, 최저임금을 못받는 상황, 열악한 주거환경 등을 토로했다. ⓒ우춘희

Q. 임금체불뿐만 아니라 산재로 인한 사망자도 늘고 있어요. 연구활동가님이 접한 이주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사례가 궁금합니다.

A. 실제로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례들이 굉장히 많아요. 과로사라든가, 자다가 죽은 돌연사와 같은 경우는 캄보디아 커뮤니티 페이스북에 많이 올라옵니다. 특히 겨울에 돌연사 같은 게 많이 일어나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은 추위를 경험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들에게는 20도가 추운 거니까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돌연사했는데 증거는 없는 거죠. 가족 동의를 받아야 부검할수 있는데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하니까… 신문에 실리지도 않고 그냥 죽은 것으로 처리가 돼요. 그 자리에는 바로 다음 이주노동자가 와서 빈자리를 채우고요. 위험의 외주화 그 끝에는 이주 노동자들이 있다고 봐요. 물론 내국인도 당연히 있지만 그 끝에 끝에 끝에는 이주 노동자들이 있는 것 같아요.

Q. 농업의 경우에도 산재가 많은데요. 최근에는 외국인 계절근로제가 도입되어서 농번기에만 단기간 일하러 오는 노동자들도 있다고요. 이들의 노동현실은 어떤가요?

A. 5개월 정도 와서 일을 하고 본국에 가는 방식이라 좋게 보일 수도 있는데요. 사실 고용허가제로 오는 분들은 최소한 어떤 제도가 있고 임금 체불 당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교육이라도 받고 오는데 외국인 계절근로제로 오는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구조적으로 일단 언어가 잘 안 되다보니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고, 어떤 식으로 도움을 받고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 접근이 많지 않습니다. 가령 여권을 압수한다거나 브로커 비용을 받는 경우도 있는데 대응하기가 어려운거죠.

퇴근해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집

Q. 2020년 12월 캄보디아 이주노동자 속행 씨가 영하 18도에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잠을 자다 숨졌어요. 이후 한국 사회에도 파장이 일었잖아요. 그동안 달라진건 없을까요?

A. 있습니다. 우선 속행 씨가 오랜 기다림 끝에 산재 판정을 받았어요.(관련기사 링크) 한국 사람 정서에 ‘사람이 어떻게 자다가 죽나’ 생각하고 많이들 공감해주시기도 했고요. 두 번째는 이주노동자들이 지내는 숙소의 변화인데요. 사업주들이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가건물 같은 숙소가 아니라 집다운 집을 제공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한 방에 그냥 5명씩 바글바글 함께 있는 숙소였다면 이제 1명이나 2명 정도 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다만 예전보다 숙소비가 많이 올랐어요. 이주노동자들은 사업주가 월급에서 숙소비를 공제하는데요. 숙소비가 급여에 비해 비싸졌어요. 2023년도 7월 이후 정부에서 숙소비를 합당하게 받으라는 지침이 내려왔지만 그게 의무사항은 아니거든요.

생활집기와 가스통이 위험하게 섞여있는 이주노동자의 비닐하우스 숙소 ⓒ우춘희

생활집기와 가스통이 위험하게 섞여있는 이주노동자의 비닐하우스 숙소 ⓒ우춘희

수해로 잠긴 이주노동자의 비닐하우스 숙소 ⓒ우춘희

수해로 잠긴 이주노동자의 비닐하우스 숙소 ⓒ우춘희

Q. 사업주 인식이 바뀐 건 긍정적이지만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난 만큼 주거공간이 금방 바뀌진 않을 것 같아요. 더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안전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예를 들어 집은 좋지만 가스통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위험하게 배치되어 있는 경우도 있거든요. 수해가 났을 때 페북 메시지로 사진을 받았는데 비닐하우스가 잠겼더라고요. 전기가 합선돼서 불이 나는 경우도 굉장히 많거든요. 월세를 받는 만큼 안전에 관해서도 신경을 써야해요.

 
사람이 오고 사회가 바뀌고 있는데, 시선만은 그대로

Q. 책에 담지 못한,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이들과의 에피소드도 많으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A. 졸자야 씨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어요. 당시 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려고 지역이동을 금지할 때였어요. 졸자야씨는 미등록 체류 상태라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불러주는 곳은 다 갔어요. 사과를 포장하러 가기도 하고, 양파를 따러가고, 모텔을 청소하고… 한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시는 분이었죠. 저는 연구자다보니 시간을 내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오히려 저에게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늘 ‘어디 가서 일해’, ‘몇 호 청소해’, ‘어디 가서 사과 포장해’와 같은 지시만 들어봤다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고요. 그때 조금 더 어깨가 무거워지고 책임감을 느끼게 됐어요. 졸자야 씨의 이야기가 연구 사례로 쓰이는 게 아니라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게끔 얘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Q. 미등록 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라고 일컬어졌던)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점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이번 화성에서 발생한 화재사고의 경우에도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있었다면 아마 다른 반응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A. 저도 공감해요. 미등록 이주민이 체류 기간이 지난 상태인 건 맞죠. 행정상 그렇습니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에서 미등록 이주민이 임금 체불을 당하면 노동자성은 인정이 됩니다. 앞으로 노동자성을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어요. 이 사람이 불법 체류든, 합법 체류든 한국인이든 이게 문제가 아니라 노동을 제공하고 있는 현장을 보자는 거예요.

이주노동자들이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 잘 전해질 수 있도록, 꾹꾹 씁니다

Q. 최근 외국인 가사근로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논의가 있었어요.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A. 최저임금법은 법의 취지에 맞게 지켜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이, 지역, 성별, 성적지향, 종교 그 무엇을 막론하고 이 임금을 받아야 한국 사회에서 살 수 있다라고 우리가 합의한 거잖아요. 일례로 제가 전국에서 온 고등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며 물어본게 있어요. 만약 경기도에서 온 사람들은 최저임금 1만 5천 원을 주고, 경남이나 전남에서 오신 분들은 절반정도인 7천 원만 주면 어떠냐고. 당연히 분노하더라고요. ‘왜 우리를 차별하냐’라고요.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실 거예요. 외국인 가사도우미도 마찬가지죠. ‘무슨 근거로 그 돈을 주느냐’고 했을 때 한국 사회가 뭐라고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같이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Q. 이번 화성 사고의 경우 재외동포비자, 영주비자, 결혼이민비자 등 서로 다른 비자를 지닌 이주민들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고용허가제로 들어온 경우 법령상 관리대상이 되어 별도 교육을 받지만 다른 비자는 따로 교육 과정이 없잖아요. 그렇다보니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요.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요?

A.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이 16개국에서 오니까 언어가 다 달라요. 그래서 코로나 때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좋겠습니다. 마스크를 사용하고 손을 씻어야 한다는 내용을 16개 언어로 다 번역해서 정부가 발 빠르게 대처한 경험이 있거든요. 경험을 확장해서 노동 안전과 직결된 것, 하다못해 리튬 전지도 화재가 났을 때 대피를 해야한다는 내용을 단 10분만이라도 교육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큰 인명 사고로 번지지 않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미등록 이주민도 코로나19 검사를 무료로 해주었던 것처럼 당신의 안전이 우리의 안전이라는 마음으로 대책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Q. 이주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어떤 대우를 받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셨던 만큼 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도 많으셨을 것 같아요. 어디에서 힘을 얻고, 연구를 이어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처음에 ‘깻잎투쟁기’ 출판 제안을 받았을 때 사실 거절했었어요. ‘사람들은 이주민에 관심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랬는데 출판하고나서 책의 반응이 굉장히 뜨거웠거든요. 고등학생들도 인권 관련해서 책을 읽기도 하고 대학교 수업에서 읽기도 해서 제가 여러번 강의를 하기도 했었고요. 같이 얘기하면서 막 분노하고, 그래도 뭐라도 해야하지 않겠냐고 생각도 나눠보고요. 저는 그 분노의 힘이 조금씩 사회가 변화하는 걸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주노동자들이 정말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들여서 힘들여서 목소리를 꾹꾹 눌러 담아서 저에게 말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저도 함께 꾹꾹 눌러서 글을 써야겠다고, 같이 함께 꾹꾹 눌러서 말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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