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3 보고싶지만, 괜찮아
오늘 후후레터는 스물네 살, 신애진 씨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애진 씨는 첫 출근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사회 초년생이었어요. 졸업하자마자 취업했고,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했죠. 꿈도, 사랑도 많았던 애진 씨는 회사 동기들과 회식을 하고 나오던 날, 인파에 휩쓸리면서 사망했습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로 사망한 애진 씨의 생일과 기일은 모두 10월이에요. 가족들은 늘 설레며 기다렸던 10월을 앞으로 어떻게 맞이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지만, 한 가지 바람으로 아름다운재단을 찾아주셨어요. 애진 씨가 살아온 세상, 그리고 남겨진 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답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죠. 애진 씨의 회사에서 지급된 사망보험금 1억 5천만 원을 기부해 주셨고, 그렇게 신애진기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참사 이후 2년이 흘렀지만 ‘한국 사회가 그만큼 나아졌냐’는 물음에 쉽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남겨진 이들은 책임 소재를 명확히 밝히고, 다신 이와 같은 참사가 없기를 바라며 변화를 촉구하고 있어요. 이번 후후레터는 애진 씨가 살아온 세상, 그리고 남겨진 이들이 바라는 변화에 대해 들려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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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진이가 사회에서 받은 사랑과 마음을 사회에 돌려 드리고자 합니다.”
애진 씨는 열정이 남달랐던 청년이었습니다. 엄마, 아빠를 위해 다정한 편지를 쓰던 딸이기도 했고, 직장 동료들에게는 오래 알고 지내고 싶었던 사람이었죠. 가족들은 애진 씨의 삶이 세상에 좀 더 오래 기억되기를, 그리고 애진 씨가 없더라도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기를 바라며 아름다운재단을 찾아주셨습니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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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신애진기금을 출연한 아빠 신정섭, 동생 신재원, 엄마 김남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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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자녀인 애진 씨의 이름으로 1억 5천만 원을 기부하셨어요. 아름다운재단에 기금을 출연하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안녕하세요, 신애진 아빠 신정섭, 엄마 김남희, 동생 신재원입니다. 애진이가 떠나고, 애진이의 회사에서 사망보험금이 나왔습니다. 사회에서 받은 거니, 사회에 돌려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건 평소 애진이가 했던 말이기도 하구요. 비록 애진이는 이 세상에 없지만, 애진이가 살았던 세상,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어요. 아름다운재단이라는 이름에 끌렸던 이유이기도 해요. 재단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변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마음을 정할 수 있었습니다. 미력하나마,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Q. 기부금을 통해 청년을 지원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내용을 전해주셨는데요. 기금이 어떤 곳에, 어떻게 쓰이길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A. 애진이가 청년 창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했기에, 청년들의 자립활동에 지원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청년들이 곧 우리 사회의 기둥이고 앞으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동량(棟梁: 집안이나 나라를 떠받치는 중대한 일을 맡을 만한 인재를 이르는 말)들이니까요.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지나친 경쟁과 높은 실업률로 많이 지쳐 있고, 꿈을 빼앗긴 채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숨이라도 한번 쉴 수 있도록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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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 ‘애진이와 함께한 순간들’ 애진 씨의 사진에 지인들이 붙여둔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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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태원 참사 100일 추모제에서 응원을 보내주신 시민들을 생각하며 동화책을 쓰셨다는 내용을 기사에서 보았습니다. 참사 이후 힘이 되었던 기억들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참사가 발생하고 무척이나 힘든 시간들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을 추스리기도 버거운데, 2차 가해로 가슴을 난도질하고 이를 방치한 이들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공감과 연대였습니다. 혼자였다면 아마 지금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그 추운 겨울날 녹사평 분향소에서 자원봉사자분들과, 그곳에 찾아와 손을 잡아 주시던 분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이 잡아 주신 따뜻한 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Q. 애진 씨와 같은 청년들이 안전한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이것만은 꼭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A. 정부는 이태원 참사의 원인이 군중유체화(군중에 휩싸여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둥둥 떠밀려 이동하는 현상)라고 말하지만, 군중유체화는 원인이 아니라 현상일 뿐입니다. 참사의 원인은 참사를 예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행정기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인파가 모이는데, 지자체와 경찰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요? 행정조직의 수장, 그리고 그 직원들이 자신의 업무를 정확히 파악하고, 수행했더라면 이태원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일은 국가의 기본적이고 최우선적인 의무입니다. 국가의 기본 정책과 방향이 국민의 생명보호를 최우선으로 할 때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모든 행정업무는 정부의 정책과 방향에 따라 계획되고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우리 사회는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생명과 인권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를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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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우면 그립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지난해 10월 19일은 애진 씨 없이 맞이한 첫 번째 생일이었어요. 엄마 김남희 씨는 애진 씨 친구들에게 ‘애진이가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하냐’는 연락을 참 많이 받았다고 해요. 함께 모여 추억하고 싶은 마음에 다같이 만났고, 편히 애진 씨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족들은 사람들이 애진 씨를 슬픈 기억으로만 묻어두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돌아오는 이번 생일에는 모여서 추억하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바람으로 사진전 ‘애진이와 함께한 순간들’을 준비했죠. 친구들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애진 씨와의 추억들을 한 조각, 한 조각 보태주었고, 직접 쓴 편지도 보내주었답니다.
후후레터도 애진 씨가 만들어준 기억의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지금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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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전에 방문한 지인들이 애진 씨에게 남긴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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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김남희 씨가 애진 씨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과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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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애진이에게] 애진이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사진과 함께 편지를 써서 보내왔어요. 쏟아지는 추억들 사이로 ‘보고싶다, 기억하겠다’는 말이 빼곡히 차있었습니다. 애진 씨가 보내주었던 사랑을 벗삼아 나아가보겠다는 결심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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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진이의 방] “정말 오랜만이야. 한참 보지 못했다고 우리들의 우정 잊은 건 아니겠지? 내 방에서 사진도 찍고 편지도 남겨줘. 다시 만날 때 답장은 직접 전할게.” 애진 씨의 방을 재현해둔 곳이에요. 친구들과 셀카를 찍던 거울, 방에 있던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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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진이를 기억하는 법] 각자의 방식으로 애진 씨를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 애진 씨가 잠들어있는 양평 묘역으로 가는 방법을 브이로그로 찍어둔 친구도 있었고, 함께 가던 맛집을 리스트화해둔 친구도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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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지만 괜찮아] 애진 씨가 생전 남겨두었던 영상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에요. 해사한 미소로 맞이하는 공간에서 친구들은 애진 씨를 마음놓고 추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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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름다운재단] 애진 씨에게 건네받은 마음의 유산을 받아들고 나오는 길. 매니저들은 아름다운재단의 역할을 생각했습니다. 꿈꾸는 청년들을 누구보다 응원했던 애진 씨의 뜻을 이어가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청년들이 애진 씨처럼 자신의 열정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애진기금으로 이어나갈 이야기들은 앞으로 꾸준히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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