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후반에 태어난 나는 딸부잣집 막내딸이다. 위로 언니만 다섯명. 다자녀 · 딸부잣집이 흔한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아들을 귀하게 여겨 보통 딸은 마지막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후남’, ‘종말’이란 이름의 친구도 있었다. 종말론의 그 종말과 비슷하게 사용하였겠지만, 보통은 딸 그만 낳으라고 쫑말이라고 불렸었다.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방언 ‘쫑’에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교수가 된 ‘후남’이는 제자들이 “교수님 이름이 멋져요.”할 때 어이가 좀 없었다고 한다. 요즘 학생들에게는 중성적인 이름으로 들리겠지만, 한자로는 후에 남자가 태어나라는 이름으로 後男이다. 그래서 이 친구는 작년에 개명했다. 본인이 자각하는 그 이름이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아서다. 40평생 가꾸어온 나름의 자기 존재를 밝히고자 본인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
다시 본론으로, 나의 언니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결혼하여 또 아이를 낳았다. 어느새 조카들이 나를 할머니로 만들어 주었다. 벌써 손주들만 셋이다. 이러다 보니 세어도 세어도 잘 세어지지 않는 가족 수를 밝히자면, 엄마 아빠 포함 딸 6명, 원가족 8명이 형부들과 조카들까지 있을 때는 20명, 그렇게 한 20여년의 명절을 보냈다. 그리고 최근 조카들이 결혼하여 조카의 남편, 부인, 손주들까지 합지면 27명… 나도 이제 못 세겠다. 모이는 인원은 명절 때마다 들쑥날쑥이지만, 20여명은 족히 모인다.
외가 필수로 오는 조카, 한복에서 해방된 셋째언니… 명절 풍경이 바뀌고 있다
금번 설에는 작년에 결혼한 여자조카의 새신랑이 찾아온 반면, 손주들은 바빠서 찾아오지 못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조카들끼리 의논해서 한 해 두 번의 명절을 나누어 지내기로 했단다. 설은 사돈댁에서, 추석은 우리집에서.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외가집(외할머니집)을 꾸준히 찾아와 줄 생각을 하는 것이 고마웠고, 명절 중에 한 번은 시댁을 안가도 되나?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로 했다니…
세상이 많이 변한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큰언니는 서울에 사는 맏며느리여서 김천 시댁까지 내려가서 1박을 하며 명절 당일 아침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고 대전인 친정에 왔어야 했다. 그런데 금년 설부터 그믐날 밤에 차례를 지내고 그냥 명절 새벽부터 서둘러 이동한다고 한다. 덕분에 이동만으로 전국일주를 하는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한다.
종가집 며느리였던 셋째언니는 금년 설에서야 한복을 입지 않고, 차례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곧 나이 60인데 말이다. 몇십 년을 한복 입고 차례를 지냈다는 것인데… 전통의례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시댁에서 1박2일을 지내기 위해 각종 음식재료와 옷가지 등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서 음식도 만들고 차례시간에는 옷도 갈아입는게 어디 보통일인가. 개인적으로 차례를 지내 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지만 상상만으로 힘이 들 것 같다. 그러나 그 또한 한 집의 문화이기 때문에 존중한다.
또 다른 맏며느리인 넷째 언니는 작년 추부터 차례 음식을 많이 줄이고, 집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성묘랑 같이 약식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단다. 제사 음식하고, 집에서 제사 지내고, 성묘가서 또 제사 지내던 것들이 일괄 줄어든 것이다. 덕분에 낮잠을 자는 호사를 누렸다. 언니와 조카들의 삶 속에서 시대가 많이 변한 것을 느낀다. 거침없는 조카들의 행보에 ‘우와, 그래도 돼?’ 이런 말만 하는 내가 우습기도 하고, 힘들어 했던 일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이 기쁘기도 하다.
여자, 남자상 따로 있던 명절 식사, 이제는 한 상에서
식사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엄마, 아빠의 낡고 좁은 집에서 언니들과 엄마가 바쁘게 준비했던 저녁은 거실에 큰 상 3개를 이어 붙여야 다 같이 먹을 수 있었다. 그때 준비하는 이는 언니들과 엄마였다. 형부들은 앉아서 아버지와 술 한 잔. 여자상 남자상을 따로 보기도 했다. 남자상은 술부터 시작해서 식사까지 이어졌고, 여자들은 식사 준비하고 어린애들 챙기느라 따로 먹었던 탓이다. 뭔가 이상하고 억울했지만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언니들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형부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식사팀을 짜는 등 애를 쓰기도 했지만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크고 전반적인 사회 문화가 바뀌면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번 설 음식은 엄마집이 아니라 큰언니와 큰형부가 준비해 주었다. 닭볶음탕은 큰언니가, 각종 메인 반찬류는 큰 형부가 준비했다. 이제 형부들도 명절 가사 노동에 적극적이다. 본인이 했다며 레시피까지 꼼꼼하게 알려 주는 형부, 반찬 떨어질세라 상들을 휘 둘러 보고 다시 채워 주는 세심함까지 갖춘 호스트였다. 뿐이랴, 누가 음식 안만들었다고 할까봐 입고 있던 티셔츠에 음식 튄 자국을 내 보이며 이렇게 열심히 했다며 자랑도 마다 하지 않았다. 조카들도 장성하여 자기들끼리 상을 따로 보아 먹었다. 예전에는 가족끼리 앉아서 엄마 아빠 옆에 딱 붙어 먹더니, 어느새 조카들끼리 앉아 한상에서 쫑알쫑알. 또래 상담을 서로 해 줄 만큼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구가 되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재미있게 놀고 만나고 싶어 새로운 게임으로 맞는 명절
밥과 술만 먹고 헤어지는 것이 늘 아쉽고, 어색한 터라 매해 게임을 한다. 즉석게임도 하고, 기획한 게임도 하고 가족 놀이도 늘 변했다. 아이들 태어나기 전에는 어른들끼리 고스톱과 윷놀이를 했고, 애들 태어나서는 아기들 맞춤으로 손으로 하는 여러 놀이를 주로 했다. 손뼉치기, 공기놀이, 술래잡기 등. 뛰어 다니는게 일상이었던 사춘기 즈음에는 긴줄넘기가 추석의 메인 놀이였고, 보물찾기로 용돈 주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어려서는 조그마한 조카들이 그렇게 뭐만 하면 즐거워하더니 요즘은 어른(50-60대인 언니들과 형부들, 80 중반의 엄마, 아빠)들이 더 즐겁게 참여 하는 편이다. 그래서 새로운 아이템과 다 함께 참여 할 수 있는 놀이를 고민하게 된다. 또 힘들거나 어색하면 어른들이 참여 안한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금년 아이템은 아름다운재단 워크숍에서 했던 찐득이 손바닥 놀이다. 지폐를 고이고이 접어 작게 만들고 멀리 금을 그어 찐득이 손바닥으로 찍어서 올리는 것이다. 게임만 하면 열정적으로 변하는 식구들, 게다가 돈이 걸려 있으니 아주 난리가 났다. 분명 1만 원짜리 땄는데, 다시 내 놓고, 낚시질을 계속 하고, 본인이 참여금 내겠다며 돈을 내고 참여 하는 등 인기가 좋았다. 다음 놀이로 넘어가지 못하고, 계속 찐득이만 했던… 덕분에 새로온 조카의 남편 ‘김서방’도 어색하지 않고 잘 놀았고, 서른 중반이 다 된 큰 조카도 ‘어른’ 노릇하며 게임에 깔 지폐를 내놓으며 명절을 풍성하게 해 주었다.
다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한가지가 있다면
명절풍경이 바뀌는 건 결국 함께 모여서 지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서로 달라진 생활을 존중하고,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배려하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바뀌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을 한가지가 있다. 말하기 좀 부끄럽지만, 집에만 가면 나는 다시 영락없이 막내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1980년 대전의 변두리에 터를 잡은 우리집은 예전에는 남서향으로 햇빛이 잘 들어와 밝았고, 동네에 내 또래 아이들이 가득했다. 지금은 인적이 매우 드문 변두리일 뿐이고, 앞에 큰 병원이 들어서며 해가 잘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연탄난로와 유리문으로 둘러 쌓여 매 겨울마다 추웠으나, 이제는 도시가스 보일러에 창호로 바뀌었다. 그러나 옛 주택이라 여전히 추워 난방을 바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집에만 가면 방바닥과 등이 붙어 버린다. 피곤하지도 않은데, 어두컴컴한 조명에 따뜻한 바닥, 아무일도 안해도 되는 안도감 때문인지 잠이 쏟아 진다. 게다가…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내가 하겠다고 해도, 당신이 서둘러 먼저 하셔서 나설 틈이 없다. 그냥 옆에서 보조하는 수준 뿐이다. 아버지는 주택이라 마당에 해야 할 일들이 좀 있는데, 딸들이 못미더운신지 당신이 후딱후딱 해 버리신다. 설 전날 대전에 눈이 많이 내렸는데, 딸 일어날세라, 당신이 먼저 치우기 시작하셨다. 이러니 내가 등으로 방바닥을 탐색할 수 밖에… 그야말로 할 일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두 분 건강하셔서 그렇게 움직이는게 고맙기도 하고, 넙죽넙죽 매 식사 때마다 받아 먹고 게으르게 지내게 만들어 주는 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이리라 넘겨 버린다. 자식은 평생 어리게 보이므로.
그래서 명절 때마다 나는 그냥 막내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으니… 이 모습 이대로 오래 오래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