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재단이 25주년을 맞았다. 25년 동안 우리는 ‘시민이 만든 기금’이 어떻게 사회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지, ‘시민이 만든 재단’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경험했다. 그러나 25년의 성취는 끝이 아니라 질문의 시작이다. 앞으로의 25년, 우리는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그리고 이 힘은 누구를 위해 쓰여야 할까.
아름다운재단에 몸담아온 지난 17년 동안 나는 “이 재단의 필요성과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들어왔다. 누군가는 “시민사회의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공익활동을 가능케 하는 뒷배”라고 말했다. 이것은 창립부터 이어온 가치 덕분이기도 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금. 아름다운재단이 정치적 풍랑이나 경제 불황 속에서도 꿋꿋이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시민들이 모아준 기금이 있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특정한 개인이나 기업, 종교의 영향 없이 존립할 수 있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4백억 원이 넘는 기금은 단순한 재정 자원이 아니라 곧 권력(Power)이었다. 이 권력은 사회 변화의 방향을 견인하고 공익의 의제를 세우며 그 실행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었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권력. 많은 사람들은 권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정치 권력, 경제 권력, 혹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힘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권력은 사실 가치중립적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권력을 그의 책 <폭력의 세기>에서 “권력이란 단지 행동하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해당한다”고 말했고 미셸 푸코는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 모든 것을 포괄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라며 권력의 일상성을 강조했다. 즉 권력은 특정한 누군가에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와 행동 속에서 늘 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잘 쓰인 권력은 사회를 바꾼다.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인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가 갈리고, 수많은 제도들의 존립에 따라 시민들의 삶과 미래가 결정된다. 권력은 남용되면 억압이 되지만 공평하고 책임 있게 쓰이면 시민 다수의 삶을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기금의 ‘끝’을 정의한 재단들
2023년, 미국의 코러스재단(Chorus Foundation)은 창립 15년 만에 보유 기금을 모두 소진하고 문을 닫았다. 그들은 기금 소멸을 ‘지속가능성의 한 형태로 정의했다. 이 결정은 단순히 ‘돈을 다 썼다’가 아니라 권력을 회수하고 분산시키는 전략적 종착점이었다. 창립자 파하드 에브라히미(Farhad Ebrahimi)는 이렇게 말했다.
“재단이 가진 권력을 책임 있게 다루고, 권력을 공평하게 공유하며, 최종적으로 이양해야 한다.”
한편,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사실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은 코러스재단과는 다른 ‘영속성(in perpetuity) 모델’을 오랫동안 유지했지만 최근 빌게이츠 자신과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가 사망한 후 20년 이내에 모든 기금을 소진하고 문을 닫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들 역시 기금 소진을 말했지만 그들의 소진은 다르다. ‘소멸’이 아니라 집중 투자와 영향력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핵심은 같다. 권력을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권력이 사라진 뒤에도 효과가 지속되도록 ‘사용의 방식’을 설계하는 것이다.

아름다운재단의 선택지는 무엇인가
아름다운재단이 지난 25여 년간 정치적 변화나 경제적 불황 속에서 4백억 원이 넘는 기금을 기반으로 사회 변화의 의제를 설정하고 지속적인 공익 활동을 만들며 건강한 기부문화를 견인해 왔다. 그렇다면 아름다운재단은 이제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할까. 코러스재단처럼 ‘기금 소멸’을 지속가능성으로 삼을 것인가?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처럼 ‘목표 시한’을 정하고 집중 투자로 사회 변화를 가속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 존속을 전제로 새로운 사회 변화 동력을 만드는 ‘영속성(in perpetuity) 모델’을 유지할 것인가? 아름다운재단이 창립 이래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본격적인 논의를 한 적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멸이든 존속이든, 방향 없는 지속은 결국 재단의 존재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그저 ‘오래 버티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능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다루는 세 가지 원칙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제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다만 아름다운재단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권력에 대한 세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권력의 투명성과 분산, 그리고 이양에 대한 것이다.
권력의 투명성 기금 사용의 기준과 방향을 시민과 공유하고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권력의 분산 지원의 대상, 의제, 방식에서 특정 집단이나 가치가 독점하지 않도록 구조를 설계한다.
권력의 이양 기금과 자원을 장기적으로 시민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
아름다운재단은 특정 종교, 개인, 정치적 영향력 없이 시민에 의해 설립된 시민이 주인인 재단이다. 따라서 우리의 권력은 끝없이 시민들과 논의하고 소통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권력을 투명하게 하고 분산시키며 이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필요성을 다시 증명하게 된다.

결론 대신, 질문으로
아름다운재단이 앞으로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돈이 남아 있어서’도, ‘오래된 재단이니까’도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던지는 변화의 무게가 우리가 가진 자원보다 커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는 물어야 한다. “소멸은 지속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까?” 재단이 가진 권력은 언젠가 사라진다. 그리하여 나는 바란다. 아름다운재단의 힘이자 권력이 자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의 신뢰, 기부자들, 그리고 함께 일하는 내부 구성원이라는 ‘사람’에서 비롯되어 작동하기를. 그렇게 사람과 신뢰에서 비롯된 권력이라면, 그것이 곧 아름다운재단의 지속가능성이 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의 25년과 그 이후 세대를 넘어 이어질 변화의 동력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