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서 ‘우리’가 되어가는 시간
청소년기는 참 어중간한 시기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온통 모르는 것 투성이다. 그래서 청소년기는 자아탐색의 시기이기도 하다. 혼자서 자아탐색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아는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가족이 아닌 사회의 보호를 받는 ‘보호대상아동’ 청소년에게 특히 부족한 자원이 바로 이런 경험과 관계망이다. 어른의 시기를 앞두고 또래보다 고민이 깊고 스트레스가 크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고민을 솔직히 털어놓을 친구를 만나기가 더 어렵다. 실컷 스트레스를 풀 기회도 상대적으로 적다.
“(쉼표에서와 같은) 이런 커뮤니티는 ‘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요. 예전엔 그나마 시설끼리의 체육대회가 좀 있었는데 코로나 이후엔 많이 사라졌어요.” (전은성, 가명)
“학교 친구들하고는 아무래도 가족 상황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요. 쉽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없어요.” (정보람 , 가명)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시설의) 선생님을 ‘엄마’라고 말하게 되고. (계속 상황을 숨기다 보면) 혼란이 와요. 힘들죠.” (성혜인, 가명)

이런 청소년들을 위해 아름다운재단과 ‘여울돌 사각지대청년지원센터 봄’은 청소년 커뮤니티활동 지원사업 ‘쉼표’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연 문화교육활동비 300만 원을 지원받고, 연간 3~5회 커뮤니티 활동도 함께 한다. 그러면서 팀별 활동에 참여하는데, 팀마다 먼저 자립한 선배들인 자립준비청년들이 길잡이로 참여한다. 자립 선배들과의 관계망도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다.
청소년 커뮤니티활동 지원사업 쉼표
양육자, 보호자의 부재 등으로 그룹홈, 아동양육시설, 위탁가정에서 생활하는 보호대상아동에게 문화예술활동을 지원한다. 먼저 자립을 시작한 자립준비청년인 길잡이와 또래로 구성된 팀별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지지체계 형성을 통한 심리정서적 안전망을 마련하고, 문화영역 교육활동비 지원을 통해 진로선택권을 확장하고 있다.
길잡이에게도 ‘쉼표’는 후배들과 함께하는 성장의 시간이다. 이현서 길잡이(가명)는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라는 마음으로, 권정민 길잡이(가명)는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보다는 형 같은 존재로 편하게 지내보자”는 생각으로 ‘쉼표’에 합류했다. 박하림 길잡이(가명)는 “아이들과 고민도 함께 나누며 좋은 인연을 만들고 싶어서”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게 무엇일지 찾아가는 배움
‘쉼표’의 지원을 받은 청소년들은 올 한해 저마다 희망하는 분야에서 문화예술분야 교육활동을 경험했다. 입시와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한 청소년도 있고 취미로 새로운 분야를 경험해본 청소년도 있지만, 배움이 즐겁긴 마찬가지다.
노래를 좋아하는 성혜인은 평소에도 음악을 좋아했다. 집에서도 자주 노래를 불렀다. 예전부터 보컬 학원에 다니고 싶었지만, 시설에서는 문화예술분야 교육비까지 지원받지 못해서 고민이 컸다. 그러다가 ‘쉼표’를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 보컬트레이닝을 받았고 실력이 부쩍 늘었다. 학교 축제 무대에도 올라 볼빨간사춘기의 ‘보람할 수밖에’를 열창했다. 친구들은 “너가 이 정도로 잘 부를 줄은 몰랐다”고 입을 모았다.
전은성은 예전에 취미로 미술을 시작했다가 점점 애니메이션에 매력을 느꼈고 어느새 ‘이 길로 가야겠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입시 미술을 고민하던 중에 ‘쉼표’를 통해 기회를 얻었다. 자유롭게 창작하던 때와 달리 입시 준비 과정은 다소 빡빡했다. ‘입시에 통하는’ 그림체로 그림을 그려야 하고, 시험 시간에 맞춰 빨리 그리는 기술도 익혀야 했다. 때론 지치기도 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제과제빵이 취미였던 정보람은 ‘쉼표’를 통해 요리를 배우고 더 넓은 세계를 만났다. 학원에서는 한식, 중식, 한식 디저트 등 다양한 요리를 배웠다. 누군가와 함께 나누어 먹을 밥을 만들고, 누군가에게 달콤한 추억이 될 선물도 건넸다. 함께 사는 친구들과 선생님들, 학교 친구들에게 자신이 만든 디저트를 주면서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진로부터 자립에 대한 고민까지, 즐거운 수다 속에 쌓이는 관계
문화교육활동이 혼자만의 기쁨이었다면 커뮤니티활동은 함께하기에 더 큰 행복이었다. 청소년들은 올봄 OT를 통해 서로를 처음 만났지만, 캠프와 팀별 활동을 하면서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팀별 활동은 한팀으로 구성된 길잡이와 청소년들이 함께 논의하며 진행한다. 팀에 따라 반지나 쿠키, 향수 만들기 등의 체험활동도 하고, 미술 전시회나 테마파크 나들이도 했다. 놀고 쉴 때는 정신없이 떠들고 웃었지만, 진로와 관련된 체험을 할 때는 진지한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커뮤니티활동으로 함께하는 과정을 통해 저마다 소통하는 노하우를 찾아냈다. 권정민 길잡이는 “어떤 활동을 할지 투표하는데 팀원들이 서로를 배려하느라 쉽게 의견을 내지 못하더라. 그럴 때는 갈만한 곳을 먼저 제안하고 팀원들에게 괜찮은지 물어보았다”고 했다. 3년 차인 이현서 길잡이는 이제 베테랑이 되었다. ‘하고 싶은 활동, 하기 싫은 활동을 분명히 말하기’, ‘의견을 안 냈다면 나중에 불만을 티 내지 않기’ 등 활동 규칙을 정했고, 덕분에 팀내 소통이 훨씬 매끄러워졌다.
때로는 힘들고 어렵지만,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은 역시 사람이다. 쉼표에 함께한 청소년들은 “지원사업이 끝나도 계속 모이고 싶다”, “성인이 되어서 다시 만나고 싶다”면서 서로를 애틋해 했다.
사업에 참여하면서 가장 좋은 순간이 언제였는지 물어보니, ‘1박 2일 캠프에서 밤에 길잡이 선생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 다른 팀 친구들과 친해진 것’, ‘함께 맛있는걸 먹고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 등 구체적인 상황은 조금씩 달랐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때’라는 공통점이 명확했다. 특히 인기가 있었던 프로그램은 청소년과 길잡이가 모두 함께한 1박2일 캠프.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서로를 더 알아가고 고민 상담도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1박 2일은 너무 짧다”며 한목소리로 아쉬움을 나타냈다.
내 마음을 나눌 친구와 함께 만나 행복했어요

‘쉼표’는 스스로를 찾아가는, 그리고 더 큰 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이 길에 함께했던 청소년과 길잡이들은 저마다 무엇을 얻었을까?
이 질문에 성혜인은 ‘친구, 행복’이라고 답했다. 친구는 새롭게 만난 사람들, 행복은 이 친구들과 나눈 감정의 이름이다. 정보람 은 ‘친구, 행복, 기쁨’을 꼽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고민을 나누면서 행복과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전은성은 ‘실력’과 ‘자신감’을 얻었다. 문화예술분야 교육비 지원을 통해 학원에 다니다 보니 실력이 늘고 자신감도 생겼기 때문이다.
길잡이도 한 뼘씩 성장했다. 박하림 길잡이에겐 ‘침착함, 섬세함, 스피드’가 남았다. 침착하고 섬세하게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빠르게 반응할 수 있었다. 권정민 길잡이는 ‘기회, 쉼’을 꼽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기회이면서 함께 즐기고 쉬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현서 길잡이에겐 ‘안내, 이해, 행복’이 생겼다. 때로는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도 인내하면서 더 많이 이해하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행복을 발견한 것이다.
‘쉼표’가 준 선물이 푸짐한 만큼, 이들이 매긴 점수도 무척 높다. 대부분 “90점”, “99점” 등 완벽에 가까운 점수를 매겼고, “100점 만점”도 있었다. 간혹 “80점”, “50점”의 점수도 나왔는데, 이는 사업이 아닌 자신에게 주는 점수였다. ‘내가 더 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마이너스로 작용한 것이다.
“덕분에 한 발짝 나아갔어요”
서먹서먹하던 봄날의 OT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이 왔다. 한해가 끝나가고 사업도 마무리되어가는 계절, 그동안 청소년들은 ‘쉼표’ 안에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어느새 서로의 삶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직접 만나서 못다 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단톡방까지 이어진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거창한 고민이라기보다 소소한 일상에 가깝다. 가장 떠들썩한 화제는 뭐니 뭐니 해도 연애 이야기, 그리고 각자 몸담은 시설에서의 생활 이야기다. 이렇게 별것 아닌 일상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친구만큼 소중한 사이는 없다. 현재의 일상에서 시작된 대화는 조금씩 미래로 확장하고 있다. 자립과 관련된 정보를 주고받고 길잡이의 조언을 들으면서, 보호대상아동 청소년들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간다.
내 고민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는 사람, 내가 힘들 때 기꺼이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활동을 경험하고 때로는 실패도 하면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나를 찾는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혼자 가야하는 길이 아니기에 두렵지만은 않다.
청소년 참가자와 길잡이가 함께하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청소년은 길잡이에게, 길잡이는 청소년에게 서로 하고 싶은 말을 물어보았다.
“쉼표에 함께하는 친구들, 형, 누나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잡이 선생님들이 옆에서 계속 돌봐주면서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덕분에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었어요.” (전은성)
“저 같으면 힘들었을 것 같은데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에 감동받았어요. 저도 어른이 되면 길잡이 하고 싶을 만큼 너무 좋고요. 앞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연락해도 되겠죠?” (성혜인)
“‘나는 아직 진로를 못 정했다’, ‘나는 재능이 없고 뒤처지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자기 삶에 대해 충분히 노력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각자에 맞는 속도가 있으니까요. 그 속도대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 다독였으면 좋겠습니다.” (이현서 길잡이)
“우리 팀 이름이 ‘팔레트’예요. 사람이 저마다 고유의 색이 있잖아요. 앞으로 살다 보면 색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데, 되도록 그 색을 잃지 않고 지켰으면 해요.” (권정민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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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박효원
사진임다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