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양 1,058마리의 죽음이 남긴 숙제, 그리고 희망의 로드맵

공익사업팀 고용우 매니저

2026.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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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시나리오 프로젝트 지원사업다양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에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이어가는 공익 단체들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2025년에는 20개 단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고민하고 실행한 프로젝트를 통해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글에서는 참여 단체들이 직접 전하는 활동 이야기를 통해 작은 시도들이 어떻게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각기 다른 현장에서 시작된 변화의 시나리오를 지금부터 함께 만나보세요.

하얀 눈 속에 묻힌 1,058번의 비명, 행동의 시작

2023년 겨울부터 2024년 봄까지 이어졌던 혹독한 계절을 기억하십니까? 폭설이 내리던 강원도의 산자락에는 우리가 차마 외면했던 비극이 있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217호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인 산양들이 떼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공식 집계된 폐사체만 무려 1,058마리에 달했습니다. 이는 지난 10년간 발견된 전체 산양 폐사체의 약 73%가 단 1년 만에 사라진 충격적인 숫자였습니다.

정부는 이를 ‘기록적인 폭설’ 탓으로 돌렸지만,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했습니다.

“과연 산양들은 단지 눈 때문에 죽었는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더 이상의 죽음을 막기 위해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차단 울타리 철거 로드맵’ 프로젝트의 첫발을 뗐습니다.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3,000km의 철망.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야생동물의 길을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이다.

3,000km, 국토를 가른 ‘녹색 감옥’의 실체

2019년 ASF 방역을 위해 설치된 울타리의 총길이는 3,000km에 달합니다. 서울과 부산을 7번이나 왕복할 수 있는 이 거대한 철망은 백두대간의 허리를 끊고 국립공원 핵심 구역까지 파고들었습니다. 프로젝트 기간 활동가들이 마주한 현장의 실체는 참혹했습니다. 산양은 폭설이 오면 생존을 위해 저지대로 내려와야 하지만, 울타리에 가로막힌 그들은 옴짝달싹 못 한 채 철망 바로 앞에서 굶주리고 얼어 죽어갔습니다. 현장 조사에서 발견한 눈 위의 수많은 발자국은 살기 위해 철망 주변을 빙빙 돌며 헤매던, 이른바 ‘절망의 흔적’이었습니다.

철망 너머 숲을 두고도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 울타리에 갇혀 아스팔트 위 외로운 섬처럼 고립되었다.

이러한 참상을 목격하며 우리는 깊은 슬픔과 함께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양구 팔랑리의 주민 한분은 “산짐승이 못 다니는 길은 사람도 못 다닙니다. 내 집 앞마당에 감옥 창살이 세워진 기분이에요.”라며 죽음의 장벽을 치워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주민과 동물의 삶을 동시에 옥죄는 이 장벽을 허무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였습니다.

정부의 데이터로 정부를 압박하며 일궈낸 변화

우리는 감정이 아닌 과학적인 데이터로 맞서기로 했습니다. 특히 정부와 국책 연구 기관이 작성한 공식 조사 보고서의 수치를 끈질기게 파고들었습니다. 멧돼지 통과율이 11%에 달해 방역 실효성이 떨어지지만, 산양에게는 통과율 0%의 완벽한 ‘죽음의 벽’이 되고 있다는 모순을 증명해 냈습니다. 100가지가 넘는 질문을 던지며 국회와 언론, 거리에서 “누구를 위한 장벽인가”를 끝없이 물었습니다. “방역이 최우선”이라며 꿈쩍하지 않던 정부의 벽에도 마침내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구체적인 물리적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울타리의 생태적 폐해를 인정하고 단계별 철거 계획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우선 2026년부터 생태적 가치가 높은 설악산과 소백산 국립공원 구간을 포함한 136.6km를 철거하기로 확정 지었습니다. 이어 2027년부터는 법정 보호지역 내 생태계 연결성이 높은 구간을 중심으로 추가 철거를 추진하며, 나머지 중장기 검토 구간에 대해서도 현장 조사 결과에 따라 철거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설악산국립공원 내 ASF 차단 울타리 철거 현장. 2026년으로 예정된 본격적인 철거에 앞서, 산양 서식지 구간의 장벽을 우선적으로 걷어내며 생명의 통로를 확보하고 있다.

‘멸실’에서 ‘폐사’로, 생명 존중의 토대를 마련하다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뜻깊은 성과 중 하나는 동물을 바라보는 국가의 시선을 바꾼 것입니다. 그동안 정부는 천연기념물 동물의 죽음을 물건이나 건물이 없어졌을 때 쓰는 ‘멸실(滅失)’이라는 단어로 표현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생명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행정 편의주의임을 강하게 지적했습니다. 그 결과 「자연유산법 시행규칙」 개정을 이끌어내, 이제는 생명의 죽음을 뜻하는 ‘폐사(斃死)’로 용어를 바로잡았습니다. 이는 동물을 관리 대상인 ‘물건’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생명’으로 인식하게 만든 귀중한 제도적 변화입니다.
 

생명의 길을 다시 잇는 여정에 함께해주세요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은 이 모든 성과와 남은 과제를 담아 ‘2026 ASF 차단울타리 철거 로드맵 이슈리포트’를 발간했습니다. 설악산 136km 철거 결정은 위대한 시작일 뿐입니다. 여전히 숲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철망이 남아 있고, 우리는 모든 구간이 완전한 철거로 이어질 때까지 감시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1,058마리 산양의 비극에서 시작된 질문들, 그 해답을 찾아 나선 여정을 담았다.

이번 ‘변화의 시나리오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는 배웠습니다. 잘못된 정책을 되돌리는 힘은 책상 위가 아닌 현장의 진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묻고 또 묻는 시민의 끈기에서 나온다는 것을요. 녹슨 철조망이 걷히고 산양과 사람이 다시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날까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과 함께 생명의 길을 열어주세요. 긴 여정에 힘을 보태주신 모든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글,사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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