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시나리오 지원사업을 담당하고서는 첫 단체방문이라 가슴이 두근두근 했습니다. 대표님이야 오리엔테이션 때 재단 사무실에서 뵙긴 했었지만, 실제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에서는 처음이어서요.
작년 이맘 때는 막 새 공간을 마련해 이사한 직후였던터라 사무실이 썰렁했었다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제가 찾은 BB센터는 일 년 새 교재와 교구가 빼곡이 들어찼습니다. 이제 막 하교하고 돌아온 아이들이 치는 피아노소리로 공간에 더욱 생기가 도네요.
2010년 시작한 「우리는 하나-이웃언어,문화알기(이주여성들이 직접 제작한 이중언어, 이중문화교재를 활용하기)」사업은 올해로 3년차, 아름다운재단에서 지원하는 마지막 해입니다. 생각나무BB 센터를 방문하여 지난 3년의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언어로 자존감을 회복하다
이중언어와 이중문화라는 자원
“언어가 없었다면 다른 아무것도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라지는 언어를 연구하는 현장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의 말이다. 공유하는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누가 무엇을 알고 느끼고 원하는지를 파악하며, 누군가를 설득하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모두가 언어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이 언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용하는 이가 소수이건 다수이건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주여성들의 모임 ‘생각나무BB센터’가 언어 교육을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움켜쥔 이유다.
“2009년 10월 1일 정식으로 출범했는데 그때는 ‘엄마 나라의 언어‧문화 배움터’였어요. 이주민 가정 아이들이 엄마 혹은 아빠를 우습거나 창피하게 생각하고 존중하지 않는 걸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 발족하게 됐죠. 우리 스스로 자존을 찾아야겠다고, 우리의 힘으로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결심하자 바로 언어와 문화 교육이 떠올랐어요.”
처음엔 생긴 것도 다르고 말도 못하는 엄마를 바보라고 부르는 아이들과 그 때문에 속상한 이주여성을 보듬어주려고 애썼다. 단순히 외국인 부모와 자녀의 반목을 해결에 초점을 맞춰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그건 막연한 바람일 뿐이었다. 상황을 좀 더 구체적이고 분석적으로 바라보니 문제의 초점이 달라졌다.
아이들이 집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겪는 어떤 불편을 세세하게 나열하고,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시선이 무엇인지, 왜 엄마를 숨기려는지 고민하면서 추상적으로 뭉뚱그렸던 상황이 다르게 읽혔다.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부모들이 숨기려는 이방인이라는 꼬리표와 그로 인한 차별이었다. 부모와의 반목은 어쩌면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거짓말 속에 갇혀 지낼 삶의 첫 발짝일지도 몰랐다. 판이하게 다른 지점의 발견! 그래서 아이와 친밀해지는 것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자존감 회복’에 방점을 찍게 됐다. ‘엄마 나라의 언어‧문화 배움터’라는 이름을 ‘생각나무BB센터’로 바꾼 것도 더 큰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지식과 정보를 얻는 배움터를 발판 삼아 이주민 가정 구성원의 생각이 나무처럼 풍성하게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이중언어와 이중문화(Bilingual Bicultural)가 자신들이 지닌 강력한 자원으로 다가왔다. 한국어를 잘 못하는 위축된 외부인이 아니라 외국어 잘 하는 호기심 많은 능력자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우리를 설명하는 것은 우리뿐
“아이들이 부모를 이해하려고 언어를 배우고 문화와 역사를 공부하는 것, 상상만으로도 신이 났어요. 그래서 방과 후 교실을 시작했고요. 처음엔 부모와 함께 공부하는 걸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또래와 어울리는 게 좋겠더라고요. 동질감과 더불어 재미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거기에 하나 더 생각해낸 게 그 교재를 센터에서 개발하는 거였어요.”
엄마가 만든 교재! 엄마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생각나무BB센터의 안순화 대표.
사실 이미 정부를 비롯한 타자들의 이주민 교육 교재는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조금씩 부족했다. 풍부한 지식이 담겨 있으나 어쩐지 살아있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나의 말’과 ‘나의 문화’는 활자 속에 갇힌 정보일 뿐이었다. 일상과는 멀리 떨어져 있을뿐더러, 우리 아이들과 접점을 만들어 내기엔 생뚱맞은 교재였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한 번 부딪쳐 보자, 나를 설명하는 책, 내 아이가 배울 교재를 직접 만들어보자 결심한 것이다.
“처음에는 가족들조차 믿어주지 않았어요. 한국에 교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희들이 무슨 교재를 만드느냐는 소리도 들었고요. 하지만 좌절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몸소 경험한 생생한 지혜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문제는 돈이었다. 시간과 열정이라면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책을 만들 수는 없었다. 국가지원이 없는 단체인데다 회원 대다수의 살림살이가 빠듯해 자금이 모이지 않았다. 그때 아름다운재단의 ‘변화의시나리오’가 눈에 띄었다. 여기라면 혹시 우리를 믿고 우리 사업을 지지해 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첫 프로젝트, 첫 프레젠테이션이라 얼마나 떨었는지 몰라요. 한데 우왕좌왕할 시간이 없었어요. 꼭 필요한 자금이라 무작정 열심히 할 밖에요.「하나–이웃 언어, 문화 알기(이주여성들이 직접 제작한 이중언어, 이중문화 교재 활용하기)」라는 프로젝트였는데 최선을 다했어요. 그리고 3년 사업에 선정됐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지금 돌아보면 -은, -는, -이, 조사가 막 틀렸을 텐데 심사위원들이 조금 힘드셨을 것 같아요(웃음). 지금처럼 한국어에 익숙할 때가 아니라 문장도 그렇고…. 어떻게 아름다운재단에서 우리를 믿어주었을까 간혹 신기하다니까요.”
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3년 연속 지원 단체로 선정된 건 2010년, 올해가 사업 마지막 해이다. 그간 중국어와 몽골어 배포가 끝났는데 여전히 주문이 들어온다. 베트남, 카자흐스탄, 러시아의 교구도 만들었다. 교재를 가지고 방과 후 교실 수업과 외부 강연도 진행 중이다.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이주민 사업을 진행할 때 참조하겠다며 교재를 신청할 만큼 공신력도 생겼다. 무엇보다 이중언어 강사들이 좋아한다.
학자들의 결과물만큼 수준이 높진 않지만 피부에 와 닿는 내용이라 수업이 더 풍부해졌다고 입을 모아 칭찬한다. 과연 되겠느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아이들은 기회만 되면 “우리 엄마 외국어 잘 해요, 이거 우리 엄마가 만든 거예요” 자랑이다. 아름다운재단이 없었다면 상상에 그쳤을 이야기다. 너무나 간절했던 변화다.
자발성의 에너지가 끌어당긴 의미
“12월 말에 발표가 났는데 1월 1일에 만나 정말 지원을 받는 거냐며 좋아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해네요. 그때 정말 좋았던 건 돈, 물리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정말 우리를 믿는 곳이 있구나’ 하는 든든함이었어요. 이주여성이 뭘 안다고 그런 걸 하냐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웠는데… 그래서 처음 하는 일이 고된 줄도 모르고 혼신을 다할 수 있었어요.”
뒷심 때문이었을까. 2013년 현재, 20여 개국 800여명의 이주민 가정 이주여성/남성이 생각나무BB센터 회원으로 가입했다(오프라인은 300여명). 그들은 이곳에서만은 자신의 언어를 숨기지 않는다. 삶에 밀접한 그 언어로 이주민 교육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여러 의견을 내놓는다. 직접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도 있다. 무엇을 하든 간에 중요한 건 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수용하며 조화를 이루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아름다운재단이 아닌 기관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뭐랄까, 틀에 맞춰 움직여야 하더라고요. 저를 비롯한 우리 회원들은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한 달 회비 5천 원을 걷어요. 그래서 가끔은 다른 이주민 행사에 가면 돈 안 내고 선물도 받는데 여기 왜 내 돈 내고 봉사까지 해야 되냐는 소리도 듣죠(웃음).”
그냥 심심해서, 뭔가 주니까, 어차피 집에서 딱히 할 것도 없으니까 지원 기관을 찾아 그들의 수혜자가 되는 게 이제까지의 방식이었다면 생각나무BB센터는 판이하게 달랐다. 사실 기관에선 의미를 얻기 힘들었다. 잠시의 헛헛함을 달랠 순 있어도 비전을 가질 수 없었다. 자존은커녕 길들여지는 듯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남다른 생각나무BB센터의 봉사가 좋았다. 낯설고 어려워서 불안하지만 프로젝트 경험을 가질 수 있어 신이 났다. 무엇보다 하고 싶은 걸 맘껏 풀어놔도 되니 기뻤다. 집안에만 갇혀 지내지 않고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도 품게 됐다. 이중언어와 이중문화를 도구 삼아 시혜자였던 그들에게 뭔가 해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로소 인간과 인간으로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 모든 게 자발성의 에너지 때문이었다. 그것은 생각 외로 대단했다. 문제의 시각과 주체를 바꿨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 표면 위로 드러난 증상을 없애기보단 원인을 찾아가도록 지혜를 제공했다. 그래서 이제와는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되었노라고 안순화 대표는 이야기한다.
“2013년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한국 전체 인구의 약 3%인 149만 명이에요. 전년대비 3,43% 증감률인데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다민족‧다인종 사회로 진입할 겁니다. 그때 우리가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교육 프로젝트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환경을 변화시키는지 생생하게 경험했으니까요. 이러한 실천이 우리나라의 이주민 공생의 장을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건 아름다운재단입니다. 우리를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글 : 우승연
생각나무BB센터는
이주민 여성들이 모여 만든 비영리단체로 이주여성, 통역/번역, 이중언어문화와 관련한 강의, 문화예술공연 등의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생각나무BB센터 홈페이지 http://bbcenter.co.kr/
생각나무BB센터의 「우리는 하나-이웃언어,문화알기(이주여성들이 직접 제작한 이중언어, 이중문화교재를 활용하기)」프로젝트는 2010년 하반기 ‘변화의시나리오’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2013년 현재 3년차 사업을 진행 중입니다.
아름다운재단 <변화의시나리오> 배분사업은 우리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공익활동, 특히 “시민참여와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공익활동” 지원을 핵심가치로 합니다. 더불어 함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람과 사회를 변화로 이끄는 <변화의시나리오>와 함께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