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나다
내가 제프리 삭스를 처음 만난 시기는 2010년으로, 서울공항에서 공군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의 낙은 기지 내에 운영되는 도서관인 ‘한성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취침 전에 조금씩 읽는 것이었다. 군 입대 전에 독서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상병 쯤 되어 쳇바퀴 같은 일상에 염증이 날 무렵의 책은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 때 만난 책 중 하나가 제프리 삭스가 쓴 ‘빈곤의 종말’이었다.
‘하버드대 수석 졸업’, ‘최연소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코피 아난 UN사무총장 특별자문관’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저자가 쓴 책이라 왠지 모를 기대감과 위압감이 있었던 책이다. 사실 빈곤은 사회학을 전공하는 나에게 중요한 이슈였기 때문에, 이런 천재가 빈곤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했던 점도 책을 선택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책을 읽어 나갈수록 나는 제프리 삭스에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빈곤 문제 해결을 감성에 호소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제프리 삭스는 철저히 데이터와 상황분석에 의거하여 논지를 이끌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또 다른 점은 똑똑한 사람들이 가진 ‘관심사’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주제들을 똑똑한 사람들이 연구한다면 그 성과의 결실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In Korea
제프리 삭스가 내한강연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10월 10일 오후 6시 30분으로, 제프리 삭스의 강연이 채 열 두 시간도 남지 않았던 때였다. 급히 팀장님께 허락을 받고 난 후 나는 제프리 삭스를 만난다는 설레임과 함께 다음날 아침에 강연 장소인 국회로 향했다. 세계적인 유명인사답게 제프리 삭스의 강연을 듣기 위해 국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제프리 삭스의 도착과 함께 강의는 이내 시작되었다.
삭스는 2000년 9월 뉴욕 유엔본부에서 개최된 밀레니엄 정상회의에서 의제로 채택된 MDGs(Millennium Development Goals : 새천년개발목표)에 대한 설명과 함께 아프리카 시장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시장이 많이 성장하고 있고, 특히나 중국이 아프리카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도 빨리 아프리카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풍부한 자원을 개발하려는 욕구를 가진 아프리카와 기술을 가진 선진국들의 투자 수요가 모두 충족될 수 있으며, 특히나 한국은 새마을운동 모델로 아프리카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부연 설명도 덧붙였다.
※ ‘새천년개발목표’는
UN에서 2000년에 채택된 의제로, 2015년까지 세계의 빈곤을 반으로 줄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 8가지를 목표로 삼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절대빈곤 및 기아 퇴치 / 2. 보편적 초등 교육 실현 / 3. 양성평등 및 여성능력의 고양 / 4. 유아사망률 감소 / 5. 모성보건 증진 / 6. AIDS 등 질병 퇴치 / 7. 지속가능한 환경 확보 / 8. 개발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쉽 구축
그 외에 다른 강연 내용도 있었지만, 한정된 시간 때문이었는지 솔직히 특별히 새로운 설명은 없었던 것 같다. 개괄적인 설명을 할 수 밖에 없던 환경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공공보건 의료에 대한 설명은 기억에 남는다. ‘아프리카에 인프라를 확충하는 일은 10년, 빈곤퇴치를 이루는 것은 20년이 걸릴지라도, 공공의료 확충을 통해 사람 살리는 일은 2년이면 가능하다.’ 는 설명은 거대한 메시지를 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아프리카 권위주의의 문제를 시민사회의 성장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설명 또한 신선했던 것 같다.
던지지 못한 질문
한국의 급격한 경제발전의 경험이 아프리카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설명에서 난 솔직히 갸우뚱 했다. 국제사회에 대한 한국의 도움을 촉구하는 의회에서의 강의라 한국의 발전에 대해 잠깐 언급한 것이겠지만, 이 문제에 대한 제프리 삭스의 진짜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외에 아프리카를 둘러싼 다른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우선 우리나라가 급격한 성장을 이뤘던 70년대의 한국은 정부가 직접 발전 계획을 세우고 경제자원까지 배분하는 ‘발전국가’ 모델이었다. 당시 중화학 공업화를 시작으로 수출주도형 전략을 세웠고, 이 전략이 잘 맞아 들어갔기 때문에 지금의 경제발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발전과정은 자원 개발에 대한 선진국의 참여를 요청하는 제프리 삭스의 아프리카 개발전략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선진국들의 참여가 절대적 빈곤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결국 결실의 대부분을 선진국들이 가져가는 새로운 종속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도 생기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뤘던 1970년대와 달리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를 겪고 있는 지금의 환경이 아프리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강의를 들으며 이 부분에 대한 삭스의 설명을 듣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나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아쉽긴 했다. 워낙 바쁜 분이라 Q&A시간이 짧게 배정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이돌과 광팬
나는 경제학 분야에서 성장과 민영화 위주의 주류경제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조셉 스티글리츠와 ‘제프리 삭스’의 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가진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논증 방식에 감복했기 때문이다.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가로 살아가는 나에게도 이 분야의 이론 정립은 상당히 중요하다. 제프리 삭스가 직접 아프리카에서 시도했던 개발 정책들이 성공적이지 못해 개발 이론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실천과정에서 문제를 겪고 있는 제프리 삭스가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여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다면 빈곤 완화는 현실 속에 구현 가능하다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아무튼 제프리 삭스와의 인연과 강연내용 등 이런 저런 말들을 써놓았지만 오늘의 핵심은 내가 제프리 삭스를 직접 만나고 책에 싸인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기대와는 달리 오늘강의에 의한 지적 충격은 거대한 파도가 아닌 잔잔한 물결에 그쳤지만, 그래도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 아이돌을 직접 만났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제프리 삭스와 같이 사진 찍고 악수하고 명함까지 받을 수 있어 행복했다. 내가 제프리 삭스를 만난 지난 금요일만큼은 대한민국의 모든 광팬을 이해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