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낡은 골목길에 내어 놓은 화분에 봄이 움트고,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폐선 철로에 사람들의 발길이 깃든다. 고은 시인의 시가 적힌 벽화 앞에 오래도록 머문 마음이, 보기만 해도 웃음 나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꼭꼭 눌러 담은 시선이, 군산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풍경 속에 고요히 일렁인다. 2016년 11월 마지막 주, 닷새 동안 산돌갤러리에서 열린 군산 골목길 사진전은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보이고 들리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추억’과 ‘향수’는 군산여행의 단골 키워드다. 여행자의 눈에 비친 군산은 적산가옥을 비롯, 일제강점기 근대 건축물을 간직한 원도심과 ‘기찻길 옆 오막살이’의 현현이라 할 경암동 철길마을, 간판에 ‘Since 1945’를 새겨 넣은 노포,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배경이 된 초원사진관처럼 아스라한 정서와 닿아있다. 그러나 정작 군산 청소년들에겐 빈티지 풍 군산이 낯설기만 하다. 신도심 아파트촌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군산은 여느 도시와 다를 바 없다. 아파트와 공원, 대형마트와 멀티플렉스가 흔한 일상의 풍경이다.
군산골목길모니터링단(이하 모니터링단)은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에서 정기적인 자원봉사활동을 해온 청소년 15명으로 구성된 모둠이다. 모둠의 맏언니 현민(20세)을 제외하곤 대부분 아파트에 거주하는 터라, 군산의 역사가 깃든 오래된 골목이 영 낯설기만 한 친구들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모니터링단은 월명동, 영화동, 해망동, 명산동~둔율동, 경암동~구암동 등 군산 원도심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사진으로 기록했다.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을 더 깊이 알기 위해, 아울러 도시개발로 언제 사라질지 모를 풍경을 기억하고자 시작한 프로젝트다.
추억이 사라지기 전에
인터뷰에 함께 해준 모니터링단의 세 사람, 현민(20세), 세화(18세), 준현(16세)은 두 살 터울의 삼남매를 보는 듯 했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맏이, 똑똑한 둘째, 귀염둥이 막둥이 캐릭터가 세 친구에게 딱딱 들어맞았던 까닭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에서 활동해온 현민은 집이 구 역전 쪽이라, 모둠원 중 유일하게 원도심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유년시절, 골목골목을 쏘다니던 즐거운 기억도 많지만, 기차와 옛집이 사라지는 풍경을 지켜봐야 했던 아쉬움도 크다. 손재주가 좋은 현민은 <군산시간여행 안내지도>에 수록된 지도를 직접 그렸다. 안내지도 역시 모니터링단의 프로젝트 결과물로, 기존 관광지도와 다른 점이라면 철거된 마을의 집들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관광만을 위한 지도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한 지도였으므로.
“제 기억 속에 군산은 8, 90년대 필름영화 같은 색감인데, 이번에 동생들이랑 같이 돌아본 군산은 디지털영화 같은 색감이었어요. 사라지는 풍경이 아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도 좋아요. 골목길을 처음 본 동생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겠지만, 제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사라지거나 더 예뻐지거나, 기억 속의 풍경과 달라진 모습을 새삼 확인했으니까요.”
신도심 아파트촌에서 나고 자란 세화는 모니터링단 활동을 통해 군산의 원도심을 처음 만났다. 체험학습 차 동국사를 방문한 적은 있으나, 절만 둘러보고 바로 떠나 철길마을과 원도심 골목을 거닐어 본 적이 없다. 세화는 사진에 관심이 많다. 라이프 사진전이나 로버트 카파전을 보기 위해 서울까지 다녀왔을 정도. 세화가 느끼는 사진의 매력과 가치는 기록성에 방점이 찍힌다.
“저는 동국사를 대숲과 건물 위주로, 흑백으로 찍었어요. 한데 다른 친구가 찍은 사진을 보니, 관광객을 넣어 생기있게 담았더라고요. 같은 장소를 찍어도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어요. 시작은 사진이었지만 관심분야가 건축, 문학, 역사로 점차 확장되는 경험도 했어요. 동국사의 소녀상, 고은 시인의 시가 적힌 벽화를 담다보니, 자연스레 관심이 뻗더라고요.”
준현에게도 원도심의 골목은 처음 만나는 풍경이다. 근대골목의 대표적인 관광지에 놀러온 적은 있지만, 골목 깊숙이 들어가 본 건 처음이다. 준현은 사진전에 걸린 자신의 베스트 컷으로 경암동 철길마을에서 철로와 함께 연인들의 발만 찍은 사진을 손꼽았다. 기차가 떠난 자리가 사람들의 발길로, 새로운 추억으로 채워진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것. 그렇듯 떠난 자리는 다시 채워지게 마련이지만, 곧 철거될 동네를 바라보는 일은 서글펐다.
“누군가의 추억이잖아요. 누군가, 어떤 가족이 살던 집이 사라진다는 게, 먹먹함이 있더라고요.”
기록한다는 건 기억하겠다는 약속
현민의 베스트 컷은 골목길 답사 중 중1 동생들을 찍은 사진이다. ‘6년 차이’라는 이름으로 중학교 1학년생들과 조를 이뤘던 현민은, 골목길 사진 대신 셀카만 찍던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내내 싱글벙글이다. 큰언니가 고생 좀 했겠다고 위로를 건네니, “아뇨, 애들이 얼마나 귀여운데요~” 라고 받는다. 현민에게 청자발은 [따뜻한 ‘소통’의 기억]이다. 길 위에서 나눈 이야기와 웃음들. 똑똑한 동생, 귀여운 동생, 재미있는 동생들 덕분에 유년시절로 돌아간 듯 행복한 골목대장이 됐다.
세화에게 청자발은 [암실]과도 같았다. 서로 다른 생각과 느낌과 기억을 인화하는 과정이었으므로. 같은 공간을 바라봐도 저마다 다른 그림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준현은 군산골목길모니터링단 활동을 [도서관]에 비유했다. 골목길에서 만난 풍경은 도서관의 무수한 장서와 같고, 사진을 찍는 행위는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문구를 메모하는 일과 같았으며, 사진전은 독후감과 닮았다는 것. 막둥이의 탁월한 비유에 첫째, 둘째 누이들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기록한다는 건 기억한다는 것.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지어 부르는 모든 행위는 기실, 기억하고 간직하기 위함이다. 사라지는 오늘을 붙들어두기 위한 유일무이한 방편인 셈이다. 군산 원도심을 구석구석 기록한 군산골목길모니터링단 덕분에 곧 지상에서 사라질 풍경도 기억에 방 한 칸을 얻어 오래도록 간직될 것이다.
글 고우정ㅣ사진 전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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