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시나리오] 이름으로 진행되는 여러 사업 중에서 유일하게 활동가 개인을 지원하는 사업이 있습니다. 2002년부터 매년 진행하는 ‘활동가 재충전 (휴식/해외연수) 지원사업’으로 활동가 스스로 쉼과 회복을 위해 기획한 재충전의 기회를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6 변화의시나리오 활동가 재충전 해외연수부문 지원사업]은 2014년에 신설되었으며 소속된 단체에서 활동하는 이슈와 관련하여 해외 단체 또는 지역탐방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2016년에는 총 7팀 27명의 활동가가 선정되어 해외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하승우님은 풀뿌리자치연구소이음 진경아님, 과천풀뿌리 이화영님, 김은환님과 함께 풀뿌리 정치현장인 스페인 마드리드, 바르셀로나를 방문했습니다. 직접 현장에 가서 새로운 정치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시민들의 참여 활동을 조사하였고 지난 10월 풀뿌리운동 활동가들과 해외연수 내용을 공유하는 ‘학습공유회’도 진행하였다고 합니다. ‘학습공유회’ 발제 내용은 ‘풀뿌리자치연구소이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15M 운동의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당신처럼 평범한 사람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공부하고 일하고 직업을 찾기 위해 일어난다. 우리는 매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정치, 경제, 사회의 흐름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분노했다. 정치인과 기업가, 은행가들의 부패,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고 목소리를 빼앗은. 이 상황은 일상이 되었고 매일 매일이 고통이고 희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이제 변화의 시간이 되었다. 더 나은 사회를 함께 만들 시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강력하게 요구한다. 더 나은 사회의 최우선 조건은 평등, 진보, 연대, 문화의 자유, 지속가능성, 발전, 복지, 인민의 행복이다.”
15M 운동은 1975년 독재자 프랑코 총통의 죽음 이후 스페인의 권력을 양분해온 국민당(PP)과 사회노동당(PSOE)에 맞섰고 시민들의 집을 압류하던 은행과 유럽연합(EU)의 긴축정책강요에도 저항했다. 가장 대표적인 운동은 강제퇴거당한 사람들의 플랫폼(PAH)으로, 이들은 강제퇴거당하는 집 앞으로 몰려가 스크램을 짜고 힘으로 강제퇴거를 막았다. 실제로 PAH는 약 250건의 강제퇴거와 압류를 막고 비어있는 공간을 점거하고 대안을 중재하면서 마을모임들을 조직했다. PAH외에도 공공장소의 저항캠프(protest camp), 주택점거, 공동체 경작(community gardens), 병원의 사유화에 대한 저항, 교육예산삭감에 대한 저항 등이 15M운동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이 운동의 특징은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거부하고 수평적인 토론과 모임을 통한 결정을 강조했고 서로 다른 운동의 자율성을 인정하되 필요에 따라 함께하는 ‘서로 뒤섞인 자율성(hybrid autonomy)’을 강조했다.
꾸준한 저항을 통해 15M 운동은 2014년에 스페인 전역에서 300개 이상의 지역총회를 조직했는데, 2014년 1월에는 분노를 모아 정치를 바꾸자는 선언이 발표된다. 그리고 2014년 1월 16일에 포데모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뜻)라는 정당이 창당되고, 2014년 11월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라 불린 창립총회를 거치며 실질적으로 정당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포데모스는 기존의 좌파/우파 프레임을 거부했고, 기득권층을 카스트라고 부르며 반부패와 시민참여, 정부 투명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2014년 5월 25일, 포데모스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1,200,000표(7.98%)를 얻어 총 54석 중 5석을 얻었다. 그리고 2015년 12월 20일, 스페인 총선에서는 21%의 득표율로 총 350석 중 69석을 얻어 스페인의 제3당이 되었다.
포데모스는 2015년 5월 24일 지방선거에서 기초선거(municipal elections)의 경우 따로 입후보하지 않고 대중적인 단일후보를 지지하는 반면 주선거(regional elections)에서는 포데모스 후보를 내는 선거전략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그 결과 스페인의 수도인 바르셀로나와 제2의 도시라 불리는 바르셀로나에서는 아호라 마드리드(Ahora Madrid, ‘지금 마드리드’라는 뜻)와 바르셀로나 엔 꼬뮤(Barcelona En Comú, ‘모두의 바르셀로나’라는 뜻)라는 선거연합 지역정당(local party)이 결성되어 시장을 배출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 의원내각제 방식과 정당명부식 투표제도를 가진 스페인에서는 과반수(50%) 득표를 하지 못하면 다른 정당과의 연정을 통해 총리나 시장을 지명할 수 있다. 아호라 마드리드는 31.85%를 득표해 총 57석 중 20석을 차지했고 사회노동당(9석)과 연정해 마누엘라 카르메나(Manuela Carmena)를 시장에 당선시켰고, 바르셀로나 엔 꼬뮤는 25.21%를 득표해 총 41석 중 11석을 차지했고 카탈루니아좌파공화당(ERC, 5석), 카탈루니아사회주의당(PSC, 4석), 후보활동인민연대(CUP, 3석)과 연정해 아다 콜라우(Ada Colau)를 시장에 당선시켰다.
스페인의 새로운 사회운동과 정치 운동은 부패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일상적인 삶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익숙한 관행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있었다. 부패한 스페인 사회를 개혁하려면 자기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의 정치운동에서 윤리가 부각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부패에 맞서고 부패를 예방하는 장치로서 윤리는 유용하다. 그리고 윤리는 일방향의 것이 아니라 쌍방향의 것이라는 점에서 상호적이다. 윤리는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윤리강령들은 썩은 정치를 바꾸려면 우리 자신도 투명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혁명에서 정치가 윤리를 만들어냈다면, 스페인에서는 윤리가 정치를 조절하고 있다. 아직 1년밖에 안 되었기에 그 성패를 쉽게 점치기 어렵지만, 이것은 분명 어떤 전환점을 가리킨다.
윤리가 더 돋보이는 것은 단지 기득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회가 위기와 전환의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데모스>나 <아호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엔 꼬뮤>가 강조하는 윤리는 초월적인 윤리가 아니라 세속적인 윤리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하지 않는다. 어떤 지향보다는 넘지 말아야 기본적인 합의를 뜻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사회의 무너진 신뢰를 다시 세우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즉 그들은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활용하고 있었다.
당연히 선거 이후에도 시민참여와 시민의 결정 권한이 조직의 중요한 과제였다. <아호라 마드리드>는 시장 당선 이후에 오프라인 토론모임인 코오디네이션 테이블(Mesa de Coordinación)을 두고 다양한 시민 의견들을 수렴하고 있다.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토론과 조정, 협의를 담당하는 컨플루언스(confluencia)가 조직의 운영을 담당하고 중요한 결정은 총회에서 내려진다. <아호라 마드리드>는 시민참여정부(open government)를 주요한 ‘이데올로기’로 내세우고, 다양한 경로로 시민들이 시와 시의원을 관리하고 통제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따라 시 소유 건물의 활용도가 높아지거나 시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바뀌고 있다. <바르셀로나 엔 꼬뮤>도 시 전체에 20개의 구역모임과 17개의 주제별 위원회를 운영하면서 시민참여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가장 중요한 총회(El Plenario)에는 약 1,500 명의 사람들이 3개월에 한 번씩 참석해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많은 사람이 참석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힘들고 어렵겠지만 활동가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아호라 마드리드>의 활동가는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이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있기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승리의 경험이 사람들의 자존감을 높이고 있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효과적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야말로 비효율적인 과정이고 그런 시행착오를 통해 시민들이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는 체계가 아닐까. 아니, 비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전체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합의 과정을 통해 실제로는 정책 결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시민의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산하게 하는 체계가 아닐까.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닐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패배감에 시달리는 건지 모른다.
궁극적으로 스페인의 실험은 승리를 위한 정치연합의 가능성을 열었다. 하지만 기존 정치세력의 갈라먹기식 연합이 아니라 더 세력을 넓히기 위한, 시민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오고 조직하기 위한 정치연합이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조직의 경계가 꿈틀거릴 수 있는 이유는 조직을 구성하는 원칙과 활동할 사람들의 역할이 분명하되, 노동자나 농민, 중산층과 같은 단어들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말 그대로 ‘인민(people)’이라면 누구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포데모스>와 <아호라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엔 꼬뮤>의 기초조직이나 마을모임, 지역총회는 누구라도 참여하고 구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단위이다(<빠>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위계나 권위로 조직되지 않고 자율적이고 획일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조직은 그물망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이 정치실험이 성공한다면 기득권층은 머리를 자르면 목숨을 잃는 괴수가 아니라 끊임없이 증식하는 괴물과 싸워야 한다.
68혁명이 ‘제도를 통한 대장정’이라는 구호를 만들었다면, 스페인의 실험은 ‘인민의 민주주의를 통한 돌이킬 수 없는 정치변화’라는 구호를 만들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68혁명이 다양하고 자율적인 조직들의 가치를 부각했다면, 스페인의 실험은 그런 조직들이 기득권을 잠식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을 재조직한다는 구상을 실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는 어떤 실험들이 필요할까? 스페인에서 그 구체적인 답을 찾을 수는 없다. 다만 기득권의 부패에 맞설 강력한 힘의 조직과 윤리를 따르는 다양한 세력들의 연합, 인민을 호명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줘서 스스로 주체가 되도록 하는 실험들은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지금 이곳에서 시작할 수 있는 고민들이다.
글ㅣ사진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이음)